밀푸색마 EP.265 싫어요 (2)
내가 돌아와보니, 언소영은 바쁘게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었다.
"큰마님 말씀이십니까? 저도 정확히 어디 계신지는 잘..."
양하정과 주여린 때문에 연기되었던 이사를 해치우기 위함인지 식솔들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을 총괄하여 지휘하는데 바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는 남궁세가처럼 살림살이가 남아나는 집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사 직전에 임시로 살던 집이었다.
이사에 며칠씩 걸릴 일은 절대 없었고, 내 질문에 대답해준 하인 역시도 며칠 전이 아닌 오늘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정말 날 피하고 있는 건가?'
언소영이 날 찾아다니다가 그 노인과 싸움까지 벌이게 된 사이, 나는 주여린에게 자지를 넣고 있었다.
물론 강제로 납치당했다는 항변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한 번만큼은 내 의지로 했으니 빼도박도 못할 잘못이었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양하정이 알려주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그 사실에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냥 찾아가도 되는 건가?'
아무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들, 쫓아가서 만나려고 하면 못 만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언소영이 굳이 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찾아간다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들 왔니...?"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우선 지금껏 걱정하고 있었을 어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드렸다.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나를 걱정하고 있었겠지만 어머니는 운신 자체가 편하지가 않아서 굳이 찾아오지 마시라고 내가 따로 전달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섭섭했던 듯, 어머니는 내 얼굴과 몸을 여기저기 만지며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려고 했다.
"많이 나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당분간은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렴."
어머니는 주약선이 주의를 준 부분을 대강 짐작하셨는지 비슷한 말씀을 하셨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아들... 당분간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너무 무리해선 안 된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당겨 몸을 숙인 나를 안아주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너무 무리해가면서 싸웠다는 이야기가 어머니에게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어머니, 저는..."
"약속할 수 있지?"
솔직히 모르겠다. 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시간을 끌면서 어떻게든 언소영과 그 여자를 도망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머리에 피가 몰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놈을 죽이겠다는 선택을 했다.
글쎄, 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
"약속... 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어머니는 잘 생각했다는 듯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 이름모를 노인은 일개 개인으로서 나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 노인의 수하들은 잡히는 족족 전부 자결해버려서 심문은 하지 못했지만, 당혜원은 놈들이 사용하던 무공의 투로 몇 가지를 내게 알려주었고, 나는 이번에도 같은 놈들이 공격해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휘말린게 아니라 애초부터 날 노렸다.'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만약 날 노리고 내 주변을 노릴 작정이라면 나는 절대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현대 지식으로 돈이나 벌면서 밀프와 떡치고 조용히 살 수 있다면 그게 제일이겠지만, 적이 그렇게 두지 않겠다면 나로서도 대비는 필요했다.
"저도 제 몸 귀한 줄은 잘 압니다, 어머니."
하지만 곧 아이를 낳을 어머니에게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걱정시킬 필요는 없겠지.
나는 '너무' 무리하지 않겠다는 약속만큼은 최대한 지킬 생각이었다.
이사는 금세 끝났다. 애초부터 세간에 비해 머릿수가 너무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옮길 것은 많지 않았다.
둘씩 같은 침상을 공유하던 여인들은 이제 다시 각자의 방에서 지내게 되었고, 애초부터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공간이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그다지 쏠리지 않았다.
의원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관심은 그보다는 며칠 전 의원에서 소란을 피웠던 미치광이 무림인에게 쏠려있었는데, 사람들은 의원의 명성이 드높다보니 벌어들인 돈에라도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냐고 수군댔다.
그 때문에 여기서 더는 지내지 못하겠다고 요양차 머물던 몇몇 부잣집 마나님들이 방을 비우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형편이 궁핍한 사람들은 쉽게 의원을 떠나지 못했다.
여기처럼 성심껏 치료해주면서도 돈을 거의 안 받다시피 하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흠! 이것으로 빈자리가 생겼으니 본녀가 들어오는 것에는 이견이 없겠지?"
"...예, 군주님."
"쉿. 남들이 듣지 않느냐. 전처럼 성 부인이라고 부르거라."
일은 그렇게 되어, 결과적으로 노인을 비롯한 암중세력의 공격은 주여린이 들어올 자리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주여린은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어보였지만, 아무래도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 확정이 날 때까지는 여기 머물다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좋다고 좆방망이를 들이민 주제에 미안하지만, 언소영이 아직도 나를 은근히 피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주여린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조금 걸리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자리도 빈데다가 막을 명분이 없었다.
'정체를 감출 거면 전처럼 하오체라도 쓰던가.'
나에게는 군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말투는 전혀 신경쓸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긴, 하오체를 쓸 때도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풀풀 났으니 말투를 바꾼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상... 강 소협, 여기에 있었군요."
그 때, 언소영이 나를 찾았다. 의원 쪽의 일을 당혜원이 맡아서 처리한다면 언소영은 특별구역, 그러니까 사실상 우리만을 위한 구역의 안주인 같은 역할을 맡았다.
여기로 온 뒤로 사흘간, 언소영은 사적인 용건으로는 나를 한 번도 찾지 않았지만 공적인 용건으로까지 나를 피하지는 않았다.
잠시 주여린에게 시선을 준 언소영은 다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제 곧 여름도 끝이 날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 겨울을 준비하는 편이 좋겠어요. 포목점에서 구매해야할 것들이 이렇게..."
품목이 정리된 종이를 내밀면서 내게 간단하게 설명하는 언소영이 주여린을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몇 번이나 설명을 놓쳤지만, 언소영은 차분하게 다시 설명해줄 뿐이었다.
'답답하다...'
차라리 내게 어떤 부분이 섭섭하다고, 고쳐주면 좋겠다고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언소영은 그저 묵묵히 할 말만을 하고 바로 가버리니 나로서는 답답한 마음만 가득 찰 뿐이었다.
"왜 그러느냐?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주여린이 살짝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대답에도 주여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나는 단지 주여린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언소영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지부진하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고민하면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오늘밤, 나는 언소영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작정이었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든 고개를 숙이든 해서라도 기분을 풀어줘야지.
늦은 밤.
언소영은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었다.
잠이 들려고 반쯤 눈이 감기고 나면 꼭 자신을 보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어린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아...'
최대한 그 날이 오는 것을 미루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꿈 속의 그 얼굴을 현실에서 보는 날은 언제고 찾아올 것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여자들도 많으니, 그녀에게 실망하는 순간 그녀에게 쏟아지던 애정은 다른 여인을 향할 것이 확실했다.
'성 부인이라고 했던가...?'
오늘 남편과 이야기하고 있던 30대 초반 정도의 여인. 미색이 상당한 그녀는 남편에게 꽤나 호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이미 혼인한 여인이기는 했지만 또 어떻게든 구슬려서 자기 것으로 만들겠지. 그렇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언소영이 끼어들 자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언소영은 어떻게든 그런 생각을 지우고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곧 그녀의 처소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떴다.
[소영, 나에요.]
강윤의 목소리였다. 요 며칠 자신이 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정면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찾아온 듯했다.
"...들어오세요."
언소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태연한 안색으로 사내를 맞이하는데 집중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죠?"
웃기는 소리였다. 그들의 밤은 거의 서로의 피부를 맞대는 시간으로 정해져있었다.
여인들이 여럿이다보니 그냥 잘 때도 많았지만 밤에 찾아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은, 언소영의 기색이 심상치않은 탓에 사내가 다른 여인들을 찾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언소영과 침상에 나란히 앉은 사내는 무거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과하러 왔어요."
"...네?"
언소영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녀가 아는 한, 사내가 그녀에게 사과해야할 잘못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범하는 잘못을 포함한다면 사내는 남은 평생을 죄를 반성하며 살아가야겠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 잘못은 비교적 가볍게 넘긴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사과?"
"기분이 상한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로 반성하고 있어요. 소영이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다니..."
언소영은 정말로 사정을 몰라서 되물은 것인데, 사내는 언소영이 억지로 외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듯했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을 들어보니 언소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납치당한 것이야 사내의 책임이 아니고, 언소영이 위기에 처한 일 역시 천리안이라도 가진게 아니고서야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여인을 둘씩이나 건드리고 있었다는 것은 반성할 필요성이 있어보이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늦은 밤에 죄인처럼 죽을상을 짓고 찾아올 일은 아니었다.
푸훗
언소영은 피식 웃음이 나왔고, 그것을 본 사내는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용서해주는 거에요?"
"용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화를 내던 것도 아니었어요. 애초에 그런 걸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언소영은 계속해서 쿡쿡대며 웃었고, 그 웃음이 길어질수록 사내 역시도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게 며칠씩이나 사내를 피하느라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풀어졌고, 사내는 자연스럽게 언소영의 등허리에 팔을 뻗었다.
탁
"어...?"
하지만 그렇게 뻗어가던 손을 언소영이 쳐내자, 사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손을 쳐낸 언소영 역시 만만찮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소영...? 왜...?"
"그, 그게... 오, 오늘은, 안 돼요."
사내의 표정이 더욱 의아해졌다. 달거리일 때를 제외하면 여인들은 사내의 요구를 거부한 적이 없었고, 언소영은 지금 그 시기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사내의 시선에, 언소영은 급하게 덧붙였다.
"아, 아무튼 안 돼요. 그냥, 싫어요."
사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도, 언소영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나신을 내보인다면, 사내는 틀림없이 언소영에게 실망할 것이었다.
차라리 사내가 섭섭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될지언정, 사내가 실망하는 얼굴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오늘은 그냥 가줘요...'
"싫어요?"
"그, 그래요, 싫어..."
"그럼 좋게 만들어줄게요."
"자, 잠깐...! 흐윽...!"
사내는 침의 사이로 거칠게 손을 밀어넣으면서 그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소영은 떠올렸다.
제법 오랜 시간 즐겁게 몸을 섞는 관계가 유지되면서 어느새 잊고 있었지만, 애초에 사내와의 관계는 강제로 시작된 관계였다.
"아읏... 잠깐... 안 된다니까...!"
사내의 손이 그녀의 몸을 서서히 달궈오는 느낌에, 언소영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두 사람이 보냈던 첫날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오늘 사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