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64 싫어요 (1)
나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드느냐?"
이상할 정도로 개운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사부가 내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나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사부님?"
"치료는 잘 된 모양이다만...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해보거라."
나는 몸을 확인해본 다음 전혀 이상이 없는 것을 깨닫고 사부에게 말했다.
"전혀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역시 처녀혈과 모유를 섞어 만든 단환이 효과가 있었군."
사부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자, 그럼 약속한 대로 3년간 수동펌프 제작의 비술을 수련해야겠지?"
"예? 저는 황궁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남궁학에게서 3년 동안 수련을 받는 동안 이 세상의 처녀막이 전부 사라져버리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남궁학의 아버지인 교주가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을 것인데, 나는 도저히 그런 환경에서 3년이나 버티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 너는 내 고자를 고쳐줘야되지 않겠느냐!"
검성이 검신을 손으로 잡고 검병으로 날 쿡쿡 찌르면서 외쳤다.
분명 팽연화에게서 배운 의술에 고자 회복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먼저 낭심을 걷어찬 다음... 또 뭐였지?
"오! 드디어 소림사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어찌어찌 거시기가 되살아난 검성이 껄껄 웃었다. 다시 보니 검성의 얼굴이 황보효선으로 바뀌어있었다.
황보효선의 가슴팍이 갑자기 부욱 뜯어지더니 가슴이 제 몸통보다 커다랗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여인의 가슴은 클수록 좋다 하였는가? 이 정도로 크면 어떠하겠는가?"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가슴은 계속 커지고 커져서 어느새 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질식해서 죽는다...!'
나는 또다시 눈을 떴다.
"꿈이었나."
뭔가 괴상망측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마지막에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지는 가슴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진짜 젖가슴이 있었다. 너무 바짝 달라붙어버린 탓에 숨이 막혀서 그런 꿈을 꾼 모양이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아릿하게 치미는 전신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우선 눈앞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팔을 천천히 움직여 눈앞의 가슴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데, 어쩐지 가슴의 감촉이 낯설었다.
"소, 소협... 저, 정신이 들었으면, 조금만 떨어져줄 수는..."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인데, 내 여자 중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여자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혀 기억에 없는 여자가 있었다.
"누구십니까?"
난 반사적으로 누군지 물어본 다음 후회했다. 일단 사과부터 했어야했는데.
주약선은 마치 악귀처럼 적을 죽이려고 덤비던 혈인이 잠에서 깨어난 다음 미안하다면서 얼른 손을 놓고 몸을 빼는 것을 보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밤, 사복검을 휘두르던 노인이 달아난 다음에도 사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적을 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가지 못하게 붙잡고 싶었지만 사내는 그런 몸으로도 지친 주약선이 붙잡는 것을 억지로 떨쳐낼 정도의 기력이 있었다.
한 여고수가 나타나서 함께 사내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대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다치거나 죽었으리라.
"죄송합니다. 잠에서 막 깨어서 정신이 없던터라... 그러고보니 어제 뵈었던 분이로군요. 소... 아니, 남궁 대부인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주약선이 억지로 눕혀놓은 자세로 어색하게 포권을 했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웠지만 진심이 담긴 인사에 주약선 역시 마주 인사했다.
"그 때 소협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위험했겠죠. 피차 도움을 주고받은 셈이니 이 정도로 하도록 하죠."
물론 노인의 표적이 사내, 강윤이라는 것 정도는 주약선도 들어알고 있었다. 사내는 그 사실을 말하려다 주약선이 고개를 살짝 젓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사내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남궁 대부인께서는...?"
"부상을 입으셨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으십니다."
사내는 안도한듯 미간에 생긴 주름을 풀고 눈을 감았다. 주약선은 사내의 편안한 미소를 보면서 계속해서 설명했다.
"꽤 강한 독에 중독되셨습니다만 내력이 강한 편이셔서 상당 부분 중화가 되었고 당 여협의 도움을 받아서 완전히 해독을 했습니다. 독기가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는 사나흘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의원이십니까? 실례지만 여기에서는 뵌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다른 의방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예, 조금 멀리 있는 곳입니다만."
주약선은 은근슬쩍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만은 회피했다.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여인 혼자서 떠도는 몸이었던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용술을 사용했다.
얼굴과 몸매를 조금 통통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추근대는 사내들이 싹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는 어지간하면 역용술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그런 사내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부류였다.
'대체 여자를 몇이나...'
사내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지만 사람이라면 그런 미인들, 그것도 남편이 있는 여인들만 골라서 줄줄이 끌고 다니는 남자가 자신에게 눈독들이는 상황을 껄끄러워하는 것은 당연지사.
사내의 안위를 염려해서 모여든 여인들 역시도 주약선, 본명 화운영의 정체를 감추는 것에 적극 협조해주기로 약속했다.
괜히 경쟁자를 늘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들의 입장은 주약선과 일치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소협이 더욱 심각합니다. 오늘은 우선 편히 쉬고 차차 상태가 좋아지는대로 다시 움직일 생각을 하는 것이 좋을 거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의원님."
사내는 주약선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추근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기혈이 그렇게 뒤틀렸는데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리는 없지.'
사내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기혈은 제멋대로 꼬여있었고 전신의 근맥은 혹사당할대로 혹사당해 지금은 수저를 들어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었다.
터져나가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몸을 혹사해서 기어코 적을 격퇴해낸 것은 협행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무모하기 이를데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나마 잘 넘어갔지만 두 번 다시 이러면 안 됩니다. 정말 무공을 잃을 수도 있어요."
주약선은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내가 한 번 정신을 차린 이상, 이제 급한 고비는 넘겼다고 할 수 있었다.
사내가 잠결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가슴을 향해 안겨오는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강윤과 언소영 두 사람 다 상세가 가볍지 않아 치료를 위해 손을 놓을 수 없었을 뿐,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몰래 역용술을 펼치고 다시 이 모습을 감추면 그만이었으니까.
주약선은 두 번 다시 사내 앞에서 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자신을 의원이라고 소개한 신비한 분위기의 미녀는 첫날 이후로 볼 수 없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주약선이 나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나를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매일 심심한 맛의 죽과 쓰디쓴 탕약만을 들고 오는 그녀를 반기기는 조금 그랬다.
한편 내가 하루만에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내 여자들은 따로따로 한 명씩 나를 찾아와서 병문안을 하고 갔는데, 그 중에서는 뜻밖에도 팽연화가 있었다.
"그게... 이미 들켜버려서... 정말 미안하네."
팽연화는 양하정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양하정은 내가 주여린을 두고 나간지 얼마 안 돼서 나를 도우러 쫓아왔지만, 내가 지나간 다음 복구된 포위망을 뚫느라고 제법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나를 붙잡던 그 이름 모를 여자와 같이 나를 붙잡은 모양인데, 당시에 나는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상태여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놓친 노인을 이기어도 한 방으로 정리한 팽연화가 의원에 도착했을 때, 양하정은 나를 조심조심 안아올리고 있었고...
'서로 알아봤다는 말이지.'
한껏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안고 있던 양하정과, 내 아이를 가져서 배가 불룩한 팽연화는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내 손길이 닿아있다는 것을 짐작했다고 한다.
비상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나와 언소영, 그리고 부상을 입은 몇몇 식솔들을 의원으로 옮기기에 바빠 지금까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지는 않았다고.
"그런데 그 몸으로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요?"
"그게... 실은 아이를 갖기 전에 깨달음이 있었네."
팽연화가 자주 사용하는 이기어도는 어디까지나 기를 활용해서 사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같은 수준의 고수가 직접 병기를 쥐고 싸우는 것에 비하면 위력에 손색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팽연화가 고심하던 것이 이기어도를 직접 손에 쥔 상태로 싸우는 것이었는데, 육체와 도에 각각 적용되는 기의 흐름을 완벽하게 합일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완성시키면서, 어도비행, 그러니까 도를 잡거나 아예 그 위에 올라타 하늘을 나는 재주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동빈도 아니고...'
도교팔선 가운데 검선, 여동빈은 검을 타고 하늘을 날았다고 하는데, 팽연화는 도를 타고 똑같은 짓이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그게 다, 자네 덕분이기는, 한데..."
나와 떡친 결과 경지를 올린 팽연화는 이제 오빠인 팽무도와 싸워도 크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며 의기양양한 기색을 보이다 흠칫 양하정의 눈치를 보았다.
"내게 그럴 것 없습니다, 아가씨."
한편 그 팽무도의 부인인 양하정은 오히려 팽연화나 다른 여자들에 대한 문제에는 크게 신경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주여린, 그러니까 군주와 내가 떡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 가장 신경쓰이는 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가 없으니 그에 대해서 마음대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결국 주여린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지만.
결론만 따지자면 내가 놓칠 뻔했던 노인은 팽연화가 잡았고, 많이들 다치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도 없었으니, 불행중 다행인 결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걱정없이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고, 1주일만에 그럭저럭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뭐라구요?"
그리고 나는 그 때가 되어서야, 언소영이 나보다 3일 먼저 완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