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62화 (262/383)

밀푸색마 EP.262 죽여버린다 (1)

"이노오옴!"

조장은 노성을 터뜨렸지만 감히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무엄하게도 귀하신 분의 옥체를 안고 있는 저 자.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내력을 되찾은 상대가 군주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열 가지도 넘을 것이었다.

"조, 조장, 이,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하면..."

"당신."

성연군주가 더듬대며 꺼낸 말을 남자가 또다시 무엄하게도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의원에 변?"

황족의 육신을 범하고 있던 사내가 더러운 양물을 뽑아내며 입을 열자, 조장은 이를 악물었다.

"자세히 말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 맞붙어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장은 아는 범위 내에서 상세하게 알려주면서 사내의 허실을 살피며 군주를 구해낼 틈을 노렸다.

"지금 바깥으로 나가보면 하얀 빛이 계속해서 뻗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나도..."

"하얀 빛..."

상대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슬금슬금 손을 검병을 향해 뻗어가던 조장은 다짜고짜 사내가 군주를 집어던지자마자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꺄아아아악!"

"개자식!"

저대로 날아가면 틀림없이 다친다.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진 조장은 최대한 신법을 동원해 쫓아갔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조장이 군주에게 신경이 쏠린 틈에 사내는 바깥으로 몸을 날렸고, 당장이라도 벽에 부딪힐 것처럼 날아가던 성연군주는 급격하게 속도가 늦춰지며 사뿐하게 지푸라기 더미 위에 내려졌다.

지푸라기에 풀썩 앉혀진 성연군주를 보고서야 간신히 마음을 놓은 조장은 몸을 날려 사내를 쫓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쪼, 쫓아가서는 아니 된다...!"

손으로 젖가슴을 가린 군주의 당부에 조장은 우뚝 멈춰섰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르게 떨리고 있었다.

<일단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죠. 군주님, 저 자가 절 쫓아오지 못하게 막아주십시오.>

사내가 미리 전음을 주기는 했지만, 갑자기 내던져지는 경험은 그녀에게 있어 생경한 것이었다.

"군주마마...?"

조장의 의아한 목소리에도 주여린은 나머지 한 손을 더 들어서 젖가슴을 가릴뿐,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군주의 망측한 모습에 생각이 미친 조장이 몸을 돌리자 군주는 그제야 손을 치우고 허리로 밀려내려간 젖가리개를 다시 올리고 앞섶을 도로 여몄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서야, 창고 바깥에서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양하정의 존재를 알아차린 주여린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망할 계집 같으니...'

백발의 사내, 은호(銀虎)는 빠르게 사복검을 놀리며 신비여인이 날리는 침을 받아냈다.

자칫 몸에 맞기라도 했다간 그 곳을 기점으로 내리찍히는 뇌전에 기맥이 뒤흔들리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복검이 길어서 뇌전이 올라오기 전에 내력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지, 평범한 검이었다면 대응할 틈도 없이 감전당하며 싸웠어야했을 것이다.

"흐읍!"

사복검을 둥글게 휘감아 돌려 침을 튕겨내며 접근하자, 여인은 훌쩍 뒤로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재주밖에 없나보구나. 화씨일문의 계집아."

여인은 얼핏 아무런 반응이 없는듯 했지만 사내는 여인의 기세가 순간적으로 흔들린 것을 손에 잡힐듯이 느낄 수 있었다.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강호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아니, 세상사 모든 일이 그럴지도 모르지."

"...생각 밖으로 견문이 넓군요."

"화씨일문에서는 인체를 움직이기 위해서 몸 안에서 벼락이 움직인다고 주장한다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심법이 직계에게만 비전으로 이어진다고 들었다."

여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 자체가 긍정을 의미했다. 여인, 주약선은 간신히 벽에 기대선채 숨을 고르고 있는 언소영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틈에 잠시 물러나세요. 그 상태로는 저 자와 맞서기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언소영에게 응급처치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한 번 거리가 좁혀지면 끝장. 게다가 뇌령심법의 진기는 강력하지만 그만큼 한 번에 소모하는 정도가 심했다.

이 각(약 30분)도 지나지 않아 벌써 내력이 절반 가까이 소모되었으니, 싸움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침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언소영이 일단 자리를 벗어나서 도움을 청해주길 기대했지만, 언소영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전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둘 수는 없어요. 게다가 이 주변에는 이미...]

"저 언가 계집을 도망보낼 생각이라면 염려할 것 없느니라. 너희 두 년 모두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사내는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여기 혼자 온 줄 아느냐? 바깥에 있는 녀석들이 죽어서라도 네 년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줄 것이야."

언소영이 여길 벗어날 여력이 없다면 주약선에게 남은 길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상대의 빈틈을 찔러 반드시 끝장을 보는 것.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지만, 그 외에 길이 없다면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조용히 숨어있었더라면 이대로 저 계집의 목만 베고 끝이 났을 일이다만,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한다하여도 늦었느니라."

"의원으로서, 사람의 생명을 거두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죽인 놈도 그랬지. 의원으로서 남의 죽음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느냐고 했었지."

늘어져있던 사복검이 사내의 손목이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탄력있는 움직임을 보이며 일어났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니 살려달라고 애걸을 하던데... 네 년은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보겠다."

"애걸을 해도 죽였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렇다면 굳이 할 필요가 없겠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맞붙기 시작했다. 여인은 조금씩 물러나면서 상대가 거리를 좁히지 못하게 했고, 사내는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기 위한 싸움이었다.

여인의 장력에 실린 뇌격이 조금씩 힘을 잃어감에 따라, 사내는 점차 과감하게 거리를 좁혀왔고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완전히 사내의 공격권으로 들어갈 정도로 거리가 좁혀질 무렵.

사복검이 일직선으로 찔러들어오자 주약선은 황급히 검의 궤적에서 몸을 빼내는 것과 동시에 기회가 온 것을 직감하고 팔괘의 이치에 따라 침을 쏘아냈다.

검이 멀리까지 쏘아져나간 이상, 그것을 회수하기 전까지는 그녀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펼쳐낸 절초였다.

'아니...?'

미세하게 다른 속도로 날아가는 8개의 침에 뇌격이 실리려던 그 순간, 주약선은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을 보고 목덜미가 서늘해짐과 동시에 바닥에 몸을 굴렸다.

사악

어느새 그녀의 등 뒤를 찔러들어온 사복검을 간신히 피한 주약선은, 잘려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흩날리는 것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주춧돌이 크게 깎여나간 것을 보니, 거기에서 튕겨나온 사복검이 그녀의 목을 노린 듯했다.

"쯧, 감은 제법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이걸로..."

허공섭물로 도로 잡아당긴 사복검을 틀어쥔 사내는 충분히 거리가 좁혀진 것을 보라는 듯 왼손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드디어 네 년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말하지 않았나요?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지껄이는 놈도 많았지. 하지만 죽을 때가 되면 설령 입을 닫고 있다고 하더라도 눈은 공포로 질리는 놈들을 산처럼 봐왔느니라."

[으아아아아악!]

그 때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이어지는 비명소리를 들은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끝도 없이 방해가 들어오는구나. 역시 네 년들을 죽여두기로 한 것이 백 번 잘한 일인 듯해."

[끄아아악!]

하지만 보다 가까운 곳에서 두 번째로 들려오는 굉음을 들은 사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굉음을 내며 듣기에만 요란한 무공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얼핏 듣기에도 수하 몇 명이 비명을 지르고 순식간에 쓰러져나가는 상황이라면 절대로 가볍게 볼 상황이 아니었다.

사내는 발작적으로 사복검을 들어올려 주약선을 향해 내리찍었지만, 주약선은 간발의 차이로 사복검을 피해냈다.

'앞으로 한 번만...!'

한 번만 더 공격하면 여인의 목을 취할 수 있는데, 굉음의 주인은 그것을 두고보지 않았다.

강력한 열양지기가 실린 장력이 등 뒤를 휩쓸어오는 것을 간발의 차이로 회피한 은호가 몸을 돌려보니 장대한 체구의 젊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 잠도 잘 못 자는 환자들이 넘치는 의원에서 설치는 것을 보니 후레자식이 틀림없구나."

"...애송이, 네놈이 강윤이냐?"

은호는 희열에 가득찬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은호의 표정에 강윤은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머리 흰 늙은아."

"큭큭... 역시 치워두길 잘했구나."

"무슨 소리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은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 네놈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아느냐? 얼마만에 돌아온 기회인데, 이것을 놓칠 수는 없지."

"...기분 좋은 와중에 미안하지만, 난 너 같은 놈을 모르는데."

"상관없다. 난 네놈의 목을 가져가기만 하면 그만이니."

두 번이나 적의 목을 취할 기회를 놓쳤음에도, 은호는 기분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리 저 계집년들을 박살내놓았으니, 이젠 네놈만 죽이면 나도 곧 돌아갈 수 있느니라."

"뭐?"

강윤은 그제야 한쪽 구석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언소영을 발견했다.

피로 범벅이 된 모습이 상당히 상태가 위중해보였다.

"언가 계집과 제법 면식이 있는 사이라지? 혹시나 방해가 들어올지 몰라 미리 반쯤 죽여놓았는데 정말 다행..."

"야."

은호는 상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를 느끼고 몸을 긴장시켰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애송이였지만, 기세만큼은 어지간한 중견고수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은호 자신에 비해서는 하수임이 명백했는데도, 뭔가가 이상했다.

어째서인지, 그런 실력의 상하관계를 뛰어넘은 공포가 스멀스멀 발치를 잡아채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날 죽이러 온 거라는 얘기지?"

"말이 짧구나. 하지만 뭐, 제대로 이해한 것 같으니 다행이로다."

"그런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언소영을 저 꼴로 만들었고?"

"그것도 맞다. 허나 하찮은 협의지심 따위로 나를..."

"죽여버린다."

고저가 없이 평이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실린 살기를 알아차린 은호는 무의식을 자극하는 공포를 억지로 떨쳐냈다.

"실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리하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전까지 들려오던 굉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사내가 발을 굴렀고,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정도로 쾌속하게 사내가 접근해왔다.

'이, 이런...!'

순간적으로 자신을 압도해오는 속도 앞에서 은호는 황급히 사복검을 휘둘러 권기가 실린 세 개의 권격을 막아냈다.

그 권격 역시도 묵직하기 그지없어 몇 발짝이나 뒤로 물러난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런... 이럴 수는 없다!'

나이만 보아도 영약을 밥처럼 먹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내력을 구사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일으키던 기세만 보아도 상대는 명확하게 자신보다 하수가 분명했기 때문에 그 경악은 더더욱 컸다.

하지만 은호 역시 강호에서 상당한 경험을 쌓아온 자. 곧 상황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무리해서 강력한 내력을 끌어낸 것이로군. 그렇다면...'

은호는 강윤의 기세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권격이 힘을 잃고 무너질 때, 그 때가 상대가 무너지는 순간이 될 것이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은호는 시간벌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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