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55화 (255/383)

밀푸색마 EP.255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3)

음?

나는 눈을 떴다. 어두운 것을 보니 밤인 모양이었다.

어른이 된 견이가 칼로 내 배를 찌르면서 '등선공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개꿈을 꿨는데, 이걸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를 해, 말아...

잠에서 깬 김에 기지개를 켜려던 나는, 팔꿈치 아래부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뭐야, 이거... 어?'

입에도 뭔가가 물려있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점점 정신이 들어보니, 어두운 것도 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눈을 무언가가 가리고 있었다.

'대체, 이게...'

몸을 움직이려고 버둥거려보자, 서서히 내 상황이 감이 잡혔다. 나는 의자 같은 것에 묶여있었다.

팔은 뒤로 돌려 포박되어있었고, 다리도 의자 다리에 묶여있었다.

무엇보다 환장할 노릇인 것은... 내력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사지백해로 매가리없이 흩어진 내력은, 내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빠질만한 이유를 생각해보던 중, 나는 내가 정신을 잃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뒤를 잡힐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던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어떤 남자가 얼핏 눈에 들어왔지만 얼굴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초에 복면을 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빌어먹을...'

양하정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긴장을 풀었다고는 해도 조금은 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틈을 뚫고 들어올 정도라고?

살수 개인의 원한일 가능성은 거의 없고, 그런 살수를 고용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나는 즉시 도망쳐야한다.

"으으으...!"

하지만 나를 묶은 끈도 의자도 굉장히 튼튼했다. 적어도 내력도 쓸 수 없는 내가 손쉽게 박살내고 탈출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나는, 있는대로 힘을 주다가 의자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끈을 끊는 것은 일단 포기한다. 나는 누운 상태로 의자를 어떻게 부술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바짝 묶여있는 상태에서 의자를 부수다간 내 몸도 부러질 가능성이 높았다. 내력으로 강화된 것도 아닌 내 몸은 조금 단련된 일반인이라고 보는게 옳을 정도였으니까.

쿵쿵쿵

그 때, 바닥에 닿아있는 어깨를 통해 나는 진동이 가까워져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사람의 발소리겠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성연군주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어제 양하정이 약재창고에서 나왔을 때 허리끈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안 감겨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리띠 안쪽에 항상 감고 다니는 그녀의 창이 있었으니까.

무려 20여년 전에 본 것이었지만 성연군주의 기억력은 그것이 다른 형태의 허리끈이 아닌, 연창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군주... 마마...? 이것이, 어찌...?"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보니, 양하정의 얼굴이 이상하게 붉게 상기되었던 것 역시도 눈에 들어왔다.

곧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마 내력을 써서 억지로 가라앉힌 것이리라.

"놀랐소? 본녀가 분명 그리 말하지 않았소. 별미를 맛보여주고 싶다고 말이오."

어떤 가능성을 떠올린 성연군주는 그녀를 호위해야한다며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는 조장을 보내 양하정의 뒤를 밟게 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추측이 맞을 경우 강윤이라는 무뢰배를 잡아오라고 명하였고, 조장은 그녀의 지시를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부녀자를 희롱하는 쳐죽일 악적이 여기에 있으니, 이것을 어찌 별미라고 하지 않겠소?"

성연군주는 사람을 보는 눈에는 제법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강윤이라는 자를 잘못 본 것만큼은 뼈아팠다.

그것도 그녀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양하정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이기는 했다.

"이모님, 안심하시오. 이 자가 대체 무슨 빌미로 이모님을 희롱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본녀가 반드시 해결해주리다. 그러하니..."

"마, 마마... 어째서...?"

이 자를 요절을 내도록 하시오, 라고 말을 맺으려던 성연군주는 양하정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팽 부인, 마마께서 말씀하시는데 어찌...!"

"조장, 가만히 있거라. 이모님, 왜 그러는 거요?"

조장에게 보고 받기로,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수모를 겪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했었다.

그가 오늘 몰래 들은 것만 해도, 사내가 거부하는 여인을 억지로 범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닙, 니다... 강 소협은... 제게 아무런 짓도..."

양하정도 말하기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두 사람의 관계의 시작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봐도 좋았다.

나이는 먹을만큼 먹은 그녀가 사내의 양물에 잠시 눈이 돌아가 더듬고 빨아댄 것이 그 시작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사내 역시도 양하정의 육체에 음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에게 처녀를 바치고 몇 번이나 안겼을 따름이었다.

"본녀에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되오. 이 자가 어떤 흉악한 계략을 꾸미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 분쇄해줄 정도의 힘은 있다오."

해맑게 웃으며 말해오는 성연군주의 모습에, 양하정은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서로 합의 하에 관계를 가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성연군주의 시선에 어떤 경멸이 어릴지 두려웠다.

"으으으..."

그 때, 재갈이 물린 사내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은 양하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해하고 계십니다, 군주마마."

"무슨 말이오? 오해라니?"

경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사내는 죽거나,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

"설마 조장이 내게 거짓을 고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런 것이오?"

"그가 들은 것은... 거짓도 아니고 착각도 아닙니다. 하오나..."

양하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와 가진 관계에는... 어떠한 강요도 억압도 없었습니다. 순전히... 소인이..."

"무슨..."

"소인이, 좋아서 받아들인 일입니다...!"

성연군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노리개가 되어 원통한 심정에 휩싸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악적을 자근자근 짓밟게 해준다면 그녀도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녀가... 이르지 않았소... 솔직하게 말해보시오. 이 자가 무슨 짓을 하든..."

"그가 한 일 중에 소인을 핍박하는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마마... 부디... 이 자를 풀어주시옵소서."

양하정의 얼굴에서는 당혹스러운 표정 가운데 어떻게든 그녀를 말려야한다는 생각밖에 읽히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이모님께서, 외도를..."

하였다고?

성연군주는 말을 맺을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양하정은 말로 채 나오지 못한 질문에 긍정했다.

"...그러합니다."

"어째서인가!"

성연군주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에 이끌려 노호성을 터뜨렸다.

하북팽가가 무림에서 손꼽히는 명가라 한들, 황족인 그녀의 입장에서는 고만고만한 아랫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주도 그 중에서 손꼽히는 무부라고는 들었지만, 황실에도 그만한 자가 없지는 않았고 그녀가 관심가질 대상도 아니었으니, 그가 가엾어서는 아니었다.

"그가 원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대는 그럴 여인이 아니야! 내게 고하라, 이 자가 무슨 흉악한 협잡질을 하여 그대를...!"

성연군주는 자신의 어렵던 시절을 지켜주었던 강직하고 아름다운 여걸이, 어리석고 나약한 여인으로 떨어져내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하정이 처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성연군주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정녕... 그러하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마마..."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런 판단도 서질 않았다.

성연군주는 간신히 입에서 말소리 비슷한 것을 쥐어짜냈다.

"당장 풀어줄 수는... 없느니."

"..."

"내 잠시 이 자에 대한 처우를 생각해볼 것이니... 우선 물러가있거라."

양하정은 괴로워하는 성연군주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이모님이라 부르며 자신을 따르던 그녀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것은 양하정으로서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당장은 괜찮을 것이었다. 양하정은 꽁꽁 묶인 상태로 방치된 사내가 걱정스러웠지만, 성연군주가 혼란을 가라앉히기 전까지만 참아달라고 내심 부탁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신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비가 내리고 나면 생기는 무지개라든가, 가을밭에서 누렇게 영그는 오곡이라든가.

"일어서셨어요, 일어서셨습니다, 마님!"

제 손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기어가는 것도 마땅찮던 아기가, 어느새 두 발로 우뚝 땅 위에 서는 것 같은 일이 그러했다.

언소영은 아기방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시비들과 함께 푸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찌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이 맘때면 아이가 서는 일 정도는 흔히 있는 일일세."

그나마 온전하게 서지도 못하고 침상에 손을 얹고 섰는데도, 자신도 두 발로 섰으니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듯 장남은 위풍당당한 자세였다.

하지만 언소영 역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몇 번을 보아도 가슴이 벅찰 수밖에 없는 일인데, 사랑으로 낳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은 묘한 감동까지 느끼게 했다.

"상공이 늦는구나. 견이가 이렇게 선 모습을 보면 참으로 좋아할 것인데..."

화공을 고용해서 아이의 역사적인 순간을 전부 그림으로 남기자는 말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수마투판이라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중얼대는 것을 얼핏 들었는데,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지만.

"어머, 우리 견이, 벌써 어른이구나?"

뒤를 돌아보니 당혜원이 웃으면서 다가와 딸을 안아올리며 견이에게 다가갔다.

"우리 딸은 언제 어른이 되려나...?"

"아부!"

"동생, 상공은 같이 오지 않았는가?"

"네? 먼저 돌아온 것 아니었나요?"

당혜원이 되물어오자 언소영은 미간을 모았다.

여자는 엄청나게 밝히는 주제에 기루 같은 곳을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남편이었기에, 당혜원도 별 생각없이 먼저 돌아갔나보다 생각한 것이었다.

"하긴, 견이가 이렇게 선 모습을 보면 좋아할텐데, 하필 오늘 이렇게 늦네요."

아기들은 한 번 해낸 일도 막상 어른이 보여달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어쩌겠는가, 아기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안 되겠네. 아무래도 찾아봐야겠어."

"의원에는 없던데요...?"

"혹시 돌아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주변을 가볍게 돌아보다 의원에도 들러본 다음 돌아올 것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일세."

언소영은 당혜원과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집을 나섰다.

'엄청 좋아하겠지...?'

역시 화공을 고용하자고 난리를 치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언소영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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