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44화 (244/383)

밀푸색마 EP.244 않으면? (4)

날이 밝았다.

나는 언소영에게 겨우 한 발 싸고 잠을 청했고, 결국 잠이 오지 않아서 내내 운기조식만 하다가 깼다.

"이제 가십니까?"

"예, 소협. 편히 쉬다 갑니다."

호연은 말끔해진 승복이 적응되지 않는지 연신 이곳저곳을 당겼다. 응, 낡은 옷이 딴 건 몰라도 피부에 닿는 느낌은 편하지.

"옷까지 새로 지어주시다니...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그리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원래 승복이 워낙 낡아서 고쳐주려다 답이 안 나와서 아예 있는 옷감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나는 언소영과 나란히 호연을 마중나와서, 어젯밤에 호연이 얘기했던 '뭐든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언소영과 한바탕하고 나서 돌아갔을 때 이미 호연은 들어간 상태였으니, 그에 대해서 대강이라도 파헤쳐볼 기회는 없어진 것이다.

아쉬움을 곱씹었지만 이미 날아갔나 싶어서 나는 스윗하게 웃으며 호연을 배웅해주려고 했는데, 세상 인심이 그렇게 야박하진 않은 모양이다.

"강 소협."

"예."

"어제는 이야기하다 말았습니다만... 빈니는 정말로 소협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호연은 쑥쓰러운듯 몸을 살짝 움츠렸고, 그걸 보는 나도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떤 일이든 빈니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불러주세요. 최대한 빨리 달려가겠습니다."

"꼭 그러지 않으셔도..."

"아니오. 꼭 그래주셔야합니다. 소협이 제 도움을 사양한 결과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가 많이 슬플 것 같거든요."

"알겠습니다. 단, 호연 스님께서도 절 도우시려고 어려움을 감수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말에 호연은 진한 웃음을 머금더니 등짐을 고쳐메고는, 걸음을 몇 발짝 걸어나갔다.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는 건가 싶어서 잠시 넋이 나가있는데, 다시 멈춰선 호연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예?"

"은혜를 갚는데 그렇게 앞뒤를 재가면서 받아들이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소협께선 일단 알겠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빈니는 소협과 그런 약속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호연은 조금씩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불가에서 지켜야할 계율 중에 과도한 고집을 부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내용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소협, 빈니는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남궁 대부인께서도 평안하시길."

"자, 잠깐, 스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호연은 내가 부르는 소리도 쌩까고 언소영과만 인사를 나눈 다음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서둘러 외쳤다.

"호연 스님! 저는 그럼 절대 안 부를 겁니다!"

그러자 호연은 내게 뒤로 몸을 돌리더니, 한쪽 손만 들어 합장을 했다.

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그 합장만을 남기는 모습은 정말 기가 막혔지만...

"정말 가네."

정말로 가버리니 나로서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흠칫해서 돌아보니 언소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역시 어제 한 번 안아준 정도로는 호연에 대한 경계심이 진정되지 않는 듯했다.

일단 화제를 돌려야... 아!

"그러고보니 어제는 호연 스님 때문에 견이 얼굴도 못 봤는데 어디 있는 거죠?"

언소영은 내 티나는 드리프트에 잠시 말이 없더니 넘어가기로 한 듯 몸을 돌려 앞장서 걸어갔다.

견이는 언소영의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내가 전에 깔아둔 차음진으로 소리를 차단한 상태로 있었으니 들킬 일이 없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차음진=섹스필드조성' 이라는 등식이 있어서 생각을 못했는데, 어차피 견이는 항상 누군가 한 사람은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마차에도 비슷한 준비를 했어요."

언소영이 말하기로는 혹시 모르니 시비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한참동안 떨어져 살면서 안 들키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재수없게 길 가다 들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어차피 사람들이 많은 곳에 들어갈 때 정도만 조심하면 되니까, 갑갑한 곳에 오래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철저한 준비를 했으니, 가는 길에 사고가 생길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갈까요?"

"네..."

가볍게 손만 잡았을 뿐인데, 언소영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냥 손을 잡아서 그런게 아니라, 이제 정말 같이 살러 간다고 생각하니 느끼는 바가 있는 거겠지만서도...

어쩐지 그런 풋풋한 반응에 나까지 가슴이 간지러워진다.

그런 상태는 주변의 시비들이 몰래 눈으로만 웃으면서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견이가 꽤나 몸을 놀리는데 익숙해져서 자꾸 내 품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별 일이 없었다.

아기에게는 마차의 진동도 힘이 들 것 같아서 누군가가 계속 안고 있었는데, 뒤집기와 배밀이를 마스터한 녀석에게는 너무 답답한 환경이었나보다.

'조만간 물건에 기대서 일어설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조그마한 생명체가 일어선다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소율이도 대략 1달 남짓 차이가 나니, 비슷하게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 짝이 없었다.

아무튼 우리는 커다란 객잔의 별관을 통째로 빌려 머무는 것을 반복하면서 견이가 힘들지 않도록 느긋하게 이동했다.

한편 시비들은 우리들이 자는 침실에는 절대 얼씬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마음 편하게 밤을 보낼 수 있어서 언소영도 나도 만족스러운 여행길이었다.

"혹, 손룡 강윤 대협 아니신지...?"

간혹 이렇게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내 얼굴은 이미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아는 척을 할 값어치가 없는 수준이었는데, 남궁세가 사건으로 내 이름이 꽤 알려진 모양이었다.

지난 팽가 때와는 달리, 이번 일은 전 무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목격자가 된 셈이라, 꽤나 멀리까지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즉, 거기서 앞장서 싸웠던 내 위명도 알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전혀 계산에 넣고 있지 않던 주목에 혹시나 견이를 들킬까봐 진땀을 뺐다.

어, 그러고보니까...

'당가에서도 소식 들었겠는데?'

외총각의 부각주라는 사람이 왔었으니 당가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었다.

당혜원이 당가와 완전히 소식을 끊어놓은 상태도 아니니, 당가에 들어온 소식은 내 여자들도 모두 알게 되겠지.

지난번에 마교에서 한 판 싸웠던 이야기를 했다가 귓구멍이 아플 정도로 잔소리를 들었던 것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절대 곱게 넘어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한 달에 걸친 여행길의 끝에,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내 그리 경고했는데, 또 나서?"

"잘못했습니다..."

팽연화는 마치 불길이라도 뿜어내는 기세로 꾸짖었다.

"아직 무공이 완전하지도 않은데! 함부로 위험에 머릴 들이밀면 되겠는가 말이야!"

"..."

사내는 그녀의 외침에 움츠러들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보다못한 제갈미령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화 언니,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만... 영 언니도 왔는데..."

그러자 팽연화가 찔끔한 표정으로 언소영을 돌아보았다. 팽연화와 눈이 마주친 언소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팽연화 역시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게, 죄송합니다. 언 여협."

"아니에요, 팽 여협."

사내의 무모한 행동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던 팽연화는 언소영의 존재를 재확인하면서 단숨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은 두려움에 가까웠다.

강윤이 먼저 접근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언소영이야말로 첫번째로 사내와 관계한 여인이 아닌가.

졸지에 빈집을 털어버린 신세가 된 그녀를 언소영이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제갈미령에게 들었지만, 그럼에도 안심하지 못한 팽연화는 이 대면을 굉장히 긴장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언소영과의 첫 대면에서 팽연화는 마치 판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기분으로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팽 여협께서는 양해해주시면 좋겠군요. 상공이 힘써준 덕분에 남궁세가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네, 저도 그 점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강 소협이 나서기에는 아직 무공이..."

"상공의 무공은 뛰어난걸요? 나이를 제외하고 생각해도, 절정의 경지가 부족한 무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만..."

팽연화는 당혜원과 제갈미령의 반응을 보고 그들의 생각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명색이 정파제일 여고수인 그녀 입장에서나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을뿐, 남들이 보기에는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있는 것이다.

저 혼자만 난리를 친 셈이 된 팽연화는 말문이 막혔지만, 언소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아왔다.

"팽 여협께서 이해해주셔요. 남자란 사람들은 자기가 여자를 못 지키면 죽는줄 아는 사람들이잖아요?"

"소영, 나는 딱히 그런 생각은..."

"그래도 고마워요. 앞으로 같이 지낼 분이 이렇게 마음이 고운 분이셔서 저도 한시름 놓았답니다."

남편의 말을 칼같이 쳐낸 언소영은 진심으로 안심하고 있었다.

제갈미령과는 조금 안면이 있는 편이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썩 나쁜 사람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남편을 염려해주는 사람들이라면 마음놓고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팽연화 역시도 첫 대면에 언소영 본인에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언성부터 높인 셈이 된 자신의 행동을 부드러운 태도로 수습해주는 언소영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다른 두 분도요."

"저,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이 집에 들어오는 것은 네 번째지만, 순서로는 엄연히 첫 번째인 언소영은 매끄럽게 새로운 보금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본래 언소영을 호의적으로 여기던 제갈미령은 물론이고, 당혜원과도 자연스럽게 친밀해진 언소영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던 강윤에게 남은 문제는 단 하나였다.

"이제, 저희 거주지를 의원 쪽으로 이전해야겠어요."

의원을 운영중인 주약선과 담판을 짓고, 인원이 크게 늘어 지내기 쉽지 않아진 안가를 벗어나 본래 하렘을 둘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주공간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주약선은 의원을 운영하는데 차질만 없다면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만 잘 해두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강윤의 생각은 틀림이 없었다.

의원에 그가 생각하지 못한 진상고객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러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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