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42 않으면? (2)
"자, 많이 드세요. 길을 떠나시려면 든든하게 드셔야죠."
"감사합니다, 대부인."
일단 몸을 씻고 난 다음, 호연은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고기를 넣지 않고도 푸짐하게 차려진 상 앞에서 호연은 경건한 태도로 감사를 표한 다음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언소영 역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모습을 힐끔힐끔 관찰하기 시작했다.
'역시...'
음침한 삿갓과 허름한 승복을 걸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상당한 미인이었다.
세탁과 수선을 이유로 시비들이 승복을 가져간 탓에 반강제로 입혀진 언소영의 옷을 입고보니, 훨씬 그 아름다움이 태가 났다.
분명 상당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기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도, 덧없는 분위기로 하여금 사내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
그것이 호연이었다.
언소영은 슬쩍 옆에서 식사하고 있는 남편을 곁눈질한 다음, 호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스님께서는 소림에서 어떤 직책에 있으신가요?"
"...참회동의 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참회동이요...?"
참회동이라 함은, 소림에서 불자로서 바르지 못한 행실을 한 자를 가두는 곳. 일종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아무리 소림승이 불사에서 수행을 하는 자들이라고는 해도, 간혹 사고를 치는 자들은 나오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호연은 방장과 같은 배분이라는 점이 걸렸다.
그런 잡일은 보통 이런 수뇌급이 아니라 일대제자나 이대제자들 선에서 해결하고 있을 것인데 어째서...?
"제가 청해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아, 이런... 죄송해요, 스님. 표가 났나요?"
"아뇨, 다들 궁금해하시더군요. 제 배분에 어째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한편 호연 역시도 언소영을 자연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호연 자신과 비슷한 연배일텐데도 단아한 기품을 뽐내는 언소영의 미모는 실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언소영에게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생하다고 해야할까 싱그럽다고 해야할까 알 수 없는 그런 매력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속세의 미추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거늘, 저도 모르게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억지로 멈춘 호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불자로서 실로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개인적으로 마음을 추스려야할 일이 있어 외딴 곳에서 머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언소영은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호연 정도로 배분이 높은 승려가 마음을 추스려야할 정도의 일이라면 결코 작은 일은 아닐터.
친밀하지도 않은 상대의 내밀한 사정을 억지로 말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호연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강 소협 덕분에 상당히 마음의 정리가 되었습니다. 해서 조만간 직분을 내려놓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렇게 다시 만날 기회를 얻으니 정말로 기쁩니다."
"네...? 강 소협이요?"
호연의 눈이 부드럽게 강윤을 응시하자, 언소영 역시 급하게 강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국수를 후루룩 넘기고 있던 강윤은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
"이런, 천천히 드십시오. 여기 물..."
호연의 의미심장한 눈길에 당황했던 언소영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사내는 호연이 건넨 잔을 받아들고 물을 들이키고 있었다.
뭔가가 있다.
언소영은 호연이 강윤에게 보내는 눈길이, 묘하게 신경쓰였다.
여인이 연모하는 사내를 보는 눈길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지인을 보는 눈길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잘 먹고 편히 쉬어야 마음도 따라서 편안해진다고 소협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그랬었죠. 감사합니다, 스님."
게다가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까지.
호연이 비록 승려이기는 했지만, 남편의 취향을 잘 아는 언소영은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일단 같은 울타리 안에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다. 한 남편을 모시는 여인으로서 타협하고 사이좋게 지낼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아직 사내의 여인이 되기로 다짐한 것이 아니라면, 언소영은 최선을 다해 견제할 생각이었다.
강윤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승려 한 사람을 안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적절하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나는 언소영이 보내는 날카로운 눈길이 마치 피부를 저며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아직 아무 짓도 안했는데...'
물론 언젠가 호연과도 그런 관계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사항 정도는 있었다. 그래서 언소영의 의심은 타당하다고 할 수도 있다.
언소영이 가진 옷 중에서는 상당히 밋밋한 디자인의 옷을 입었는데 엄청나게 잘 어울리는 것만 봐도 신경이 쓰이긴 하겠지.
"그런데 소협은 남궁 대부인과는 어쩐 일로 동행하고 계십니까?"
"아, 그건..."
나는 대외적인 설정을 풀어서 설명했고, 호연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의모이신 제갈 여협과 친분이... 그렇다면 작년 가을에?"
"예. 마침 어머니께서 인사차 방문하셨는데 두 분이 그 때 사이가 상당히 좋아지신 모양입니다."
사이가 좋아지긴 했지. 셋이 같이 쓰리썸도 했으니까.
"확실히 여기에 계시는 것보다는 당가에서 머무시는게 괜찮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남궁세가에서 머무시는게 더욱 좋으시긴 하겠습니다만..."
"그, 그렇죠. 하지만 제가 머물면 가모에게 폐가 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아드님이신 남궁 가주 입장에서는 어머니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계시는 것이 더욱 불안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론이었다.
남궁세가에서 머무는 것을 언소영이 극구 피한다는 설정을 기반으로 당가로 간다는 주장이 먹히는 거니까.
애초에 언소영이 왜 고집을 부리는지 의문을 가져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강호에서 남의 거취에 과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인데...
다행히 호연은 뒤늦게 자기가 과한 참견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언소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부인.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군요. 사과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진땀을 빼던 언소영은 기사회생해서 간신히 호연의 사과에 답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호연은 '제갈 여협이 여기 안 계신데 마음대로 모시고 가도 되는 것인가', '가는 길에라도 남궁세가의 호위무사를 동행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며 설정 구멍을 푹푹 찔러왔다.
언소영은 몰래 내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왔지만, 나는 억울했다.
'나는 여기로 초대하자고 한게 아니라 분명히 객잔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결국 언소영과 나는 힘을 합쳐 호연의 질문공세를 받아내기 위해 진땀을 빼느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나 코로 들어가나도 잘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호연이 복스럽게 음식을 잘 먹는 모습만큼은 보기 좋았으니, 그거라도 다행이라고 해야되나.
저녁식사를 마친 후, 호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음식은 맛있었고, 만나고 싶던 사람과 모처럼만에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생각보다 허술한 사람이었나봐.'
식사를 마친 강윤이 언소영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강 소협의 처소는 그 쪽에 있는가 물었더니 잘못 알았다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모습을 떠올리며 호연은 실없이 웃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제법 기운을 차렸다고는 하지만 원래 호연은 이렇게까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강윤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흥미가 일어 계속 입을 열다보면 이미 참견하고 있었을 뿐.
"주책이야."
젊은 청년에게 이런 나이 먹은 비구니가 과하게 관심을 가져봐야 전혀 반갑지 않을 터였다.
잠깐 추억을 곱씹을 생각으로 찾아왔을 뿐인데 얻게 된 우연한 만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일전에는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소림으로 찾아오라고 했지만, 그가 누군지 알고부터는 자신의 도움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꼭, 은혜는 갚아야지.'
강윤이라면 별 일 아니라면서 사양할지도 모르지만, 호연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꼭 해주고 싶었다.
필요하다면, 불자의 도리를 어느 정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음?"
그 때, 바깥을 은밀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그녀의 감각에 잡혔다.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흉사가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고, 호연은 즉시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거기 누구냐!"
온통 검은 옷을 걸친 사내를 발견한 호연은 즉시 반야심공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장심에 맺힌 대력금강장을 떨쳐내 상대를 제압하려는 순간, 호연은 뒤늦게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급하게 내력을 흩어버렸다.
"강 소협...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스님... 그게, 그러니까..."
강윤은 강윤대로 어이가 없었다.
분명 그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을 터였다.
아직 일류의 경지에 머물렀을 시절에도, 한동안 몽아의 뒤를 따르면서 들킨 적이 없었던 은신술이 더욱 능숙해졌음에도 이렇게 간파당하다니.
아무리 처소 간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랜 세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편안한 생활을 강박적으로 기피해온 호연은 객잔에 머물며 편히 쉰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노숙을 자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을 경계하는 기감을 주기적으로 일으키는 버릇이 들었고, 하필 거기에 강윤이 걸려든 것이었다.
"달이, 예, 달이 좋아서 구경하려는데, 혹시 스님께 방해가 될까봐..."
"달...?"
호연은 하늘을 밝게 비추는 둥근 달을 보고 나서야 납득했다.
"그 정도로 조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하지만 스님께서는 내일부터 여행길을 떠나시지 않습니까? 주무시는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상은 전혀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호연으로서는 그런 이유를 짐작할 방법도 없었다.
눈앞의 남자를 선량한 정파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한,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답이었으니까.
"빈니도 달을 보는 즐거움 정도는 알지요.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그 달구경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예...? 예, 물론, 입니다."
"그럼, 그 쪽이 아니라 이 쪽으로 가는게 좋겠습니다. 아까 보니 후원에 괜찮은 자리가 있더군요. 마침 위치도 좋으니, 흥취가 제법 괜찮을 겁니다."
"스, 스님?"
호연은 사내의 검은 소매자락을 잡으며 성큼성큼 걸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사내와 함께 있으면 어쩐지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러고보면 꽤나 오랜만에 하는 달구경이었다. 호연은 보름달을 반갑게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