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41화 (241/383)

밀푸색마 EP.241 않으면? (1)

언소영은 흔들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바깥을 돌아보았다.

누구도 그들을 신경쓸 리가 없거늘, 어쩐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기분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 왜 이러지?'

강윤은 말에 탄 채 그녀의 마차보다 조금 앞서서 달리고 있으니 누구도 신경쓸 리가 없거늘, 누군가가 나타나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끊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두리번거리는 것을 어떤 의미로 생각했는지 다 안다는듯 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시비의 표정이 묘하게 불편했다.

'살림 합치는게 좋아서 그러는게 아닌데, 차암...'

물론 겉으로 드러내고 있느냐의 여부와는 별개로 실제로 좋기는 했다.

아이만 낳아놓고 몇 년을 떨어져 살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아이를 낳은지 1년이 되기 전에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반갑지 않을리가.

언소영은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심정으로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강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난 여행길에서는 말을 잘 타지 못해서 꽤나 고생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느긋하게 말을 몰고 있는 모습이 꽤 봐줄만했다.

그 때, 갑자기 사내가 타고 있는 말이 달려나갔다.

"사... 강 소협? 어딜 가는가?"

[잠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보고 올게요.]

아는 사람?

그러고보니 언소영은 강윤이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가 데리고 사는 여인이라면 다 알고 있지만, 다른 지인은 누구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사내는 꽤나 멀리까지 달려나갔고, 언소영은 말을 몰고 있는 시비에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그녀와 그녀의 시비들뿐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으리라.

'그런데 대체 누구지?'

그 강윤이 멀리서도 발견해서 말을 달려 인사를 하러 갈만한 사람이라니.

언소영은 강윤과 합류하면 누구인지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말을 조금 빨리 몰아서 시전의 입구에 서있는 사람을 향해 말을 달렸다.

너무 멀어서 얼핏 잘못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소림의 가사와 똑같은 복색을 갖추고 머리를 길게 기른 스님이 그렇게 많이 있을리가 없다.

소림은 원래 여승을 안 받아서 꼬추밭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뭔가 상황이 약간 귀찮아 보였다.

"이 계집아, 네가 땡중이지 누가 땡중이란 말이냐?"

대낮부터 주정을 부리는 어떤 남자가 그녀를 윽박지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 옷이 소림의 의복임은 시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허나 빈니는 틀림없는 소림의..."

"예끼! 속이려면 제대로 알아보고 속일 것이지! 소림승 가운데 계집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대충 알겠다. 소림승인척 사칭해서 사기치는 놈들이 가끔 있다던데 그런 쪽으로 오해를 받은 모양이었다.

딱히 본인이랑 상관없으면 그냥 지나가실 것이지 왜 꼭 시비를 걸어서 자기 말이 맞다는 소릴 듣고 싶어하는지 원.

"너 같은 것들이 설치면 설칠수록, 진짜 소림승들이 무슨 피해를 입는지 알기는 하는 것이냐! 썩 그 흉내질 멈추지 못하겠느냐!"

"시주, 허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님."

나는 그들의 옆에서 말을 세우고 내려서며 합장을 했다. 종교 같은 건 사실 믿지 않지만 여기선 이렇게 해주는 편이 편하지.

"...강 소협?"

"예, 호연 스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호자배라고?"

취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했다. 호자배면 높은 건가? 소림의 권절이 현자배라고 들었는데.

"이, 이놈도 한패로구만! 이놈아, 호자배면 소림 방장과 사형제지간이라는 말인데 내 어디에서도 여자 소림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느니라! 썩 꺼지지 않으면..."

"않으면?"

나는 발치를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차서 집어들었다.

빠드드득

내력이 실린 손은 손쉽게 돌멩이를 모래로 만드는 마술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본 취객은 눈을 크게 뜨면서 허벅지를 덜덜 떨어 부딪히며 찬탄의 박수를 보내왔다.

"않으면?"

"소협... 어찌 이러는 겁니까..."

호연이 옆에서 나를 나무라는 듯했지만 취객은 떨리는 다리로 뒷걸음질치다가 뒤로 넘어졌다.

"않으면?"

"으, 으, 으아아아아!"

사라라락

손에 마저 쥐어진 모래를 바닥에 쏟아버리자 취객은 바닥에 주저앉은채 뒤로 물러나다 몸을 돌려달아나기 시작했다.

"안 쫓아가니까 뛰지말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으아아아아악!"

내가 뭐 죽인다고 했나. 그냥 자기가 했던 말을 반복했을 뿐인데.

"소협..."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스님?"

"하아... 잘 지냈습니다."

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와 합장을 주고 받았다. 단, 호연의 합장은 소림승답게 한 손만 들어올리는 반장이었다.

"잠시 오해가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위력으로 겁박해서 되겠습니까?"

"아이고, 위력이라뇨. 저는 제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그 분에게 제 발언의 신뢰성을 높이려고 했을뿐 절대 흉악한 의도가 있었던게 아닙니다."

"...일전에 저를 도와주실 때의 소협은 좀 더 현명하고 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사람마다 그에 걸맞는 대접이 있기 마련이죠.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의심을 품는데 제가 어쩌겠습니까?"

"..."

"본디 돌이란 세월을 거듭하며 모래로 돌아가기 마련이니, 그런 자연의 이치를 조금 앞당겨 중생의 눈을 트여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호연은 미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에겐 소협의 깨달음이 있고 길이 있겠지요. 제가 그것을 고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오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 어느새 호연의 분위기에 말려서 호연이 그나마 납득할 것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스님께서 안휘엔 또 어쩐 일이십니까?"

"이번에 남궁세가에 축하인사를 드리러 잠시 찾아뵈었다가 구화산에 들러 사형의 친우께 서신을 전해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아, 스님께서도...? 그런데 뵌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다른 시주분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어려운지라... 남궁 가주께 양해를 구하고 계속 처소에만 있었습니다."

소림에서 온 사람이 호연 아닐까 잠깐 상상만 해봤는데 그게 정말이었네.

"소림에서도 속세의 혼례식에 축하인사를 보내는군요?"

"예...? 아, 아닙니다. 원래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호연은 말끝을 흐렸다. 뭐지? 뭔가 말을 꺼내기 곤란해보이는 눈치인데. 굳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돌렸다.

"아무튼 반갑습니다, 스님. 막상 남궁세가에서는 뵙지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그렇군요, 소협. 정말..."

또다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왜 이래, 그냥 무난한 말이잖아?

하지만 생각해보니 당당하게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몽아랑 비교하면 선녀 같기도 하고.

그 때, 천천히 따라오던 언소영의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강 소협. 무슨 일인가?"

"아, 대부인. 모처럼 아는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잠시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오, 소림의 분이시군. 헌데...?"

언소영도 아까 그 취객과 비슷한 의심을 품고 있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주. 빈니는 소림의 호연이라 합니다."

"남궁세가의 언소영이라 합니다. 가주의 어미되는 사람입니다만... 혹, 이번에 본 세가를 찾아주신 소림의..."

"맞습니다, 언 시주. 최근까지 귀 세가에 머물렀습니다."

아, 알고 있었네. 그런데도 영 눈길이 곱지 않다는 건...

[소영, 이 분한테는 진짜 아무짓도 안 했어요.]

[나중에 할 거잖아요?]

역시 그런 쪽 문제였나보다. 내가 내 좆대가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탓이지 누굴 탓하리오.

솔직히 예전에 호연이 멘탈이 멀쩡했으면 이미 건드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그렇게 잠시 서로 예의상의 안부를 주고 받은 다음, 호연이 다시 한 번 합장을 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언 시주, 강 소협."

"잠시만, 스님. 이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그대로 떠나려고 하는 호연을 붙잡았다. 이대로 바로 출발하기에는, 해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우선은 여기에서 객잔이라도 잡아서 묵게 한 다음, 내일 출발하는 편이 더...

"맞아요, 스님. 혹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장원에 들러서 쉬고 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예...?"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언소영은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그녀를 우리 장원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시주. 승려된 몸으로 굳이..."

"만나지 못했다면 모르되, 이대로 본가의 손님을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꼭 하룻밤 유하고 가시지요."

호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주."

고개를 꾸벅이는 호연을 마차에 태우면서, 언소영은 나를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가 원한 전개는 이런게 아닌데...

'그보다 견이가 있을텐데, 정말로 데려가도 되는 건가?'

아직 돌도 못 채운 아기라서 틈만 나면 빼액대면서 울텐데. 나는 언소영이 무슨 자신감으로 호연을 초대하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호연은 아주 약간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담긴 목욕통에 몸을 담갔다.

날씨가 더우니 찬물이라도 크게 상관없었지만, 더운 물에 들어가니 전신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윤... 소협...'

꽤나 인상깊은 인물이었다.

지난번에는 마치 선량한 선비처럼 자신을 다독여주던 사람이, 이번에는 불한당처럼 취객을 위협해서 쫓아버리지 않던가.

갑자기 그렇게 돌변해버리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책망하기는 했지만, 도움 자체는 사실 고마웠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남궁세가에 온 김에, 구화산을 들른 김에. 그녀는 꼭 여기로 올 필요가 없었지만, 약간 길을 돌아서 여기로 왔다.

그와 만났던 시전에서.

강윤이 어디에 적을 두고 있는 고수인지 알아본 적이 없었고,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쯤 걸음을 옮겨보고 싶었기에 왔던 이 곳에서, 거짓말처럼 사내와 재회한 것이다.

뽀그르르르르

호연은 이 우연에, 묘하게 가슴이 뛰는 자신을 깨닫고 얼굴을 반쯤 물 속에 잠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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