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35 뭐라 했소? (2)
나는 남궁학을 따라 가주 전용의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남궁혜와 언소영도 함께였다.
남궁학은 나보다 분명히 한 수 이상 위의 고수였다. 그것은 이미 지난 혼례식 습격에서 확인한 바 있었다.
이 기세도 그렇거니와, 뭐든지 힘으로 작살낼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유려하게 펼쳐지는 변검은 어디로 올지 알아도 막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상공, 그냥 받아들이세요. 저도 괜찮을 거고, 다른 사람들도 분명...]
모든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언소영이 전음을 보내왔다. 아마 내가 왜 남궁학의 말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짐작하겠지.
하지만 난 고개를 살짝 저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적어도 묵인받는 밀프 하렘이 어려운 목표라는 것은 물론 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하나씩 포기하면서 후퇴하다보면 원래 목표했던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애까지 낳게 만들어놓고, 그 애를 평생 자기 부모가 누구라고 말도 못하는 신세로 만들 수는 없지.'
그 어려운 목표를 위해 가는데, 남궁학 정도로는 그렇게 큰 장애물이라고 할 수 없다.
"강 소협이 받아들여주어 다행이오. 가주가 되고 나니 이런저런 입방아를 찧어대는 자들이 많아서. 특히 남과 검이라도 섞으려 하면 장로들의 눈이 뒤집히고는 한다오. 가주의 위신이 어쩌고 하면서."
리더가 진다는 것 자체가 집단의 위신에 영향을 미친다? 역시 럭키 조폭이라니까.
하지만 이 가주 전용 연무장에는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적어도 이 푸닥거리의 결과를 알게 될 사람은 없다.
"가주라는 자리가 마냥 좋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하, 좋을리가 있겠소? 나는 사실 가주이기보다 그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오라비로 살아가고 싶은데 세상이란 것이 애초에 이 모양이니 어쩔 수가 없구려."
짐짓 유쾌한척 말하고 있었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오라비' 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역시 남궁혜의 오빠로서 나를 작살내겠다는 의지가 물씬 느껴졌다.
고색창연하게 뽑아든 장검을 감아쥔 남궁학이, 조금씩 피어오르던 투기마저도 서서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투기가 완벽하게 가라앉고 투명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남궁학의 시선은, 오히려 나를 확실하게 손을 봐주거나 아예 죽여버리겠다는 소리없는 외침 같았다.
'재확인은 없어서 고맙다고 해야되나.'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용서해준다고 했으면 항복했을까? 단전에서 끓어올라 사지백해로 흩어지는 내력의 충만감을 느끼면서, 나는 아닐 거라고 결론지었다.
쾅
두 젊은 고수가 맞붙는 순간, 마치 화약이라도 터뜨린 것 같은 폭음이 울렸다.
본래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은 변검과 강검의 성격을 골고루 지닌 무공이었다.
평소의 남궁학은 변검에 치우친 초식 운영을 즐겼는데, 지금은 많이 흥분한 탓인지 시작부터 강공일변도로 강윤에 맞서서 초식을 풀어냈다.
한편 풍부한 내력으로 그런 종류의 힘 대결이 장기인 강윤 역시 지지 않고 권기를 일으켜 맞받아쳤다.
'어쩌면 좋아...!'
언소영은 아들과 남편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아들의 검결은 원숙하게 펼쳐지며 상대를 핍박하고 있었고, 남편의 보법은 마치 바람은 잡을 수 없다는 듯 그 엄밀한 공격권에서 신형을 빼냈다.
젊은, 아니 어리다고까지 할 수 있는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밟은 두 무인의 춤사위는 평소의 언소영이라면 제법 눈이 즐거울만한 것이었지만...
'상공, 그건 허초...! 실초는...'
옆구리를 베어가는 검영이 흐릿해지고 가슴을 노리는 서릿발 같은 검기를 강윤이 수도로 걷어내자 언소영은 내심 안도했다.
누군가의 여인이 되어버린 그녀로서는 전체적으로 열세인 남편의 상황에 안절부절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로 주고받는 공방의 비율은 비슷해보였지만, 상대의 공세를 걷어내기 위해 들이는 수고는 아들 쪽이 훨씬 적었다.
강공일변도라고는 해도, 남궁학이 익히고 있는 변검의 묘리가 어디로 갈 리도 없었다.
변초가 많이 제거되고 훨씬 간결한 초식임에도, 변화의 핵심을 살려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솜씨가 남편의 목을 서서히 조여가고 있었다.
"생각 이상이구려. 과연 구룡의 일인, 아니 그 이상이오."
수의 교환이 길어질수록, 아들은 서서히 제 검로를 되찾기 시작했다.
남편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막대한 경력을 더욱 쉽게 상대하기 위해서는 침착하게 상대의 수를 파고들어 애초부터 의미없게 만드는 것이 제일일 터.
서서히 안정감을 되찾아가는 검로의 엄밀한 그물을 사내도 느꼈는지, 그것을 도로 찢어발기기 위해서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화끈한 열양지기가 실린 장력이 강맹하게 뻗어나가 검로를 짓뭉갰고, 남궁학의 검은 잠시 물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남궁학의 변검은 그런 강한 공격을 상대하는 것에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허공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보다, 남궁학의 검은 조금씩 그 영역을 확실하게 차지하면서, 장력이 뻗어나갈 여지를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팻감을 하나하나 못 쓰게 만들어나가는 것 같은 남궁학의 검을 상대하기 위해서 길은 두 가지.
'남궁학보다 수준 높은 변화가 담긴 무공을 구사하거나, 검초에 몸이 상하는 것을 무시하고 직접 검초를 펼치는 남궁학을 박살내버리거나.'
남자는 그것을 잘 이해했고, 어차피 전자가 불가능할 것을 알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했다.
장심에 진하게 중첩되는 장력이 맺히면서 이미 남궁학의 검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남궁학 역시 검기를 집중시킨 검으로 맞섰다.
얼핏 아까처럼 힘 대결의 양상으로 돌아간 듯했지만, 언소영의 눈에는 남궁학의 검이 일으키는 변화의 사이로 장력이 파묻혀버리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남궁학의 검술은 변화무쌍하지만 그 흐름이 엄밀하여 그보다 아래인 상대는 그 변화를 깨뜨리지 못하고 지금의 남편 같은 선택을 하게 되어있었다.
언소영의 억눌린 비명을 듣지 못했는지 남궁학의 검은 기다렸다는듯 강윤을 향해 쏟아져나갔다.
목숨을 취할 생각까지는 없는 듯했지만, 분명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을 검격.
그 때, 사내의 손에서 음유하고 끈끈한 기운이 풀려나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리되었을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무림에 나와서 남과 드잡이질하면서 뒤통수 치지 않은 적이 드문 강윤이었다. 실질적으로 하나뿐인 것이나 다름없는 선택지에 순순히 목을 내밀 정도로 순진하진 않은 것이다.
'아, 아니, 이게...!'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고 판단한 남궁학이 현음지의 지풍을 검으로 가르고, 잡아내지 못한 일부는 호신기로 버티려던 그 때, 순간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느끼고 당황했다.
기운이 흐트러지면서도 그의 몸에 엉켜들며 잠시나마 남궁학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매서운 지력이 실린 상대의 두 손가락이 그의 이마를 노리고 쾌속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궁학은 황급히 전신으로 내력을 격발시켜 그 구속을 떨쳐낸 다음 검을 들어올려 상대의 지력을 간신히 받아냈다.
"바, 방금 그건 무슨 무공이오?"
강윤의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생각도 잠시나마 잊고, 남궁학은 상대가 펼친 수법에 대해서 물었다.
"나도 잘 모릅니다."
남궁학은 강윤이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강윤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교주가 자신의 장력을 휘어잡아 잡아당긴 것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도 장력이나 지풍으로 남을 붙잡아당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것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적당히 흉내낸 것이니 뭐라 말할 수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남궁학은 타 문파의 제자에게 무공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오히려 실례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오. 내 무심코... 실례를 범했소."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훈훈하게 넘어가나 싶어 강윤은 안도했지만, 남궁학은 좋게 말하면 성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집요했다.
"이해해주어서 고맙소. 그럼 하던 일 계속 해봅시다."
"예?"
여동생을 꼬드긴 이상 책임은 져야하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곱게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한다.
남궁학은 다시 한 번 검을 들어올렸다.
망했다.
나는 남궁학이 선보이는 변검을 간신히 비껴내면서 버텼다.
애초에 나는 남궁학을 상대로, 설령 피튀기는 혈전을 벌여서 이긴다고 해도 절대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빈틈을 봐서 뒤통수를 까버리거나, 저기 무기 거치대에 놓인 무기를 집어던지거나 하는 짓거리는 모조리 봉쇄된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으로는 실력차가 있으니 무조건 지겠지만.'
나는 저번에 교주에게 얻어맞은 이후로 교주가 보여준 한 수를 흉내내보려고 했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잘만 쓰면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서 한 번은 멋지게 제압해서 승리 선언을 할 기회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구속력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약했던 것이 문제였다.
"보법이 참으로 훌륭하구려!"
쥐새끼처럼 도망가지 말고 얌전히 칼침이나 맞으라는 소리 같은데.
남궁학은 완벽하게 자신이 우세함에도 이젠 일말의 방심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현천지기를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제대로 된 절정고수가 된 이후로 꾸준히 수련한 덕분에 현천지기는 양이 제법 늘었다. 이제 두 번, 잘 나누면 세 번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위력조절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현천지기를 사용한 상대는 죽여도 된다고 판단한 놈이나, 사물이었다.
남궁학은 둘 다 아니었기에, 재수없이 정통으로 맞았다간 정말 골로 가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때 남궁학의 검기 실린 검이 다시 한 번 내 상반신을 제압하려 들었고, 나는 등룡보법을 펼쳐 그것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고 하는게 맞겠다.
"아니...!"
잠시 현천지기 생각에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내가 바닥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죄로 발을 헛디디자, 남궁학은 얼굴이 창백해져 얼른 검초를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거 이대로 맞으면 죽을 것 같은데.
주변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지만 내 동작 역시도 슬로우모션이었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
그 때, 넘어지면서도 최대한 검격의 범위에서 몸을 빼내려던 내 시야에 어떤 등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꽈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내 시간은 다시 정상적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고, 그런 내가 처음 본 것은 남궁학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다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세상 하직할 뻔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내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가 언소영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정신 들었어요... 그만..."
"정말, 정말 괜찮은 거죠? 그렇죠?"
"괜찮으니까... 아."
나는 언소영을 안심시키며 그 품을 벗어나려다,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있는 남궁학과 눈이 마주쳤다.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지저분해보일뿐, 크게 다친 것 같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오늘 망했다는 생각만 몇 번째냐.'
나와 언소영의 얼굴을 번갈아보는 것이 분명한 그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이 상황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들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