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34화 (234/383)

밀푸색마 EP.234 뭐라 했소? (1)

남궁학이 자리를 비운 탓에 허탕을 치고, 하루가 지났다.

이번에는 미리 언소영이 언질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가주전을 향해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부인."

"간밤에 평안하셨는가?"

마침 시간도 정확하게 언소영과 합류한 나는, 가주전 앞을 지키고 선 무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언소영과 (대외적으로) 친분을 쌓은 어머니의 이름을 팔아서,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이 날뛰는 이 시국에 시비들만 있는 장원에 가있는 것보다는 당가가 안전하지 않겠느냐고 약을 팔 작정이었다.

물론 언소영을 데려갈 곳을 정확히 따지면 당가가 아니겠지만 그것까지 굳이 당가에 연락해서 확인하지는 않겠지.

"가주께 고해주십시오."

집무실 앞에 서서 말하자, 시비는 곧장 안쪽에 내가 왔다고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묘했다.

꼭 단체로 얼차려 받고 있는 곳에 나타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데...?

[들어오시오.]

남궁학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나는 어쩐지 내 다리가 뒷걸음질을 치고 싶어하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뭐가 문제인거지?

벌컥

"왜 그러시오? 들어오지 않고? 아, 어머니께서도 계셨군요. 같이 드시지요."

내가 잠시 머뭇대는 사이, 남궁학은 직접 문을 열고 나왔다. 하지만 그건 환영의 의미는 1그램도 담기지 않은, 무섭게 굳은 표정이었다.

원래부터 선이 굵은 형이었던 남궁학의 얼굴이 그렇게 되고보니 내 직감이 미친듯이 '넌 망했어'라고 외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문 안쪽을 힐끔 보았다.

황보준과 남궁혜가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이쪽을 곁눈질하는 것을 보고서야 대충 가닥이 잡혔다.

'대체 뭘 어쩌다 들킨거냐...'

이제 언소영을 데리고 룰루랄라 사천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나는 남궁학을 따라서 가주 집무실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언소영의 표정은 꽤나 어두웠는데, 내 표정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학이 당장 칼을 들고 목을 썰려고 덤비지는 않는 것을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사정을 들킨 것은 아닌게 분명했다.

일단 최대한 잡아떼자.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살 수 있다.

남궁혜는 연행되듯 오라비를 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왜 하필 지금 오라비를 찾아온다는 말인가. 어머니가 동행한 것을 보니 대강 어떤 사정인지 짐작할만 했지만 찾아온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난밤, 남궁혜는 황보준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죄송해요, 상공... 저는, 저는 안 되는 것 같아요...>

<혜매...>

먼저 스스로의 치부를 밝힌 것은 남궁혜였다. 몸을 섞지 않는 밤을 매일같이 보낼 자신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 황보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도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 쏟아질 혐오감 담긴 시선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사실을 털어놓아봐야 남궁혜는 더욱 고통받을 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황보준은 결국 남궁혜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다 내 잘못이오... 내가... 내가...>

<아니에요. 다 제 잘못입니다.>

그저 비겁하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사과한 황보준은 스스로에게 조소를 품었다.

한 사람만이 진실을 온전히 밝힌 상태로, 두 사람이 남궁학에게 혼인을 무효로 할 것이라 알리기 위해 가주전을 찾은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자... 강 소협. 이제 말해보시오. 여기를 찾은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남궁학은 단순히 황보준의 신체적 문제를 이유로 혼인을 무효로 하기를 원한다는 그들의 말에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황보준의 문제를 덮는다면, 이 경우 흠집이 남는 것은 여인인 남궁혜 쪽이었다.

남궁혜 본인은 몰라도 남궁혜를 그토록 아끼던 황보준이 그것을 허락했다는 것은, 그 문제를 그리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

<강윤, 그 자로구나.>

그 다음은 어려울 것도 없는 추측이었다.

남궁혜와 제법 깊은 사이인 몇 안 되는 남자들과, 지금껏 세가에 남아있는 극소수의 손님들.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그 하나 뿐이었으니까.

"...왜 말을 못하는 거요? 혹, 남들 앞에서는 말하지 못할 내용이오?"

남궁학이 눈짓하자 황보준은 머뭇머뭇 그 자리를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본 남궁혜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강윤이 오기 전, 남궁혜는 오라비가 비수처럼 들이민 추측을 태연한 척 넘기는데 실패했다.

그 결과, 지금 남궁학은 대놓고 강윤을 추궁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강윤도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얼른 제 용건부터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

"말하기 어렵다면 내 쪽에서 말해야겠군. 혜아와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오라버니..."

"혜아 넌 가만히 있거라. 강 소협, 내 이렇게 비상식적인 경우는 들어보지도 못했소. 분명 소협도 혜아의 혼례를 축하해주러 온 것 아니었소?"

"...맞습니다."

오라비의 서슬퍼런 기세에도 강윤은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신부를 가로챌 생각을 한다는 말이오? 그것이 정녕 협을 따르는 무림인이 해도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말인가!"

"오라버니, 강 소협은 무관합니다. 그건 오라버니의 오해에요!"

부정하는 남궁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녀 역시도 강윤이 자신에게 청혼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남궁학은 누이동생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강윤에게 불타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자, 말해보시오! 혜아를 어찌할 작정이오? 설마 이대로 소박맞은채 내버려두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사실 남궁학의 머릿속은 남들이 보는 것만큼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다.

남궁학은 강윤 역시도 그리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다. 단지 이미 황보세가와 혼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뿐, 그가 매제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동생과 어머니를 최선을 다해 지켜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황보준의 문제를 알았고, 황보세가와는 큰 잡음없이 혼사를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을테니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지.'

이미 결혼한 동생에게 수작을 부린 것은 분명히 잘못이고, 남궁학은 손윗사람으로서 그것을 분명히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노발대발한 척 화를 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강윤이 사죄하고, 누이동생을 확실히 책임진다고 약속한다면 남궁학은 적당히 시간을 끌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들여줄 요량이었다.

남궁학은 이 정도로 압박했으면 당연히 동생을 책임지겠노라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당장은 대답이 어려울듯 싶습니다."

"...뭐라 했소?"

그랬기에 남궁학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대답이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제야 사내의 의사를 분명하게 이해한 남궁학은, 잠시 납득의 과정을 거치고 다음 단계를 밟았다.

불같은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 뭐가 어떻게 꼬였는지는 모르지만, 남궁학은 자기 동생이 황보준과 이혼하고 나서 내가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왜 갑자기 이혼을 하는 거지?'

소박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혼하는 건 확실해보이는데, 이혼할거면 애초부터 나를 끼워넣지를 말았어야지.

남궁혜가 싫은가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언소영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비밀프라고 해도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미인이 남궁혜다.

게다가 내 아이를 낳을 여자라면 사실 나로서는 내가 데리고 사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공식적인 결혼은 다른 문제지.'

이대로 남궁혜를 데려가겠다고 말을 해버리면, 나는 남궁혜와 조촐하게나마 혼례를 올려야할 거고, 대외적인 내 아내는 남궁혜가 된다.

그럼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차라리 성노예나 다름없이 집구석에 처박아둔다면 모를까, 나는 장기적으로 세력을 키워서 내 밀프 하렘을 온 무림이 인정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예외라고 해봐야 아직도 아버지와 금슬이 좋은 어머니뿐.

하지만 남궁혜와 혼인을 해버리면 오히려 남궁혜보다도 먼저 나와 관계를 가져왔던 여자들이 나중에 끼어든 군식구처럼 비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남궁혜는 대외적으로 내 아내로서 인정받는데 본인들만 몰래 숨어산다는 박탈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소. 분명, 내 동생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했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오."

하지만 남궁학의 몸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는, 내 대답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의 시위로 보였다.

남궁혜는 애초에 왜 이런 웃기는 소리가 나오게 내버려둔 거지? 내가 자기 엄마 임신시킨 몹쓸놈이라는 것 정도는 알잖아?

내가 수작을 부렸다는 남궁학의 주장을 분명히 부정은 하고 있는데, 어째 맥아리가 없는 것이 내가 들어도 별로 귀담아들을 생각이 안 들었다.

나는 슬쩍 언소영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 역시도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나와 아들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는지 상황에 손을 쓰지를 못하고 있었다.

'하, 나름대로 호감도 관리 빡세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내게 호감을 품고 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의 남궁학은 마치 생사대적을 보는 것마냥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손에 검이 없어서 그렇지, 저기 벽에 걸린 검이 손에 있었다면 나를 겨누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 된다. 어쩌면 다들 이해해줄지도 모르긴 해도, 내가 독단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몸이 좋지 않아 소협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듯 싶소. 그러고보니 최근 수련도 그리 꾸준히 하지 못한 듯 싶은데, 혹 소협이 날 도와줄 수 있겠소?"

말을 바꾸지 않을 거면 나랑 한 판 붙자?

사실상 비무신청이나 다름없는 말에, 남궁혜와 언소영이 벌떡 일어났다.

"오, 오라버니!"

"학아, 너무 성급한 것은 아니니?"

"어머니께서 그리 불러주시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요."

남궁학은 동문서답과 함께 언소영에게 활짝 웃어보인 다음, 허공섭물로 벽에 걸린 검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나를 압박해오던 기세가 두 배는 매섭고 예리해졌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정도면 남궁혜와 이미 실컷 떡친 사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대로 황보준이 남궁혜를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남궁혜는 내가 책임져야한다.

만약 여기 남겨뒀다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남궁혜의 배가 불러오는 꼴을 보고 남궁세가가 뒤집어질테니까.

황보준은 내가 대외적으로 미혼이니까 자기가 물러나면 내가 당연히 책임질 줄 알았나본데... 이 상황 어떻게 할 거냐고.

새어나오는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펄럭이기 시작하는 남궁학의 옷자락이, 나는 어쩐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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