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16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았습니다 (3)
나조차도 어지럽다.
솔직히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황보준의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그럴 수조차 없었다.
[거절해요.]
내 귀에 남궁혜의 전음이 울렸다. 남궁혜는 우는 표정 반 화난 표정 반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안 되지만 당신은 더욱 안 돼요.]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보 소협, 저로서는 못 들은 일로 하고 싶습니다만..."
"당황하는 것은 이해하오. 나 스스로도 입을 떼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니."
황보준은 후 하고 숨을 내뱉더니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허나 남성이 불구가 되었다면, 다른 방도가 없지 않겠소?"
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황보준의 하체에 시선을 주는 것을 참아냈다.
고자라니, 고자라니!
애초부터 고자였으면 혼례식 따위 열릴 이유가 없고, 아마 이번에 입은 부상의 후유증인듯 했다.
"후회는 하지 않소. 만약 그 때 내가 막지 않았더라면 부인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이니."
황보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할 것이다, 라고 아무리 말한들 전혀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본인이 고자가 되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내게 돌아오는 것은 이상하다.
차라리 본인의 형제에게 말해보는 것이 그나마 앞뒤가 맞을텐데...?
"...어째서 저를 찾으신 겁니까?"
"이유는 두 가지요. 첫째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혼인을 무효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것."
이미 남궁세가의 의원에게 보였기 때문에 그가 언제까지 감춰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아기가 생긴다면, 그게 설령 누구의 아이가 되었든 간에 혼인이 무효로 돌아갈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진다.
"이기적인 결정이지. 하지만 난 부인을 놓치고 싶지 않소."
"상공..."
남궁혜와 잠시 애틋한 시선을 교환한 황보준은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두번째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게 한다면 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여야한다고 생각했소."
뭐?
나와 남궁혜는 순간적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고, 남궁혜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나도 비슷한 꼴이었겠지.
"내가 알기로 소협만큼 부인이 허물없이 대하는 사내는 없었소. 어쩌면 서로 단순한 친분 이상의 관계였는지도 모르지만..."
아니야, 정말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야.
"상공, 그게 아니라..."
"굳이 이제 와서 부정할 필요는 없소. 지금 당신의 남편은 강 소협이 아니라 나 아니오? 부인의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오."
어디서 이상한 확신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남궁혜가 썸타는 사이였다고 굳게 믿는 표정이었다.
"내 못나게도 속으로 질투를 하기도 하였으나... 소협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천운이 아닌가 싶소."
"황보 소협, 정말 저는 남궁 소저와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내 완강한 부정에도 황보준은 내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강 소협, 혜매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이 남아있다면 부디 이 황보 모의 청을 들어주시오. 내 무릎을 꿇으라면 꿇으리다. 이 못난 자의 욕심으로 한 여인이 불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미쳐버리겠네.
남궁혜는 여전히 거절하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봐도 괜찮겠습니까?"
"강 소협!"
"급하게 결정할 일도 아니겠지. 충분히 이야기 나누고... 결정해주시오."
황보준이라고 왜 아무 생각이 없겠나. 침통한 표정의 그를 별 감흥없이 볼 수 있을만큼 내 멘탈은 강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무슨 생각이죠? 설마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겠죠?"
"당연한 소리를 왜 묻습니까?"
내가 날카로운 태도로 되묻자 남궁혜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어째서... 나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거에요?"
"당연히 거절은 하더라도,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애초에 남궁혜랑 떡친다는걸 알면 언소영이 노발대발할 것이 틀림없다. 초장부터 막혀있는 루트를 뚫는답시고 아둥바둥할 이유가 없었다.
"황보 소협에게 아이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장손도 아니잖습니까. 두 사람 다 아이 없는 생활을 납득하고 있다면 같이 잘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그건..."
남궁혜의 대답에 나는 이마를 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구요?"
"네..."
남궁혜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가 재수없게 결혼식을 치르고 초야에 들어가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고자가 될 가능성까지 생각하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남궁혜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황보준이 저렇게 궁지에 몰릴 일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 제가 거절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가능성은..."
말을 맺기도 전에 남궁혜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황보준은 분명히 착하고 좋은 놈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이고보니 그 착한 품성이 역으로 일을 꼬이게 만들고 있었다.
남궁혜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황보준 마음 속에는 계속 불편한 감정이 남겠지.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남궁 소저."
"이젠 혼인했어요."
"...세세한 걸로 따지지 맙시다. 그래, 황보 부인, 남편을 설득할 수 있겠어요?"
나는 이런 호칭의 변화가 사실 약간 꼴릿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얘가 유부녀가 되든 미망인이 되든 간에 언소영의 딸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런 갓김치 같은 미숙성 처녀 밀프 따위에 넘어갈만큼 밀프가 부족하진 않다!
"당장 제가 거절하고는 싶지만, 뒷감당이 안 된다면 급하게 거절하는 것도 상책은 아닙니다. 이해하죠?"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설득하죠?"
"그야 저도 모르죠."
황보준이랑 같은 공간에 있던 시간을 합쳐봐야 24시간도 안 되는 나보다야, 혼인 준비하면서 알콩달콩한 남궁혜가 더 잘 아는 것이 정상이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지만 막막할 것 같기는 하다. 남궁혜는 단순히 내가 싫다고 험담을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뿌렸던 아기 떡밥을 지워버려야하는 것이다.
솔직히 강호에 망신당하면서 이혼하는게 차라리 더 쉬울 것 같은데.
'하지만 황보준은 갈라서는건 원하지 않으니까 골치네.'
남궁혜는 그런 황보준의 의사를 무시할 수가 없다.
"일단 시간은 최대한 끌어봐요."
"알겠어요..."
최대한 황보세가로 가는 일정은 늦추는 것으로 하고, 나와 남궁혜는 어떻게든 황보준을 설득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황보준 역시도 일단 내가 고민해본다는 말에 수긍해주었다. 한편으로는 당장 떡치지 않는다고 하니까 안도하는 것도 같은데, 안도할 거면 시키지 말라고.
아무리 남편이 허락했다고 해도 내게 있어서는 리스크밖에 없는 짓이었다.
당장 남궁학을 잘 구슬려서 언소영을 데려가야하는데 제 동생이랑 떡쳤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해봐라.
'나라도 모가지부터 치려고 덤빌 것 같은데.'
어쩌면 언소영을 데리고 간 다음에도 도로 데려간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아, 왜 내가 이런 고민을 해야되는 거지?
빨리 일 정리되고 언소영 데리고 가서 집에서 마음대로 떡치고 싶다!
"노사,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황두명은 자신의 앞에 마주 앉은 남자, 이번에 남궁세가 습격을 책임졌던 흑호라 불리는 사내의 눈길을 받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무슨 말이오?"
"호령께서는 분명 남궁혜만을 잡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사께서 호령의 뜻이라고 하며 제게 다른 지시를 내리셨죠."
"흐음, 다른 지시라? 내가 말이오?"
쾅
"노사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남궁세가주의 어미를 적당히 손봐주라고! 그 계집의 무공이..."
"허어, 진정하시오. 내 그런 기억은 없소만, 차근차근 짚어봅시다. 남궁세가주의 어미라면 언소영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럼 누가 더 있겠습니까!"
흑호는 씨근대며 말했다. 분명 자신의 주인인 호령이 호랑이 가면 너머로 '그런 지시는 내린 적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노인이 호령의 명이라며 그를 속인 탓에 호령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돌아와야했다.
"이해할 수가 없구려. 언소영을 죽인다면 모를까, 적당히 손을 봐주라는 지시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흑호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상대가 끝까지 잡아뗀다면, 달리 목격자도 물증도 없는 그로서는 뭐라고 더 할 말이 없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몸을 돌렸다.
"흐음, 모를 일이로군..."
황두명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 떠나가는 흑호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표정은 진실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예의도 차릴만큼 차렸겠다, 대부분의 하객들은 남궁세가를 떠나갔다.
그리고 늦게까지 남은 두 명의 삼봉은 이젠 혼인하여 더이상 삼봉이라 불릴 수 없게 된 남궁혜에게 덕담을 건네주는 중이었다.
"행복하게 살아요. 아, 나도 혼인하고 싶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래요. 무덤에서는 어차피 나올 수 없으니까 잘 살아요."
순순히 기뻐해도 되는지 약간 애매한 덕담을 남궁혜가 어색하게 웃어넘기는 동안, 매소향과 단유란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향, 나중에 또 봐요.]
[...그렇게 자주 볼 생각은 없어.]
매소향은 살짝 거리를 두고 서있는 사내의 전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결국 여기 있는 동안 실컷 휘둘린 탓에 사내에 대한 감정은 제법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퉁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래도, 아쉬우면... 알죠?]
[몰라. 알긴 뭘 알아?]
질척대는 사내의 태도가 실은 썩 싫지는 않았지만 사내가 기가 사는 모습은 보기 싫었던 매소향은 결국 그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궁세가를 떠났다.
그렇게 손님들을 보내고 난 남궁혜는 슬쩍 황보준을 곁눈질했다.
이미 황보준이 상상도 못한 제안을 한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날이 갈수록 핼쑥해지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새신랑이 밤마다 고생이 많다'라는 식으로 놀리고는 했다.
황보준은 그것을 애써 웃어넘겼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슬퍼했다.
<부인, 미안하오, 미안해...>
자신은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위로조차 해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배려받는 것을 황보준이 더욱 힘들어했기 때문에.
아이는 굳이 절실하지 않다는 태도를 적당히 보여주려 애를 써보았지만, 황보준은 그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위로로 받아들이고 아파했다.
다행히 강윤은 신의를 지켜주고 있었지만, 남궁혜는 갈수록 무너져가는 황보준의 모습이 자신을 조금씩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답답한 일은 당사자를 제외하고 이 일에 대해서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에게라도 말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남궁혜가 평생토록 의지해온 어머니는, 적어도 이 문제에 한해서 절대로 의지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변모한 상태였다.
엉켜버린 실뭉치처럼 해답이 없는 이 상황을, 남궁혜는 어떻게 빠져나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