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08 어디 받아봐라 (1)
언소영은 피곤했다.
"남궁 소저께서는 예전의 대부인을 그대로 닮으셨더군요. 참으로 아름다우셨습니다. 신랑 역시 헌앙하니, 이 어찌 선남선녀의 결합이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세가에 자리한 그녀에게 기름칠을 하려는 인사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이미 안주인의 자리에서 물러난 그녀였지만 가주의 어머니라는 위치는 가벼운 입김 한 번으로도 많은 이들의 이권을 좌우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예전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음에도,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느긋한 세월을 1년 정도 보낸 탓인지 피곤하기 이를데 없었다.
"찾아주어서 고맙습니다. 혼례식에는 꼭 참석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굽실대던 사내가 물러나고, 언소영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를 괴롭히는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같은 담장 안에 낭군이 있는데도 찾아갈 수 없다는 답답함은 의외로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던 것이다.
모처럼 세가로 돌아온 어머니를 각별하게 모시라고 아랫사람들에게 지시한 가주의 효심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언소영은 제 어린 남편을 사랑했지만 단 하나, 그의 절조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좋아할만한 여인들이 몇이나 이 세가에 모여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때마다 언소영은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한 명 정도 더 늘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어머니, 계세요?]
"들어오너라."
언소영이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남궁혜가 직접 다기를 챙겨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세가로 돌아오니, 이것만은 좋다고 생각하며 언소영은 남궁혜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명문 무가의 여인들에게는 절실하지 않은 재주지만, 딸은 가사 전반에 대한 관심이 많아 솜씨가 좋은 편이었다.
"황차가 시원하니 맛이 좋구나. 작년에는 이 맛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야."
"필요하시면 준비해서 보낼까요?"
남궁혜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언소영은 살짝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 남궁혜가 혼례를 마치고 황보세가로 떠나면, 언소영은 이제 장원을 정리하고 사천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당연히 보내줘봐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말해줘야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던 상황.
"혜아야."
"네, 어머니."
"어미가..."
남궁혜는 아무것도 모르고 언소영의 말이 이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어미가, 그 때는... 여기에, 없을 것 같구나."
여기, 라는 것이 남궁세가가 아닌 안휘성을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남궁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 군요..."
어머니가 굳이 이 곳을 떠날 이유라고 해봐야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새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어머니를 홀로 이 곳에 남겨둔 사내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남궁혜는, 이번에는 허전한 감정과 사내에 대한 원망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머니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건데... 난 대체 왜...'
혈마의 제자라는 그 악적의 입술이 얄밉게 말려올라가는 것을 상상한 남궁혜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학이에게도... 조만간 이야기할 생각이란다."
"오, 오라버니께요?"
오라비인 남궁학이 어째서 직접 강윤을 만나보았는지는 짐작했다. 아마 강윤과 자신이 서로 연심이라도 품고 있었나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오해가 지금은 어떻게 진행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고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을터.
그런 상황에서 남궁학에게 이런 진실을 알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염려할 것은 없단다. 우선 네 혼례가 끝난 다음, 기회를 봐서 말할 수도 있고... 당장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방법도 있으니까..."
언소영이 그렇게 달래고 나서야 남궁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결국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내와 어머니가 밤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 외면해왔지만 진작부터 알고있던 진실.
"우리 딸... 어미와는 이제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만, 부디 행복하렴."
황보세가의 근거지인 산동이 안휘와 지척인데 비해, 사천은 훨씬 멀리 있는 변방이었다.
그만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될 어머니의 애틋한 인사가, 남궁혜의 가슴을 아릿하게 후볐다.
남궁혜와 황보준의 혼례식은 당연하지만 성대하게 치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런 거대세가의 가솔들조차, 혼례 준비의 마무리와 접객으로 눈돌아가게 바쁠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 했다.
"오오..."
그리고 혼례식이 열리기 3일 전인 오늘은, 하객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일전에 구룡쟁패에서 만났다는 남궁창의 안내를 받아(사실 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청년층이 모인 자리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능 소저, 혹시 시문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뇨."
"혹시 황산의 절경을 보신 적은..."
"화산의 절경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군요."
어째서인지 내 옆에 자리를 잡은 능휘연은 옆에서 계속해서 질문공세를 벌여오는 남자들을 칼같이 잘라내고 있는데, 그 모양이 볼만했다.
진절머리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는 태도를 물씬 풍기고 있는데도,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보려 펼치는 공세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으면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철가장의 장자라는 땀내나게 생긴 남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대강 정리된듯 능휘연은 다시 젓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다.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달리 잘 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능휘연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죠?"
그냥 은근슬쩍 눈을 피하려는데 능휘연이 물어왔다.
"소저가 드시는 모습을 보면 숙수가 참 보람을 느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너 참 잘 먹어서 그런다, 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자 능휘연은 잠시 무기질적인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네."
"...그렇군요."
싱겁게 납득해버린 능휘연은 다시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나도 굳이 능휘연과 말을 길게 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음식들 위주로 열심히 음식을 먹어치웠다.
내 머릿속에는 지금은 우선 든든하게 배를 채워두고 나중에 매소향을 상대로 이 에너지를 쏟아부을 생각뿐이었다.
'앗, 큰일났다.'
능휘연이 매소향의 딸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나니, 딸 옆에서 어머니를 따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지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뷔페식이 아니고 지나가는 시비들에게 음식을 부탁하면 가져다주니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때,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를 비웠고, 그 자리에 웬 여자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강 소협."
"...안녕하십니까?"
꽤나 미인이었는데, 어쩐지 약간 여우상의 여자였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 연령대로 보나 뭘로 보나 전혀 밀프답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린듯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인사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나 알아요?"
"...죄송합니다, 사실 잘..."
"모르는구나... 푸흐흐..."
보통 이런 자존감 넘쳐보이는 사람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하면 기분 나쁠만도 한데, 여자는 능휘연 쪽을 건너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난 무당의 견예진이에요. 혹시 견용진이라고 몰라요? 우리 오라버니인데."
"아!"
어머니와 탁란임신섹스할 수 있도록 술고래 팽월의 마수에서 나를 지켜준 무당파 견용진 열사를 내가 잊을 리가 없지!
"반갑습니다. 견 대협께는 지난 구룡쟁패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일단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도란도란 대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특별히 밀프가 아니라면 관심이 없는 변태 새끼이기는 하지만 나도 사람이라 예쁜 여자랑 적당히 대화를 나누는 것을 꺼리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단지 힐끔힐끔 능휘연 쪽을 바라보는 것이 묘하게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견예진과의 대화는 전체적으로 즐거웠다.
"아, 남궁 소저다. 우린 저 쪽으로 인사 좀 하러 다녀올게요."
"그러시죠. 잘 다녀오십시오."
견예진의 말에 능휘연이 따라 일어났고, 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잡담을 나눈 덕분에 발기가 조금은 느슨해졌으니까, 이제 음식에 집중하다보면 완전히 가라앉겠지?
남들이 먹는 음식을 곁눈질하며 또 뭘 부탁해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무심코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왜 니가 여기 있어?'
애써 표정을 다잡고는 있지만 눈만 봐도 사람 하나 찢어죽일 것 같은 원한이 서린 얼굴.
아마도 제갈세가의 문제아가 분명한, 제갈룡이 맞은편에서 이글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앗, 뜨거.
제갈룡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 천한 놈을 징치하려 했건만, 아버지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던 것만 해도 열불이 치밀던 참이었다.
'구룡? 그까짓게 뭐라고!'
구룡이란 이름이 강호 제일의 신랑감들의 모임이라고 하지만, 결국 무공이 강한 자들을 순서대로 아홉 뽑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런 어느 말뼈다귀인지도 모를 자와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명문 후기지수들과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까짓 놈을 사이에 두고 삼봉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에, 제갈룡은 질투심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앉아만 있었다면 모르되, 꽤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던가.
당장 노성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멀리서 아버지가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제갈룡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다시 보는군, 강 소협."
"예, 다시 뵙는군요, 제갈 소협."
돼지고기를 씹어삼키고 대답하는 태도는 공손하지도 않지만 불손하지도 않았건만, 제갈룡의 눈에는 한없이 건방지게 보였다.
"어제는 내가... 미, 미안하게 되었네."
"...별 일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마음두지 마시지요."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지만, 제갈룡은 자신의 사과가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갈룡은 참아넘기고 그가 원하던 다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술이 없군. 술은 하지 않는가?"
"아, 딱히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쩌다보니 먹지 않고 있었군요."
"안 될 일이지. 세상에는 모름지기 음식과 맞는 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내 앞에서, 시비에게서 빈 잔을 하나 건네받은 제갈룡은 거기에 술을 따라 채웠다.
"여기 이 백청주가 괜찮을 것일세. 한 번 마셔보게나."
제갈룡은 눈을 악독하게 빛내며 술잔을 밀어냈다. 그 역시 무가의 자손답게 날아가는 술잔은 내력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똑바로 세워진채 마치 빙판을 내달리듯 허공으로 주욱 밀려가고 있었다.
'어디 받아봐라!'
단순하게 밀려나가는 것 같은 술잔에는 상당한 역도와 다섯가지의 변화를 실었다.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술잔을 받아내지 못하고 옷과 얼굴에 술을 흘려 망신을 당하는 것을 상상한 제갈룡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