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204화 (204/383)

밀푸색마 EP.204 안 들키면 되죠 (1)

다음날.

매소향을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따먹은 나는 개운한 아랫도리에 만족감을 느끼며 일어났다.

너무 인정사정없이 해버린 탓에, 씻을 때조차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매소향은 결국 정보고 나발이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야했다.

'역시 등선공을 쓰기는 어려울까?'

항문만 쓰고 있을 때는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지였지만, 앞구멍도 쓸 수 있게 된 이상 등선공을 사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등선공은 본질이 색공이고, 나에 대한 적의를 아득바득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매소향에게는 쓰기가 조금 꺼려지는게 문제였다.

재수없으면 인간영약처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수도 있는 문제고.

"모르겠다,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자지를 뽑자마자 반응이 오는 것을 보면 스택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제 극적인 인식변화를 이끌어낼 계기가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매소향을 만나봐야겠다. 처소는 위치도 모르거니와 직접 가는 것도 모양이 이상할 것 같고.

아무래도 구파일방 사람들은 향암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어슬렁대는 것 같으니, 나는 그 쪽을 향해 가려고 처소를 나섰다.

"오, 강 소협. 편히 주무셨소?"

"황보 소협. 신경써주신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세상 반가운 표정의 황보준과 마주쳤다.

"고마울 일도 아니오. 나는 그저 말을 전했을 뿐이고, 남궁 가주께서 허락해주신 일이지."

"말을 전해주시지 않았으면 남궁 가주께서도 모르고 넘어가시지 않았겠습니까? 여전히 감사해도 될 것 같군요."

"하하, 말이 그리 되오?"

황보준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세가 분들과는 인사 나누셨소? 어제는 구파 분들과만 담소를 나눈 듯한데...?"

"아, 아직입니다만..."

한 번은 얼굴을 비춰야할 일이었다. 당장 매소향이 엮여서 잠시 의식 구석으로 치워져있었을 뿐.

"혹시 같이 가겠소? 본가의 어른들께 소개라도 드리고 싶구려. 다른 세가에도, 필요하다면 소개해드리지."

"...호의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보세가의 어른들이라. 거기에 갑자기 황보효선이 떡하니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행히 황보효선은 없고, 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만나서 반갑네, 황보무일세."

"황보세가의 가주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림 말학 강윤이라고 합니다."

"이미 느껴지는 기도가 상당한데, 자네가 말학이라면 검을 꺾어야할 자가 본가에 수두룩할 것이니 말학 운운은 그만두게나."

닮았다. 소림에서 만났던 검성과 확실히 닮았다. 검성보다 조금 몸이 왜소한 감은 있지만 거의 판박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의 시선에서는 뭐랄까, 위기감을 느낄 수가 없다.

언제 어느 방향에서 미친개처럼 물어올지 모른다는, 검성 조손이 주는 특유의 느낌이 없다.

좋게 말하면 상식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식을 뛰어넘는 직감을 물려받지 못한 걸지도.

나는 황보 가주 앞에서 겸양섞인 인사와 혼인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다음, 다른 사람을 찾아 인사하러 돌아다녔다.

팽가에서는 누군지 모를 아저씨가 왔고, 당가에서도 외총각 부각주라는 사람이 왔기 때문에 패스.

오대세가에 속하지 않는 몇몇 세가들도 와있었는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도중이었다.

"너, 너!"

요란한 고함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지도 모를 젊은 남자가 내게 삿대질을 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실례지만, 귀하가 누구신지 모르겠군요. 혹시 만난 적이 있었습니까?"

"네놈이, 네놈이 날 모른단 말이냐!"

엄청난 원한이 있는 것처럼 길길이 날뛰는데, 나는 지금까지 밀프 관련 문제를 제외하면 죄 한 번 지은 적 없는 몸이다.

"내 분명히 어제 네놈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거늘!"

"어제요?"

어제라고 하면 정말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제 혹시 나의 또다른 인격이 새로운 밀프를 개척했나?

"네놈이 어제 내 앞에서 길을 막지 않았더냐!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능휘연은 넋이 나간 것 같이 앉아있는 어머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넋나간 표정을 짓는 어머니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주변에 무관심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기 일쑤인 능휘연이라고 해도, 어머니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휘연아."

그 때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능휘연은, 이제 막 도착한 듯한 복장의 유봉(柔鳳) 견예진과 그 어머니인 무당의 단유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진 언니...?"

매소향이 단유란을 따르는 덕에, 두 사람의 딸인 견예진과 능휘연 역시 어려서부터 친분이 있었다.

사실 능휘연은 사교적인 성품의 단유란 모녀를 어려워했지만, 어머니는 반가워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 사람을 기쁘게 맞이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기준이었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안 보였겠지만.

"어서 오세요. 도착이 많이 늦으셨네요?"

"나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어머니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얘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니?"

화산파가 있는 섬서보다야 무당파가 있는 호북이 훨씬 이 안휘에 가까웠기 때문에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상세한 문제까지는 관심이 없었던 능휘연은, 단유란이 다가가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안심할 뿐이었다.

"휘연이 너, 안 올 줄 알았는데 왔다?"

"실은 안 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강제로..."

"대체 왜 그러니? 그냥 즐기면 되지, 무슨 문제야?"

능휘연이 남자들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고 피한다면, 견예진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즐기는 쪽이었다.

"언니는 몰라도 난 불편해."

"너 그러다 혼인도 못하고 노처녀로 늙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좋은 남자는 빨리 빨리 잡아야된다고 어머니께서 그러셨어."

그런 것치고는 견예진도 사내들의 관심을 즐기기만 할 뿐, 막상 누군가와 진지하게 혼인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했다가는 귀찮은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능휘연은 견예진이 조잘거리는 것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남자들의 관심을 받아들이고 선별을 해야지. 그 중에서 가장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너 자신이나 문파를 위해 도움이 될 사람을 고르는게..."

혼인을 꼭 해야되는지가 능휘연은 근본적으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도 굳이 말해봐야 득될 일이 없다는 것은 진작에 학습했다.

"혹시 너한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남자라도 찾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제대로 된 남자는 아닐..."

[네놈이, 네놈이 나를 모른단 말이냐!]

자기도 사내와는 일절 연이 없는 주제에 남자란 어떤 존재인가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견예진의 목소리를 뚫고, 요란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남궁세가에서 이런 소란을 피울 정도라면..."

능휘연은 말을 흐렸지만 견예진은 바로 알아들었다.

오대세가의 한 축인 남궁세가에서 이런 소란이라니, 어지간한 원한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일 것이었다.

"가보자."

두 사람은 그대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가벼운 경공까지 동원해가며 이동했다.

내 앞에서 고함을 바락바락 질러대는 남자의 이름은 제갈세가의 제갈룡이라고 했다.

나는 모처럼 신선한 기분으로 그의 논리를 듣고 있었다.

하나. 네까짓 무명소졸이 감히 제갈세가의 가주와 공자가 탄 마차를 가로막았으니 그 죄가 깊다.

둘. 자비심 깊은 본 공자는 그 죄를 묻지 않고 길을 비켜주기만 하면 눈을 감아줄 생각이었다.

셋. 하지만 너는 길을 순순히 비키기는커녕 먼저 문을 지나 남궁세가로 들어갔으니 이것이 제갈세가 전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고 무엇이냐.

'신선할 지경인데?'

내가 겪은 무림인들은 대체로 상식인들이었다.

혈마의 제자라는 걸 들키면 끝장인 검성 조손은 일단 제외한다고 치자.

하지만 가장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시비를 걸던 경현동조차도 내가 영호경 앞에서 그렇게 딜을 박지 않았으면 비무 신청은 안 했을 거다.

하지만 길을 막는다고 이놈저놈 제갈세가에 대한 도전 운운하는 미친놈을 보고 있자니 무림은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싶었다.

"그 자리에서는 제갈세가의 가주께서도 동석하고 계셨다구요?"

"그렇다! 네놈은 감히 제갈세가의 얼굴에..."

"그럼 가주께서도 공자의 판단에 동의하고 계십니까?"

따오기 울음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귀를 울리던 목소리가 뚝 끊기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다, 그냥 이놈이 미친놈인 거구나. 제갈세가주까지 병신이었으면 어머니께 가주직 찬탈을 권해볼 셈이었다.

"허, 허나 네놈의 행동이 불손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놈, 당장 사죄하지 못하겠느냐!"

"집단 전체에 대한 도전인가 아닌가 여부를 판단할 가장 적법한 권한은 그 수장에게 있다고 봅니다.

분명 가주께서 동석하고 계셨다면 제갈세가 전체에 대한 도전인지 모를리가 없으셨을텐데, 그걸 아랫사람인 공자께서 함부로 날조한 것은 불손하지 않은 일이란 말입니까?"

"...이, 이름을 말해라! 네놈의 사부가 누구인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제갈세가주께 사죄하십시오. 그 전에는 타인의 불손함을 논할 자격이 없는 공자의 말씀을 듣지 않겠습니다."

"네, 네까짓 놈이 감히, 감히...! 어디서 제갈세가의 행사에 함부로 말을 보태는 것이냐! 외인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말이다!"

"완전히 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어느새 주변에는 꽤나 사람이 모여있었고, 어떤 중년인이 조용히 옆에 다가서 있었다.

옆에 선 황보준이 잽싸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올렸고, 나는 얼굴을 보고 짐작한 그의 정체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갈 가주를 뵙습니다."

"아, 오랜만이군. 새신랑 앞에서 못난 아들놈이 이런 꼴을 보여 내 면목이 없네. 언제 한 번 본가를 찾아주게나. 후하게 대접할테니."

어딘가 어머니를 닮은 이지적인 얼굴의 주인은 역시 제갈세가주, 제갈명이었다.

제갈명은 제갈룡을 잠시 노려보더니 내게 몸을 돌렸다.

"강 소협은 분명 령이와 의모자 관계를 맺었다고 들었네. 맞는가?"

"예, 가주. 과분합니다만..."

"전혀 과분하지 않네. 오히려 소협 같은 아들을 두어 령이도 꽤나 든든할테지..."

내 얼굴에 가볍게 금칠을 해준 제갈명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아들놈이 자네에게 실례를 했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자네가 친자였다면 룡이와는 사촌 관계가 되지 않는가?"

우리가 남이가를 시전하는 제갈명에게, 나는 굳이 망신까지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작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일로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겠지요."

"아버님! 이런 자에게...!"

하지만 제갈룡은 아버지에게 단단히 망신을 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완전히 외인은 아니니 뭐니 해도 결국 외부인인 내가 가주의 뜻에 순순히 따르는데, 정작 그 아들이 정면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바보인가?'

"네 이놈! 어서 처소로 돌아가 근신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말을 걸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감정이 제어되고 있던 제갈명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져나왔고, 제갈룡은 결국 쭈구리가 되고 말았다.

제갈명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덕분에, 딱 신선한 유형의 인물을 만났다는 선에서 끝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제갈룡이 그렇게 제갈명에게 끌려가며 사라지자, 구경하듯 몰려있던 사람들은 곧 흥미를 잃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응?'

그렇게 흩어지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멍하니 지켜다보는 능휘연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해서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렸다.

종리세가와 사마세가에서 온 사람들에게만 인사하고, 다시 매소향을 찾아서 정보를 건네주는 겸 미션을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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