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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푸색마-200화 (200/383)

밀푸색마 EP.200 오랜만에 뵙습니다 (2)

"어머니,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래, 걱정 말고 나가보거라."

매소향은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능휘연의 말에 대강 대꾸하며 손짓해서 그녀를 내보냈다.

능휘연의 성격상 어머니가 없으면 좋다고 어딘가 남들이 찾기 힘든 곳에 몰래 틀어박혀 있을테지만 매소향은 그런 것까지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그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니, 왜? 남궁세가와 친분이 있었나?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같이 구룡쟁패에 출전했던 남궁창과 대화 한 마디 나누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남궁세가에서 전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잘 챙겨준 덕분에 매소향은 제법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무너져버린 것이다.

'아니지, 아니야.'

생각해보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원래 그 자를 찾을 생각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매소향이 알아내지 못한 뭔가를, 그 자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자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굉장히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육체가 반응했다.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쾌락에 지배당하던, 오롯이 떠오르는 그 기억은 차라리 공포였다.

'대체, 왜! 그놈을 왜!'

굳이 분류하자면 오대세가에 친화적인 그 자를 곽청라가 왜 데려왔는지 원망스러웠다.

매소향은 숨을 고르며 격해진 감정을 다스렸다.

"후우우우..."

하지만 결국 매소향의 선택은 정해져있었다. 구룡쟁패가 끝난 이후, 강윤이 말했던대로 아들의 내력이 성장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름철 햇빛을 받는 작물처럼 부쩍부쩍 실력이 늘어야할 20대 초반, 이미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들의 무공은 지지부진했다.

이대로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가는 이 귀중한 시기를 놓치고 고만고만한 수준의 고수가 될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평생 그 상태, 일류 상급에 답보하는 상태로 남을지도 모를 일.

'그래, 어차피 그놈이라고 별 것 있겠어?'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신경쓰느라 본격적인 조사는 못했지만, 매소향이 여지껏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잘해야 어머니인 제갈미령이나 스승인 팽연화의 도움을 받는 정도 이외에는 아무 힘도 없는 애송이가 마교의 정보를 그리 쉽게 알아낼 리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쓸만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확인해보는 선에서 충분할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게으름뱅이 소는, 무를 우걱우걱 먹어버린 겁니다."

"허어, 그럼 그 게으름뱅이는 죽었겠군?"

"그런데, 무를 먹고 나니 소가죽과 쇠머리 탈이 벗겨지면서 게으름뱅이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소가 된 게으름뱅이 이야기를 들으며 곽청라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백리묘양도 옆에서 두 손을 꼭 쥐고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돌아온 게으름뱅이는 지난날을 뉘우치며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백리묘양은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겨우 이야기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긴장해서 들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주로 사람과 새로 알게되면 신변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곤 하지만 나는 사실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나고 자란 곳은 대한민국, 사문은 색천문, 사부는 혈마. 이래서야 뭐 말할게 있어야지?

어릴 적부터 산 속에서 자랐고 이름도 모르는 사부가 죽은 이후 무공을 홀로 갈고 닦았으며 작년에 하산했다고 말해주자 화제가 똑 떨어져버렸다.

결국 내 선택은 적당히 생각나는 옛날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었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자, 그럼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언제부터 그런 재담꾼이 되었나요?"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본 다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남궁 소저."

"...정말로 와있었군요?"

남궁혜는 떫은 감이라도 씹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얼굴 전체가 '초대한다고 정말로 오냐?'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찾아뵙겠다고 답신이 갔을텐데요?"

"그랬죠. 그저,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새침한 태도로 내 존재가 불편함을 역설하는 남궁혜를, 옆에 있던 사람 좋아보이는 남자가 멈칫거리며 불렀다.

"혜매, 이 분은...?"

"아, 황보 가가..."

아무래도 이 남자가, 남궁혜의 결혼 상대인 모양이었다.

"이, 이쪽은 손룡 강윤 소협이에요."

"아, 그렇소? 만나게 되어 반갑소, 강 소협. 황보준이라고 하오."

"강윤입니다. 혼인 축하드립니다."

황보준은 서글서글한 외모의 훈남이었다. 언소영한테 듣기로는 검술도 제법이라서 거의 절정에 가까운 경지라고 들었다.

나보다 몇 살 많다는데, 절정에 가까운 정도면 대단한 실력이라고 할만하다. 나? 나는 천하제일무공을 익히고 있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줘야지.

"혜매와는 꽤나 친밀한 사이 같구려? 지금까지 혜매가 이렇게 대하는 상대가 없었던 것 같은데..."

"남궁 소저는 그냥 제가..."

"마, 맞아요! 일전에 안면을 익히고 보니 성격이 잘 맞아서... 그렇죠, 강 소협?"

남궁혜는 아무래도 예비 남편 앞에서 남을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친한 사이인 걸로 하자' 라는 신호를 눈으로 보내왔다.

"남궁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강호행 도중에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죠."

나는 황보준이 괜히 오해하지 않도록 친구라는 말을 또박또박 발음해서 말해주었다.

"혜매에게 친구라면, 내게도 친구요. 부디 혼례를 마칠 때까지 편안하게 지내길 바라겠소."

하지만 황보준은 그런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듯, 내 손을 굳게 잡고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꼬추 놈이랑 손을 잡는 것은 사실 별로 반가운 일이 아니었지만, 말에 진심이 담겨있어서 그런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황보 소협. 부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소."

황보준은 그제야 굳게 잡았던 손을 놓아주며 남궁혜와 함께 총총 떠나갔다.

[고마워요.]

남궁혜는 떠나가면서 나한테 슬쩍 전음을 보냈는데, 아까까지 찬바람 쌩쌩 휘날리던 기세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남궁혜가 내게 날을 세우지 않은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황보준의 호의는 바로 그 날 저녁 나타났다.

나는 원래 일반 손님을 위한 방을 배정받았지만, 특별히 나를 위한 처소를 따로 마련해준 것이었다.

자기랑 결혼할 여자의 남사친이라니, 굳이 신경써줄 정도의 상대가 아닌데도 그렇게 해준 것이다.

'속이 좋은 건지, 그만큼 남궁혜가 좋아서 그런 건지.'

원래 방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시대 건물의 조악한 방음에 무림인의 예민한 감각이 더해지니 사람이 많아 불편했던 것도 사실.

나는 황보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한 가지 더 편해진 일이 있었다.

달이 휘영청 떠있는 밤, 나는 내 방에 몰래 숨어들어오는 여자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다시 보네요, 이제는 조금 괜찮아졌나요?"

"..."

매소향은 말없이 본인이 들어온 창문을 탁 닫아버렸다.

방을 옮길 때, 매소향은 전음으로 오늘밤 내게 찾아오겠노라고 말했다.

어떻게 내가 있는 방을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올 마음을 품었다니 나로서는 기꺼울 따름.

"...남궁세가와 친분이 꽤 있는 모양이지? 처소까지 따로 내어주고."

"글쎄요? 저는 주는대로 받았을 뿐이라서."

내 대답에 매소향은 한동안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탁 쉬었다.

"괜한 소리는 그만두겠어. 너도 바보가 아니라면 알겠지? 내가 용건도 없이 널 찾아오겠다고 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정말 이럴 거야? 약속했잖아! 내 아들을 도울 방법을 같이 찾아주기로!"

하긴 했었지. 질싸 당해서 엉엉 울고 난리가 났던 이 여자를 달래주기 위한 당근으로.

그런데 이건 잊어버렸나?

"분명히 제가 맨입으로 도와드린다고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요?"

"으윽...!"

"게다가, 아드님 문제도 아직 해결이 안 됐는데 저한테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도 되는 거에요?"

아무래도 매소향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소향이 능풍연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상, 매소향에게는 엄연히 목줄이 걸려있는 상태인데 말이야.

"약속이고 뭐고 전부 취소하고, 아무 수확도 없이 여기서 실컷 따먹히고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면 아예 이참에 그냥 다 밝혀버릴까요?"

성혈단의 약효가 여전히 남아있는 이상, 나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능풍연의 인생에 주홍글씨를 새겨줄 수 있다.

마단을 먹은 이상 정파인들에게서 온갖 의심에 시달리겠지. 본인은 속은 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의심은 계속 남을 거다.

거기다 내 무공 실력이 늘어난 이상 매소향은 독한 마음을 먹고 날 죽이려고 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 서슬퍼런 위협에, 매소향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뭐라고 웅얼대기 시작했다.

"...어요..."

"네?"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아서 되묻자, 매소향은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했어요... 그러지 말아요... 흐윽..."

그리고 기어코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데, 이게 양심의 가책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개새끼는 나다. 영호경이 먹인 성혈단을 이용해서 밀프 따먹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얼른 매소향에게 다가서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쩌면 내가 눈물에 약하다고 파악한 매소향의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해두기도 뭣하고.

"그만 울어요. 일단 알아낸 건 알려줄테니까..."

"흑... 히끅..."

매소향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훌쩍거리더니, 진정된듯 울음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 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보를 주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아까 일을 불문에 붙인다고 치더라도, 나는 결코 공짜로 정보를 줄 생각은 없었다.

"말해봐요. 내가 맨입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던가요?"

"...아니..."

"그럼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기억 안..."

"거짓말."

매소향의 토끼처럼 빨개진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역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 안 하면 정말 국물도 없어요."

내 말에 매소향은 눈을 질끈 감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혀, 협조적으로..."

"네, 그 다음."

"협조적으로... 보, 보지... 대주면... 히끅!"

내가 어깨에 손을 얹자마자, 매소향은 딸꾹질을 하며 놀랐다.

정말 미안하다. 이렇게까지 몰아세운게 정말로 미안하지만, 여기까지 제 발로 온 이상 나는 굽혀줄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선택해요. 그 조건을 들어주고 도움을 받을 건지, 아니면 그냥 돌아갈 건지."

결혼식에 축하하러 온 거니까 어차피 이런 짓은 안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소향이 전자를 택하기를 원하는 걸 보면 정말 나란 새끼는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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