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99 오랜만에 뵙습니다 (1)
뭔가 뒤에서 난리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딱히 나랑은 상관없겠지?
내가 문 안쪽으로 들어오자 남궁세가의 방계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얼른 다가와서 나를 안내했다.
구룡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후기지수 클래스인 나를 상대로는 이 정도 안내인이 적절한가.
"이쪽 방을 사용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남자는 나를 안내해주고 다시 어딘가로 가버렸다. 아마도 다음 사람을 안내해주기 위해서 다시 입구 쪽에서 대기하러 가는 거겠지.
남궁세가가 내게 내어준 방은 정말 말 그대로 방이었다. 아파트마냥 여러 사람의 방이 한 건물에 모여있는 방.
여기에 어떤 고수가 올지는 몰라도, 당가의 객관에서처럼 몰래 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쉽지 않아보였다.
'물론 결혼식 축하하러 와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실 신부 어머니를 따먹는다는 심정으로 몰래 언소영과 섹스하면 엄청 꼴릴 것 같지만 아마도 남궁혜가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어떻게든 숨어서 하면 못할 일은 아니지만 한 명이 주시하고 있다면 들킬 위험성이 너무 높다.
'아니, 물론 안 할 거지만.'
나는 우선 가볍게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주변을 터벅터벅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꼭 만나야한다고 어머니가 지정해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후광이 있으니, 그걸 이용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두는 것이 향후 강호생활에 유리할 것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조언이었다.
"어머, 어머, 어머! 소협을 여기서 다 보네!"
적당히 큰 건물들을 기준으로 어슬렁대고 있었더니,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약간 작은 키에, 동그란 눈과 장난기 어린 입매를 가진 여자.
"오랜만에 뵙습니다, 곽 여협."
옆에 조용히 선 꺽다리 남동생과는 달리, 반갑게 인사해오는 그 여자는 점창의 곽청라였다.
"오랜만이야, 그간 잘 지냈는가?"
"예, 곽 여협. 곽 소협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얘는 이름이... 뭐더라? 꼬추 녀석에게 할애할 뇌는 없는데다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도 거의 없어서 나는 곽청라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간신히 이 녀석의 이름이 곽도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여기로 온 것인가? 꽤나 촉박하게 왔군?"
"예, 어쩌다보니 초대장을 늦게 확인하게 되서..."
혼례식은 닷새 뒤. 꽤나 빠듯하게 도착했기 때문인가, 이미 먼저 도착한 사람들끼리는 어느 정도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눈 모양이었다.
애초에 중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시간에 도착해올 손님들을 받는 시간을 여유있게 잡아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했다.
"마침 잘 되었네. 안 그래도 여기서 안면을 튼 사람들과 자리를 가질 예정이었는데, 소협도 같이 가세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소협은 내 생명의 은인이니, 이 정도는 보답한 축에도 들지 않네."
곽청라는 내 팔을 자연스럽게 잡더니 나를 끌고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도흥이 나를 연민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니, 이 녀석도 터울이 있는 누나에게 엄청나게 휘둘리고 사는 모양이었다.
뭐, 나야 편하고 좋지. 나는 못 이기는척 곽청라의 뒤를 따라서 걸어갔다.
종남파의 백리묘양은 이 자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화산의 매소향이 남궁세가로 올 것은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딸인 능휘연은 삼봉이었고, 삼봉이 결혼할 경우 다른 삼봉이 찾아와서 혼례를 축하해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왜 하필 나야...'
하지만 보낼만한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는 장문인의 말에 백리묘양은 결국 남궁세가로 걸음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산과 종남산은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다가, 두 문파 모두가 이름난 검파였다.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는가 하는 자존심 싸움과 이권다툼이 끊일 날이 없었고, 같은 구파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있긴 하지만 견원지간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하필 종남 제일의 여자 후기지수였던 백리묘양이 이름값을 높이고 있을 때, 화산에서는 매소향이라는 걸출한 여인이 나타난 것이 백리묘양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왜 매소향보다 잘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매소향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고 있다니, 너도 분광검법 정도는...>
<네가 바로 종남의 자존심이다, 묘양아!>
음으로 양으로 매소향과 끊임없이 비교를 당해온 백리묘양은 젊었을 때는 매화문양만 봐도 속이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무난히 그녀에게 돌아올 것으로 생각되었던 삼봉의 자리까지도, 팽가의 팽연화가 채간 이후로 백리묘양은 매소향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싫었다.
"묘양, 이거 먹어봐요. 달고 맛있어요."
"고, 고마워요, 소향..."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과를 권해오는 매소향에게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자괴감까지 더해지니, 백리묘양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백리묘양은 알 리가 없었다. 매소향이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다정다감해지는 성격이라는 것을.
만약 매소향이 제갈미령과 팽연화에게 품은 시기심과, 두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태도, 심지어 그 두 사람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남자에게 품었던 경쟁의식까지 알았다면 백리묘양의 속도 조금은 편안해졌으리라.
"아, 제가 제일 늦었나요?"
그 때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활기찬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어서 와요, 곽 여협. 오늘은 남궁 부인이 특별히 신경써서 다과를 챙겨서 그런지 맛이 유독..."
반갑게 곽청라를 맞이하던 매소향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그리고 고개를 든 백리묘양은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아름다운 매소향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구파 출신 투성이였다. 완전히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파와 오대세가 사이에는 묘하게 서로를 경계하듯 대하는 풍조가 있었다.
오대세가인 남궁세가와 황보세가가 혼인하는 곳에 와서 이러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싶기는 하지만,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니 넘어가자.
나는 곽청라의 도움으로 한 명 한 명 소개를 받으며 사람들과 안면을 익혔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 미인 밀프의 이름과 얼굴, 출신문파를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넣었다.
언제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곤륜... 용비연... 공동... 성도림...'
"소림에서 오신 분도 한 분 계신데... 이 자리에는 안 계시는군."
"소림에서요?"
문득 나는 작년에 꼬셔보려다 너무 피폐해보이는 모습 때문에 결국 손끝 하나 대지 못했던 소림의 여승, 호연이 생각났다.
소림은 원래 여승이 없다고 하니까 여승이라고 하면 그 사람일텐데...
그 사람이 혹시 여승이냐고 물어보려던 그 때, 곽청라가 마지막 사람에게 나를 안내했다.
"이쪽은 종남의 백리묘양 여협이시네. 그리고 이쪽은... 자네도 잘 알겠군."
나는 포권지례로 정중하게 인사하며 순둥순둥하게 생긴 백리묘양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둔 다음에서야, 마지막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매 여협. 그리고 능 소저."
"오, 오랜만일세. 그간, 잘 지냈는가?"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고 마는 딸 능휘연에 비해, 매소향은 동공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예, 매 여협께서도 건강해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괜찮으세요, 매 여협?"
새하얗게 질린 매소향의 얼굴이 전혀 건강해보이지 않았는지 곽청라가 매소향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매소향은 손사래를 치고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집어들었다. 달달 떨리는 손 때문인지 잔에서 차가 넘칠락말락 흔들렸다.
자기 딴에는 안색을 추스리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곽청라의 얼굴에서 걱정하는 빛이 더욱 깊어지는 결과만 나왔다.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지금까지 여자들 중에 대놓고 협박 강간을 한 것은 언소영, 매소향, 채수란 세 사람이었다.
언소영과 채수란은 결과적으로 화간이 되었으니까 심리적인 후유증도 없었는데, 나를 보고 이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래도 가서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매 여협. 그리고 아무래도 의원을 찾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비에게 손짓해서 의원에게 안내해줄 것을 부탁했고, 희미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능휘연이 매소향을 부축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일단 매소향한테 접근하는 건 상황을 봐야될 것 같다. 계속 저런 식이면 아무리 나라도 더 밀어붙이기는 미안하니까.
어차피 아들인 능풍연의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쉬우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나는 방에 두고 온 짐 속에 들어있을 성혈단의 해약을 떠올리며 백리묘양과 곽청라, 곽도흥과 함께 자리에 둘러앉아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남궁혜는 언소영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즉시 황보준을 대동하고 어머니의 처소를 찾았다.
본래 어머니가 세가에 있던 시절 사용하던 처소는 이미 새로운 안주인인 종리소소에게 양보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가주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처소로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어머니!"
"혜아 왔구나. 그리고 우리 사위."
남궁혜와 황보준의 인사를 받으며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언소영의 모습에, 남궁혜는 직감했다.
이미 어머니가 강윤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강윤도 이미 도착했거나 곧 도착할 것이었다.
"장모님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식을 올리기 전에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심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사위에게까지 걱정을 끼친 것 같네."
선량하고 꼼꼼한 인상의 황보준의 말에 답해준 언소영은, 곧 사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내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흘이나, 닷새나, 엿새나 어차피 큰 차이도 없을테니.
'여, 역시...'
어쩐지 어머니의 광채가 나는 것 같은 환한 얼굴이, 어린 남편과 만나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남궁혜의 얼굴에 열기가 슬슬 올라왔다.
"...매? 혜매?"
"네, 네? 황보 가가?"
하룻밤 내내 강제로 보게 된 음란한 광경을 떠올리고 있던 남궁혜는 예비 남편의 티없이 깨끗한 눈을 보고 질겁을 했다.
"혜아 네가 사위에게 혼인하면 바로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지?"
"황보 가가..."
남궁혜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자 황보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혼례를 치르기 전인데, 자칫 문란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장모 상대로 꺼내다니.
"왜 그러니?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 아이를 가지는 일은 나쁜 것이 아니란다."
"...미안하오, 혜매."
황보준이 보기에 어머니가 짓는 미소는 그저 인자한 미소로 보이겠지만, 남궁혜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견이를 돌보면서 자신도 얼른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고 놀리는 것이다.
그 묘하게 불편한 느낌에, 남궁혜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