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78화 (178/383)

밀푸색마 EP.178 여기서 증명해요 (1)

"사, 살려주십시오. 이장로... 제발..."

"아마 지금은 자네 아버지가 이장로가 아닐까 싶네. 내가 교를 떠나왔으니, 서열이 바뀌었을 것 아닌가?"

아무 상관없는 문제였다. 여기서 눈앞의 노인에게 밉보이면 무조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마치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이장로의 모습은, 지금껏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사내, 경현동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입을 열었다.

"무,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뭐라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장, 아니, 황 대협...!"

"너무 그리 겁먹을 것 없네. 내가 궁금한 건 자네가 내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들고 왔었다는 내용인데 말이야..."

그랬다. 애초에 경현동이 이장로를 찾아간 것은, 혹시나 아내의 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면 어딘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내의 상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그 혈마의 제자.

상대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손을 쓸 자신도 없거니와 잘못했다간 자신만 망신당하고 끝일 것이었기 때문에 이장로, 아니 황두명의 지혜를 구하러 왔던 것이었다.

"알려드리면, 저, 저는..."

"허어, 내 언제 자네의 목숨을 취한다는 말을 한마디라도 했던가? 내 수하들이 자네에게 손을 좀 거칠게 써서 겁을 많이 먹은게로군."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빙긋 웃었지만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눈이었다.

"염려말게. 자네는 죽일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야. 차라리 살려두는 편이 가치가 있지. 이제 답이 되었는가?"

끔찍한 폭언을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었지만 경현동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욱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

경현동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사실과, 그 상대가 혈마의 제자, 강윤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지금은 딱히 쓸모가 있는 사실 같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황두명은 경현동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재미있는 사실이로군. 어쩌면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그렇습니까...?"

"자네는 당분간 이 친구와 동행하게 될걸세. 뭐, 주먹은 제법 쓰는 친구니까 염려할 것은 없고. 이귀(二鬼), 잘 부탁하네."

"염려마십시오, 대인!"

"화, 황 대협, 잠깐..."

경현동이 붙잡는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수하인 사귀(四鬼) 가운데 이귀 한 사람만을 남긴 황두명은 경현동이 갇힌 방을 나왔다.

명교 외부 지단의 일부 인물들을 포섭해둔 황두명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숨어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를 곁에서 수행하던 도객, 일귀의 질문에 황두명은 되물었다.

"그 자는 계속 살려두게. 살려두다보면 어딘가 쓸데가 생길지도 모르지."

"예, 경가 그 자는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대인, 제가 여쭈고 싶은 것은..."

"아, 강윤 말인가?"

일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가 혈마라지만, 명교 총단에서 늙은 계집을 범하고 다니는 미친 놈일줄은 몰랐지. 아마 정파에 그놈과 관련이 있는 계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일세."

"예, 그래서 그 사실을 지금 강호무림에 퍼뜨린다면 하다못해 그 자에겐 좋은 복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일귀."

"예, 대인."

황두명은 멈춰서서 일귀를 마주 보았다.

"그 자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나?"

"무슨...?"

"내가 장담하지. 그 자는 틀림없이, 최소한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갈 것일세. 어쩌면 강호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빠르게."

오랜 무림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의 삼존처럼 강한 자들은 없다시피 했다.

나이가 어려 삼존 가운데 말석일 것으로 추측되는 명교 교주 신마조차도 다른 시대였다면 무리없이 천하제일로 꼽힐 정도의 고수일 것으로 세인들은 떠들고 있었으니까.

그런 자들 중에서 수좌인 혈마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제자가 된 자.

고작 반 년을 조금 넘는 세월동안 절정의 벽을 깨뜨린 자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편이, 훨씬 아프지. 그렇지 않겠나?"

"아..."

황두명은 납득하는 일귀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는, 다시 앞을 보며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초절정에 오른 그 순간, 무림 전체의 적이 되도록 만들어주마.'

명교, 아니 마교가 유일하게 그에게 약속해준 단 하나가 결국 강윤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알게 해줄 셈이었다.

게다가 잘만 사용하면, 그를 불씨삼아 무림 전체를 활활 불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음습한 기대에 노인은 몰래 환희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소교주께서..."

"조, 조만간 찾을 생각이었다네. 정말, 숨기려던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이해해주면 좋겠군."

지난밤, 별 생각없이 채수란을 찾았다가 냄새로 꼬리를 밟힌 나는, 결국 사실대로 실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지만 멍한 표정의 그녀에게 나는 내일 영호경과 다시 함께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고, 그것이 지금.

영호경도 미안하다고 느꼈는지 저자세를 유지했고, 나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물론 꼴리는 밀프만 보면 자지를 세우는 인간인 건 채수란도 납득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듣자하니 내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던 것을 알고 내 걱정을 하고 있던 모양인데, 또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으니 섭섭할 것이 뻔했다.

"두 분 다, 너무 사과하지 마세요... 조금 놀라서 그런 것뿐이니까."

채수란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생기가 쭉 빠져나갔던 것 같은 모습 때문에 걱정했지만, 계속 사과해주니 받아들인 듯했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오셨는데, 다과도 준비를 안 했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렇게 말을 남긴 채수란이 나가고, 긴장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나는 그제서야 숨을 확 내쉬었다.

"하아..."

어제는 정말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많이 걱정했지만, 오늘은 그래도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려준 것 같지 않은가.

"다 그대 잘못이야. 반성하게."

정말이지 그 말 그대로였다. 영호경은 채수란의 존재조차 모른채 끼어든 셈이 되었으니 얼마나 뜬금없고 민망하겠는가.

나는 더더욱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는 참... 삭막하군."

한편 영호경은 채수란의 방을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나도 처음 왔을 때 그렇게 생각을 했다.

꽤나 정갈한 방인데다 필요해보이는 건 다 있지만 개인의 취향이랄까,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방인 것이다.

물론 방에 그런 요소를 굳이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채수란의 경우에는 남편만 챙기느라 그런 것을 신경쓰지 못한...

"음?"

의문을 품은 내 목소리에 영호경이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그냥 손을 흔들어주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영호경은 경현동이 아내로 눈독 들이던 사람이다. 삼장로의 아들이자 명가의 자손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영호경을 노렸다고 들었다.

하지만 결국 영호경과는 맺어지지 못했고 대신 맞이한 채수란을 꽤나 함부로 대했다는 모양이던데...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과연 경현동이 채수란을 영호경과 비교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잘 끝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방을 빠져나온 채수란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본 영호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자신보다 나이는 상당히 위였지만 무공의 차이 때문에 나이를 먹어갈 자신과 비교해, 영호경은 오래도록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것이었다.

남편처럼, 사내의 마음도 서서히 영호경에게 기울어가는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내의 성격상 남편처럼 심한 대우를 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소홀해질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어... 소교주께서는, 다 가지고 계신걸... 그러니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눈이 붉어졌다가는 당장 그에게 들킬 것이 틀림없었다.

감정을 죽이고, 자신의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흘깃거리는 시비에게서, 쟁반을 받아든 다음 방 안으로 기별을 넣고 들어간다.

'웃자, 조금만 더 웃자.'

지금 받은 충격도 흐려질 것이었다. 일단 지금만 넘기면, 갈수록 능숙하게 아픔을 숨길 수 있으리라.

다시 들어가보니, 사내가 일어선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서있어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나 혼란스러웠지만, 사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그녀에게서 쟁반을 빼앗아 탁자에 내려놓았다.

"왜, 왜 그래요?"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쥐고 입을 열었다.

"저는 여자가 많아요. 대체로 남들한테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여자가."

"...들었어요."

"저는 그 사람들을 다 사랑해요. 그리고 수란 당신도."

"그것도 들었어요. 갑자기 왜... 꺄앗!"

사내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옷을 잡고 확 벌리자, 채수란은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이래요? 저기 소교주께서 보고계신데..."

"괜한 짓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당신이 나중에 나한테 엄청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해야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내는 아까부터 자신이 할 말만 계속해서 주워섬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옷을 벗기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을 최대한 오랫동안 기분좋게 해줄 거라고 약속할게요."

"저, 정말 무슨 소리에요..."

채수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사내가 하는 말이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고 있었다.

"다른 누구랑도 비교하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이니까. 따먹고 싶어서 협박해야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니까. 내 아기 임신해주기로 했잖아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고백이, 육체관계를 맺고 싶다는 욕망 말고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말이 채수란의 마음을 울렸다.

"그러니까, 벗어요. 지금 당장. 당신 남편이 죽고 못 살던 여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내 자지 기분좋게 해주는 야한 암컷이란 사실을 여기서 증명해요."

"서방님..."

최악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어지럽히던 불안감을 확실하게 지워없애줄 단 하나뿐인 말이기도 했다.

채수란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 어? 이거, 이게 아닌가? 수란? 괜찮아요?"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정신나간 소릴 듣는다고 좋아할 여인이 어디 있느냐고... 응?"

얼빠진 목소리로 당황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내에게 소교주는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지만, 곧 눈물에 젖은 채수란의 얼굴에서 입꼬리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있었다. 그런 정신나간 소리에, 마음의 안정을 얻은 여인이 여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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