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74화 (174/383)

밀푸색마 EP.174 대체 정체가 뭐지? (1)

나는 영호경의 처소의 빈 방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장로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영호경의 치료를 끝내고, 정신이 들자마자 영호경을 꼬드겨서 떡을 쳐대다보니 현 상황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깨어난 시점에선 이미 일이 벌어진지 이틀이나 지났었고, 오늘로 사흘째라는 것도 지금 알았을 정도니.

"이장로는 결국 놓쳤다는 말이군요..."

"아쉽지만. 당장은 허튼 짓을 못하게 막아놓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네."

표정이 전혀 아쉬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영호경이 살짝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나는 영호경과 마주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진 아침상을 비워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이장로를 놓쳤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나는 이장로를 잡는 것에 있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사부도 있고, 사부보다는 좀 떨어진다지만 동급 고수인 교주, 신마도 있었으니까, 어차피 잡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장로가, 사부 눈을 피해서 도망을 친다고?'

차라리 여기가 인구가 엄청나게 많은 지역이라 숨을 곳이 많다면 모를까, 바깥에 나가면 사막과 황무지만 가득한 곳에서?

사부가 전설상의 신법인 능공허도를 자유자재로 쓴다는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아예 잡는 거에 관심이 없었을 수는 있겠네.

"그대가 말한대로, 장로들에게 자네 생각을 소개할 자리는 준비해두었네."

"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나,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절대 안 되네, 절대로."

"아뇨, 그 쪽이 아니고..."

"아, 그 쪽인가... 물론이네. 그대의 말대로만 된다면, 굳이 부딪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안 돼도 마찬가집니다. 그 때는 제가 다른 방법을 어떻게든 생각해볼테니까, 아시겠죠?"

영호경은 자기 사람에게는 자비롭지만, 그 외에는 조금 가차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요구한 것은 두 가지, 첫째, 내가 제안을 내는 대신에 잘 되지 않더라도 당장 쳐들어가자는 생각으로 넘어가지는 말 것.

둘째는...

"아, 그리고 장로들과 만나기 전에, 잠시 아버지께서 보자고 하셨네."

"...무슨 일로요?"

부녀간인데도 계속 교주라고 부르길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신선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과, 알려줘야할 소식이 있다고 하시더군. 나도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네."

알려줘야할 소식? 그런 의리가 있는 사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내게 있어서 교주는 오히려 채수란이랑 처음 떡쳤던 일을 들킨 탓에 묘하게 불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영호경도 잘 모른다고 하니, 일단 얼굴을 보기는 해야할 것 같다.

"그럼 이제 식사도 끝났고 하니, 지금쯤 가보는게 좋겠죠? 아, 근데 사부님께 아침 문안을 가봐야할 것 같은데."

"바로 오라고 하셨네. 아마 거기에 혈마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흐읏..."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영호경의 옆에 서자, 그녀는 나를 살짝 밀어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안 보는데요?"

내가 영호경에게 내걸었던 조건 두 개 중에 또 하나.

"언제 들어와서 누가 볼지도 모르니까... 좀 참게, 응?"

내가 원할 경우, 영호경은 언제든지 내게 자신의 몸을 허락할 것.

솔직히 이런 조건은 영호경이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해주는 부분에 그 꼴림 요소가 있는건데, 막상 써보니 이 착정 음마가 좋아할 일이 되어버렸다.

'나도 조건을 받아주는척 임신섹스를 해버렸으니 비긴 건가?'

나는 영호경의 엉덩이를 더듬다가 손을 떼며, 살짝 아쉬워하는 그 표정을 보았다.

내가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아침 안개보다 희미한 죄책감은 덤이었다.

"예? 사부님이... 뭐라구요?"

교주는 혈마의 제자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고 다시 말해주었다.

"자네의 스승은 다른 일이 있다고 여길 떠났지. 이건 자네 앞으로 남긴 서신일세, 읽어보게."

봉투를 뜯어서 열어보는 사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본 교주는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자 입을 열었다.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적혀있는가?"

"아닙니다. 그보다, 일부러 이렇게 직접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교주는 사내의 감사에 가벼운 겸양으로 대답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단에서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그리고 사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입을 열었다.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훨씬 고맙지. 딸 가진 아비로서, 딸을 목숨 걸고 지켜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네."

교주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자기 앞가림은 하고도 남을만큼 나이를 먹은 딸이었지만, 그에게는 죽은 아내가 남기고 간 하나뿐인 보물이었다.

게다가 만약 이장로의 꿍꿍이대로 일이 풀렸더라면, 교주로서도 무익한 피를 흘리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내 지위가 있어 못하지만, 마음같아서는 자네에게 고개를 숙이고 고맙다고 하고 싶은 심정일세. 정말 고맙네, 고마워."

나이만 맞고, 여자관계가 깔끔했더라면 충분히 사위로 삼을만한데.

"귀교의 다른 누가 있었더라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앞으로 귀교와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하는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죠."

"그렇지만 이대로 말로만 넘기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일세. 자네에게 어떻게 보답할지는 고민이 좀 필요할 것 같지만, 기대해도 좋을걸세. 원하는게 있으면 자네 쪽에서 말해줘도 좋고."

"아, 그게... 감사합니다."

사내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대로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곧 장로들이 사내의 설명을 듣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부가 남긴 내용은 두 가지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마교 총단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과 내 무공을 보고 느낀 바와 그에 대한 설명 정도.

'이 인간이, 다 지켜보면서 발악하도록 그냥 내버려뒀다는 얘기네.'

속이 좀 뒤집혔지만 사부는 원하는게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인간이니까. 아마 죽거나 크게 다치지는 않는 선에서 지켜보고 있었겠지.

<어떻게 하면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 오히려 네게는 해가 될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네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대충 그런 일일줄 알았다. 안 가르쳐준다는 건 모르는게 내게 이득이라는 뜻일테니까.

<넌 기대 이상으로 성장해주었다. 너는 빠르게 성장하는 내력에 힘입어 본래 네가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실전을 경험했지.>

<그 과정에서 형성된, 신체의 반사적인 동작에 의존하는 네 무학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연(然)이 되겠구나. 본래 그러하다는 뜻의, 연.>

<하지만 그대로는 부족하다. 무의식중에 움직이는 동작에 의존해서야 정말 위급할 때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더욱 수련을...>

이하 블라블라블라.

요점은 돌아올 계획도 딱히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지만, 사부가 없어졌으니 나는 이 마교에서 더욱 조심해야하는 것이다.

한편 마교 교주가 내게 하겠다는 '보답'도 살짝 마음에 걸렸다.

암컷으로 각성한 영호경이 결과적으로 좋아하게 되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는 이미 영호경을 여기에 있는 동안 생체 오나홀로 쓴다는 보답을 받은 상태였다.

같은 사유로 또 보답을 받는 건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이미 따님한테 보지를 받았는데요? 라고 했다가는 사부랑 싸울 것을 각오하고 내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르지.'

결국 이 상황에서 내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영호경도 설마 아버지한테 나랑 떡치고 있다고 술술 이야기하지는...

<아, 아버지께, 허락을 받으면... 흐윽♥>

아, 안 되겠다. 믿음이 안 가. 이 설명이 끝나는대로 역시 입단속을 시켜야지.

'영호경은 내가 채수란이랑 떡쳤다는 사실까지는 모르니까.'

그냥 손주 생길 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얘기했다가는 교주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다.

"강 소협, 모두 모였네만... 이제 설명을 시작해주게."

일장로의 말을 듣고 나는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귀교가 시작할 사업에 관해서..."

일단 한 번 입을 털어보실까.

교주는 사내가 설명하는 개념에 매료되었다.

표국업을 퇴짜놓았다더니, 운송업을 한다고 해서 김이 샌 것도 잠시. 사내는 뛰어난 언변으로 시큰둥한 기색의 장로들을 설득해나갔다.

먼저, 명교의 자본으로 만들어진 상단을 바탕으로 물건을 업자가 아닌 최종 소비자, 즉 개인에게 판매한다는 발상이었다.

고수의 질도, 숫자도 무림 어느 문파보다 우월한 명교이기에 가능한 방법.

<운송이 복잡해져서 불어나는 비용은 어쩔 거요?>

삼장로의 질문에도 사내는 시전에서 판매하지 않는 물건도, 다소의 운송료를 지불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독보적 가치를 내세우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구매자 본인 확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교 산하의 전장의 전표와 연계한다는 방안, 지도나 구매자 개인의 주거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 등을 해소하기 위해 양수기를 설치해 그 곳을 회수장소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퐁퐁 튀어나왔다.

"이상, 또 뭔가 질문 있으십니까?"

혈혈단신인 혈마의 제자라기에 무공만 죽어라 익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직을 운영하는데 쓸모있는 지식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대체 정체가 뭐지?'

웬만한 무림 세력에서도, 후계로 내정된 인물 정도가 아니면 저 정도의 지식을 익히고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지난번에 나섰을 때에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는 독특한 의견과 자신의 앞에서 사악한 마교 운운하는 배짱에 흥미를 가졌다면.

이번에는 제법 짜임새 있는 계획과 지식의 깊이를 드러내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

"자, 그럼 다들 질문은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질문을 하겠네. 자네가 계획에 쓸 수 있다는 양수기나 기타 다른 물건들에 관해서, 만드는 법은 알고 있다고 믿어도 되겠는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원리는 알고 있으니 몇 번 시도해보다보면 확실해질 겁니다."

"좋아, 그럼 장로들과 협의하에 진행해주게."

공짜로 부려먹는 것은 좋지만 공짜를 너무 좋아하다보면 체하기 마련이다.

사내에게는 수익 중에 일정비율을 떼어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겠지. 제 수익을 늘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사내를 응시하던 와중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가 아니다.'

사내가 본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교주는 별 생각없이 사내의 시선이 닿았을 자신의 오른쪽 뒤에 시립해서 선 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쩐지 딸의 시선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았다.

따스한 듯하면서, 날카롭기도 하고, 뭐라고 해야할지 교주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누군가에게서 저런 시선을 받았던 기억이 날듯말듯 했다.

하지만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기에, 교주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 생각을 기억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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