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68화 (168/383)

밀푸색마 EP.168 살아남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2)

나는 황보효선이 경악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이장로와 그 졸개들의 앞에서 대치했다.

"쥐새끼처럼 끝까지 숨어있을 것이지, 괜히 나와서 명을 재촉하는구나."

"곧 늙어죽을 사람이 젊은 사람한테 명 운운하는 건 좀 어떨지...!"

나는 말을 하면서 은밀하게 내력을 일으켜 현음지를 튕겨 날렸지만, 이장로는 우습게 내 지력을 해소해버리고는 바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말꼬리 잡기에 어울려주지 못하는 걸 용서하거라!"

"그렇게 젊은 사람이랑 어울려주질 못하니까 관짝 묻어줄 애새끼가 없지!"

오, 패드립 효과 좋고.

이장로의 눈꼬리가 확 치켜올라가며 단숨에 진한 마기가 뿜어져 나와 내 피부를 저릿거리게 했다.

"찢어죽여주마!"

"니 애새끼처럼?"

단박에 죽일 생각인듯 손바닥에 어마어마한 양의 내기가 집약되는 것이 느껴졌다.

강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거의 비슷한 효과가 나올 정도로 내기를 집약시키는 수법.

정면으로 부딪혔다가는 무조건 깨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방이 너무 좁다.

'좆같네.'

쉬이이익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고, 나는 최대한 회피에 전념했다.

한 방이라도 유효타가 나오면 치명상이다. 신법을 최대한 활용해서 피해야만 한다.

검은빛이 언뜻언뜻 비칠 정도로 짙은 녹색의 내기를 머금은 장영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중 나를 직접 노리는 장영은 열여섯개. 대부분이 머리나 가슴을 노리는 공격.

'어지간히 죽이고 싶은가보네.'

어그로가 잘 끌린 건 다행이었지만 허공에 흩뿌린 지풍 열 가닥으로 허초와 실초를 분간할 단서를 얻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장력을 장갑처럼 몇 겹이나 손에 겹쳐쌓아올린 다음, 똑같이 장영을 펼쳐가며 맞섰다.

물론 당해낼 방법은 전혀 없지만, 실초만이라도 어떻게든 가려내야... 젠장!

"으윽!"

허초를 지워나가던 와중에 가슴을 노려오는 실초를 막아내려던 나는, 옆구리를 스친 장력에 의해 속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타다다닥

이장로의 유사 강기에 실린 거력에 나는 그 자리에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야했다.

그나마 두 손을 움직여서 어떻게든 가슴만은 지켜냈지만, 손도 뻐근한 것이 몇 번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구시지화문이라,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라 하더니 정말로 그렇구나."

이장로는 의기양양하게 지껄였다. 계속 떠들게 두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닌지, 다시 진녹색으로 물든 손을 앞세워왔다.

"감히 내 딸을 모욕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실은 죽은게 딸인지 아들인지도 몰랐는데. 그걸 따질 틈도 없이 나는 전신의 내기를 북돋우며 맞서싸웠다.

옆구리를 스치며 스며들어온 마기가 기맥을 꼬챙이찌르듯 헤집어대는 와중에도, 저 빌어먹을 유사 강기를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영호경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뭐에 당한 건지, 지독한 마기를 피워내면서도 옴짝달싹 못한채 신음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곳은 상대가 전부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찌어찌 넓은 공간으로 나간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황보효선이 고달파진다.

공간이 좁은 것을 이용해서 저 넷을 활개치지 못하게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사방팔방에서 덤빌 수 있게 되면 황보효선은 금방 끝장난다.

'영호경까지 죽일 수도 있어.'

그렇게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완전봉쇄당한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했다.

기기묘묘하게 움직이는 장법이지만, 최종 목적지는 주로 내 머리나 가슴이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종종 허벅지나 어깨, 옆구리 등을 노리고 들어오지만 대체로 날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곳을 노려주는 덕분에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이놈이...!"

나는 웃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으로 치고 들어오는 유사 강기도, 내 내공에 휩쓸려도 체내에서 사라지지 않고 버티는 마기도 빠른 속도로 내 심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장로의 낭패한 목소리만큼은, 이런 몽롱한 정신상태로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존나 싫은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엿먹이는 걸로 시작된 더러운 인연.

그놈이 낭패한 목소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지칠대로 지친 몸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왔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 무공이, 지금껏 깨지 못했던 벽에 몇 번이고 부딪히며 조금씩 금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장로는 호흡이 가빠져오는 것을 느꼈다.

본래 이 수법은 오래 유지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 깨달음으로 일으켜야할 강기를, 과도한 양의 내력을 집중시켜 억지로 불러일으키는 이 수법을 선택한 것은 감히 딸을 모욕한 강윤을 빨리 죽이기 위함이었다.

'이놈은, 이놈은 괴물이란 말이냐!'

호흡이란 곧 내력. 호흡이 가빠져오니 내력이 이어지질 않았고, 억지로 자아낸 수강의 힘도 급격하게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이 자를 죽이는 길도 점점 요원해지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 자를 죽인 다음, 황보효선을 죽여 그녀가 소교주를 죽였다고 현장을 꾸며야만 하는데...!

"시간이... 없지?"

내부가 진탕이 되어 거무죽죽해진 얼굴로도 강윤은 입꼬리를 비죽 치켜올리며 약을 올렸다.

"개새끼가 주인집 딸을 물었으니... 주인이 오기 전에 얼른 옆집 개가 물었다고 속여야되는데 말이야...!"

"닥쳐라!"

일갈을 내뱉은 다음 집약된 내기를 흩어내고, 영활한 움직임으로 몰아붙이자 애송이는 단숨에 수세에 몰렸다.

애송이의 손끝에 서린 내력이 제법 예리하게 맥을 끊어내며 저항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는 그에게...!

'잠깐...'

맥을 끊어낸다?

이장로는 장력을 흩뿌려 강윤의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등허리에서 뽑아낸 단검을 역수로 쥐고 내리찍었다.

하지만 상대가 능란하게 보법을 밟아서 치명상을 피하는 것을 보며, 이장로는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죽여야해!'

절정고수였다.

눈앞의 애송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절정의 경지에 올라버린 것이다.

절정고수란, 자신만의 무학의 세계를 확립해낸 자를 일컫는 말.

무공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것만이 아닌, 자신만의 형태로 재해석하기 시작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이치고는 깊은 내력을 엉망진창으로 휘두를 줄 밖에 모르던 애송이가, 고작 반 년 남짓한 세월동안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이이익...!"

이장로는 다시 내력을 끌어올렸다. 호흡이 일정치 않아 아까보다 한참 부족했지만, 아무튼 내력이 다시 두 손가락 끝에 맺혀 강기의 형태를 빚었다.

이미 한 번 독아쌍교의 초식에서 살아남은 자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내고야 말리라.

검지와 중지가 곧게 펼쳐진채, 초식의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독니처럼 애송이를 향해 거리를 좁혀나갔다.

독아쌍교는 다양한 방향에서 찔러들어갈 수 있는 절초로, 상대의 의식을 돌리고 그 허점을 찔러 상대를 격살하는 묘용을 가진 초식이었다.

'이전과 같은 투로라고 방심하고 있을테지.'

이장로 자신과 맞서기 위함인가, 사내의 움직임은 어쩐지 이장로를 흉내낸 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마치 뱀처럼, 예리하고 영활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공격을 흘려내기 위해 슬쩍슬쩍 위치를 바꿔가며 모든 방위를 견제해왔다.

단, 뒤를 제외하고.

진기의 실로 이어진 강기덩어리가, 손끝을 벗어나 둥글게 돌며 소리없이 뒤통수를 노릴 때, 이미 그것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죽어라!'

강기 덩어리가 강윤의 뒤통수를 뚫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이장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슈왁

사내의 한쪽 발이 마치 사내와는 별개의 생물인 것처럼 움직여 수직으로 치고 올라가 강기를 잇고 있던 진기의 실을 끊어버리는 것에 이어 강기를 흘려내버린 것이다.

세갈래의 예리한 기운이 서린 그 각법에, 이장로는 잠시 시선을 빼앗긴채 우두커니 서있었다.

삐이이익

"장로!"

수하들의 외침에 정신이 든 이장로는 바깥에서 신호가 들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했다.

"가셔야합니다!"

일장로, 혹은 교주의 수하들이 여기로 출발했다는 신호. 그 때까지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면 달아나야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엉망이 된 손을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애송이, 강윤.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 이 자를 시간 내에 죽일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감정에 휩쓸려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그 각법... 이름이 뭔가?"

"...등룡보법 중의 용조각."

"하..."

과연 세갈래로 뿜어져나오는 예리한 기운은 용의 발톱이라고 부를만 했다.

"...뱀이 아니라 용이었군."

"강호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당신만 몰랐던거 아닐까?"

끝까지 깐죽대는 모습도, 일이 실패로 끝났다는 허탈함을 이겨낼 정도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저 둘만 죽이면, 분명 정파 놈들을 죽일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었거늘.

괴상한 미꾸라지에 정신이 팔려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했더니 그 미꾸라지가 용이라고 한다.

"물러난다. 살아서... 만나자."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만약 그에게 명교 이외의 끈이 없었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리가 없었다.

다시 시작할 것이었다. 새로운 둥지에서, 새롭게.

적어도 그 둥지에서는, 이 명교에서보다 더 빨리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네놈 역시... 반드시 죽여주마."

이장로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죽여보시던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정말 서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아마 그 상태에서 다시 붙었다간 몇 초식 못 견디고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여협, 괜찮아요...?"

내가 이장로와 싸우는 동안 황보효선 역시 네 명의 고수와 싸우느라 기진맥진해있었다.

여기저기 베이고 다친 곳이 보였지만, 치명상은 입지 않은 것 같다.

바닥에 검을 내팽개치며 주저앉는 황보효선보다는, 탁자 옆에 쓰러져있는 영호경이 더 걱정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어떻게든 넘어진 탁자 옆에 숨기는 숨은 모양인데, 시뻘개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니 상태는 여전하거나 더 악화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일은 더 없다.

"소교주!"

멀리서부터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노인, 일장로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손가락을 가리켜 영호경의 위치를 알려주었고, 일장로는 수하를 재촉해 의원을 데리고 왔다.

그 사이 잠시 운기요상을 하고 있던 내게, 일장로의 수하가 업고 나타난 의원의 진단은 이러했다.

"성혈단의 과다복용...?"

"그러합니다. 성혈단은 본디 한 알만 먹어야하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제기랄, 그러면 방법이 있겠지? 어서 토해내!"

날 죽이러 나타난 것치고는 꽤나 허허로운 노인처럼 행동하기에 마치 도인과도 같은 인상을 주던 일장로.

그런 일장로가 시정잡배 같은 말투로 의원을 재촉했지만 그 의원의 대답을 들은 나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해약이 있긴 합니다만, 최근에 이장로께서 필요한 곳이 있다고 하시면서 재고를 다 가져가셨습니다. 어차피 평소엔 쓸 일도 없는 것이라, 차차 재료를 구해 새로 만들 예정이었습니다만..."

그 이장로가 이 일을 꾸몄다고 알려주자, 의원은 사색이 되며 손사래를 쳤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절대, 절대 교의 녹을 먹으면서 감히 소교주께 해를 끼치는 짓은..."

"짐승먹이로 던져줘도 시원찮을 자식! 감히 소교주를...!"

한편 소교주에게 정신이 팔려 상황을 모르던 일장로도 이 자리에 없는 이장로에게 노성을 토해내는 와중에 나는 의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럼 해약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까?"

"이, 이론적으로는 한 가지 있습니다. 병자가 직접, 과도하게 불어나 몸을 해치는 마기를 통제해서 체외로 덜어내면 됩니다만..."

마기가 몸을 갉아먹는 고통이 너무 끔찍해서 불가능할 거라는 의원의 말에 일장로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의원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난 짚이는 방법이 있었다.

"일장로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한 가지 시험해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등선공과 마공의 충돌을 극복해내야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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