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67 살아남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1)
황보효선이 무림맹으로 돌아간단다.
당연히 내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상황에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영호경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대가 운신하기는 편해지겠군."
사실 영빈각의 끝에서 끝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쓴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뭔가 이렇게 틀어진 상태로 보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컸다.
"오늘 중에 교주께 인사를 올린 다음 내게도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하였으니, 염려말게."
"그렇습니까...?"
그래도 붙어있는 시간이 제법 길었던 모양인 것도 있고, 같은 여자라서 그런가 나름의 친분은 쌓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영호경은 제법 친근하게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보효선 쪽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런데 그대, 뭔가 피로해보이는군? 괜찮은가?"
"괘, 괜찮습니다."
아오, 썅. 티가 나나?
지금껏 밤새도록 섹스해도 나더러 피곤해보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지난밤 신나게 네토리 임신섹스를 즐긴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채수란을 재우고 처소로 돌아와보니 정말 답없는 상황이었다.
채수란의 말대로 경현동이 불륜섹스 얘길 퍼뜨리지 못한다고 해도, 뭐라고 말하면서 채수란을 데려가야할지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눈앞의 영호경, 얘는 아직도 내가 밀프 전문으로 따먹는 색마라는 것을 모른다.
"혹시 몸상태가 안 좋으면 말하게. 의원을 보내줄 것이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사부한테 싫은 티를 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색마라는 걸 들키지 않고 자지를 넣을 기회를 노려야될 것 같은데...
안 그러면 이렇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주는 것도 끝일지 모른다.
"지난번 그대가 제시했던 안건 말인데..."
아무래도 장로들이 신통한 의견을 내지 못했는지, 영호경은 다시 내게 뭔가 좋은 생각이 없느냐고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마교는 신강의 사막을 끼고 있는 곳에 근거지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자원으로는 중원에 밀린다.
결국 마교가 내세워야할 것은 인적자원의 비중이 커지는 업종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슬슬 내가 생각한 것의 보따리를 풀어볼까 하던 차에, 시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교주, 황보 여협께서 오셨습니다.]
뭐야, 벌써?
나는 놀라서 순간적으로 영호경과 마주 본 다음, 영호경이 눈짓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곁방의 문이 보였다.
교주전에 있는 소교주의 방과는 달리, 이쪽 처소에는 수발을 들 시비가 휴식을 취하기 위한 곁방이 있었던 것이다.
얼른 그 문 너머로 숨어들며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나니, 영호경이 입실을 허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떠난다고 했었죠? 교주께 인사는...]
내게 말할 때와 비교하면 봄바람이나 다름없이 훈훈한 목소리로 답해주는 황보효선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의를 다졌다.
중원에 돌아가도, 반드시 따먹어줄테니까 각오해라.
황보효선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으스스해지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죠?"
영호경의 의아한 물음에 황보효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아니에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을뿐... 착각이겠죠."
시비가 내어오는 차를 받아들고, 황보효선은 화제를 돌렸다.
"소교주의 배려 덕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부디 본교의 진심을 무림맹에 잘 전해주었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막연하게 마귀 소굴처럼 여기고 있던 마교 총단이지만, 눈앞의 영호경만큼은 정파의 여느 여협 못지않게 즐겁게 대할 수 있는 상대였다.
만약 그런 일만 없었어도 이번 마교행을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인데...
'염왕도...!'
아직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라 염왕도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자.
그조차도 본인의 별호가 아니었으니, 그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무공과...
'아니야, 아니야!'
그의 다리 사이에 달려있는 거대한 존재감을 떠올린 그녀는 머릿속의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결국 머릿속의 생각이 무럭무럭 부풀어올랐다.
양물의 크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남녀간의 마음일 뿐이고, 음적과의 방사 따위는 기억에 남길 가치조차 없다고 마음 속으로 되뇌이기를 여러 차례.
"정말, 괜찮은 건가요? 만약 길을 떠나기 곤란하다면 좀 더 쉬다 가도..."
"괘, 괜찮습니다."
낌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린 영호경의 질문에 황보효선은 지금껏 입을 안 댔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영호경 역시 찻잔을 들어올렸다.
"차를 즐기지 않아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맛이 참 깊군요. 이름이 뭔가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유감이지만 이건 제 취향이 아니라 시비가 알아서 골라온..."
영호경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의아한 표정의 황보효선이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영호경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어마어마한 압력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소, 소교주? 무슨 일인가요?"
마공을 익힌 초절정고수는 자신의 마기를 자유자재로 감출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영호경에게서 마기를 느끼지 못했던 황보효선이었지만, 지금은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마기의 느낌에 움츠러들었던 황보효선은, 영호경이 쓰러지는걸 보고서야 뭔가 사달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대체 무슨...! 아무도 없소?! 소교주께서 위급한 상황이오!"
황보효선도 무공의 고수로서 어느 정도 기혈과 인체에 대한 지식이 있었지만 결코 의원이 아닐뿐더러 마공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끄으윽...!"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마공이 폭주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초절정고수인 영호경이 신음성을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니 보통 상황은 아니었다.
"소교주, 금방 사람을 불러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아마도 이 정도의 기세라면 주변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금방 달려와줄 것이었다.
영호경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황보효선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곧 복도를 달려서 오는 노인과 사내 몇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여기! 서두르시오!"
황보효선은 그렇게 말을 맺었지만, 곧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문을 황급히 닫아버린 것이다.
노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들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이 났다.
'저 자들이 어째서 여기에...?'
아니, 왜 여기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하필 '지금' 이 자리에 있느냐였다.
황보효선은 짐과 함께 옆에 세워져있던 거검을 뽑아들었다. 얄팍한 연검과는 달리, 든든한 무게감이 전해지자 그녀의 가슴이 조금 차분해졌다.
쾅
일장에 문을 박살내버리고 안으로 들어선 노인의 뒤로, 며칠전 밤에 술래잡기를 벌였던 절정고수들이 따라들어왔다.
"감히, 정파의 개가 본교의 소교주께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노인의 비분강개한 외침에 황보효선은 대략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오해요! 나는 소교주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소!"
<명교에도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황보효선은 스스로의 결백을 외치면서도, 염왕도가 그녀에게 일러준 말을 떠올렸다.
분명 이들이 영호경을 이렇게 만든 흉수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죄를 황보효선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얄팍한 술책인 것이다.
영호경이나 염왕도와는 반대로, 정파와 사파의 다툼을 원하는 자들일 것이었다.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소교주께서 이토록 고통을 호소하신다는 말인가! 순순히 그 목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영호경은 분명 차를 마시고 이렇게 되었다. 틀림없이 차에 비밀이 있을터.
하지만 상대는 대화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듯, 황보효선을 향해 덤벼들었다.
'버틸 수 있을까?'
도움이 언제 올지, 황보효선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마기를 피워올리고 있는만큼, 다른 누군가가 교주에게 보고를 올리기는 하겠지만 언제쯤 당도할 수 있을까?
연검이 아닌, 거검을 쥐고 있는만큼 저 네 명의 절정고수들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노인, 역수로 단검 한 자루를 쥐고 있는 노인만큼은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보다도 훨씬 윗줄의 고수. 그가 참가한 합공이라면 황보효선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하압!"
먼저 네 사람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황보효선은 거검의 길이와 무게감을 적절히 이용해 싸움을 시작했다.
공간을 모조리 잠식해들어가는 무식한 검격. 마치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차갑고 투명한 빛을 따라 운행하는 검격은 그들의 공격에도 충분히 맞설 위력을 발휘했다.
'역시 할만해...'
다소 밀리는 감이 있기는 하지만, 내력을 급격하게 소모하며 펼치는 검초는 네 사람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문제는...
"계집의 실력이 제법이구나."
어차피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비분강개한 연기 따위는 집어치운듯 노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리며 끼어들었다.
날카롭고 쾌속한 지풍이 검초를 펼쳐 생긴 그녀의 빈틈을 속속 파고들었다.
호신지기를 전력으로 일으켰지만 애초에 호신지기 따위로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 아니었다.
단숨에 수세에 몰린 황보효선은, 노인의 장심에서 일어나는 장력이 자신의 옆을 휩쓸어오는 것을 깨닫고 곧 전신을 휩쓸 충격에 이를 악물고 버틸 준비를 했다.
쾅
하지만 황보효선은 굉음이 울렸음에도 예상하던 충격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선 검에 힘을 주어 철조를 휘둘러대는 고수를 밀쳐내고 나니 어느새 공격이 멈춘 상태였다.
"너... 이놈...!"
노인은 아까의 연기보다도 훨씬 실감나는 분노를 보여주며 짓씹듯 말했다.
그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하고 있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녀의 왼편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는 사실 역시도 깨달은 황보효선은 그녀의 뒤에 있는 인물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강윤...!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귀교는 원래 그게 기본입니까? 먼저 와있던 사람한테 왜 있냐고 타박하는게. 경 대협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던데?"
노인의 외침을 들은 황보효선은 고개를 돌리려던 움직임이 덜컥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지 않더라도, 뒤편의 사내가 옆에 나란히 서면서 황보효선은 그 얼굴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 여협, 하실 말씀이 많을 건 알겠는데, 일단 살아남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작년의 언제였던가.
자신의 앞에서 반드시 미래에는 천하제일이 되겠노라고 패기만만하게 외치던 청년.
염왕도라는 허울이 녹아내리고, 정파 후기지수의 아홉 용 가운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강, 마교 총단 한복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