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59화 (159/383)

밀푸색마 EP.159 도망치게! (1)

"평판 만들기...?"

"예, 아무래도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호경은 어째서인지 바깥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황보효선 덕분에 다시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이틀 연달아 찾아오는 강윤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지만.

"황보효선을 민가에 접근시키고 본교의 무사가 막아선다... 그 말은 자네 이미 그녀와 접촉한 모양이군?"

"예, 얼굴은 감췄습니다만."

역시 그런가.

영호경은 내심 혀를 찼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었는데, 역시 한동안은 정파에 몸담고 있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걸 통해서 황보효선이 본교에 품고 있는 적대감을 희석시킬 생각인가?"

"맞습니다. 그녀가 잘 전해준다면, 검성이 정파 무림을 진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겠죠."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지만, 해서 손해를 볼 일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영호경은 곧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네. 적당한 인선을 골라 근처에 배치시켜둘테니 염려말게."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인 남자와 한동안 대화를 나눈 영호경은, 문득 남자의 시선이 한쪽에 놓인 목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에 관심이 있나?"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나무상자가 꽤나... 잘 만들어진 것처럼 보여서."

주먹만한 크기의 목곽은 확실히 매끄럽게 마감되어있었다.

영호경이 목곽을 집어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청량한 향기를 뿜어내는 붉은 단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는 건 처음이겠지? 이게 바로 성혈단일세."

"아, 이게 그..."

성혈단은 맞지 않는 심법을 익힌 자들, 즉 정통 마공 이외의 심법을 익힌 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내력을 주는 대가로 잠재력을 서서히 깎아먹는 마단이었다.

영호경은 소림에서, 소극적인 도발의 일환으로 몇몇 정파 후기지수에게 이것이 흘러들어가도록 수작을 부린 전적이 있었다.

"비교적 생산하기 쉽고 효능도 뛰어나지만, 복용해도 뒤탈이 없을만큼 정통 마공을 익힌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 옥의 티지."

"만약 잘못 복용하게 되면 영영 그걸로 끝입니까?"

"그렇지는 않네. 제법 희귀한 약초가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해약을 만들 수는 있다고 하니. 대신 얻은 내공은 도로 흩어내야겠지만."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적합한 마공을 익힌 사람은 몇 번이나 이 영약을 먹고 내공을 키울 수 있겠군요."

"아, 그건 또 다르네. 어디까지나 마기를 근본으로 하는 마단이기 때문에, 두 번 이상 복용하는 것은 진원에 손상을 줄 수 있어 치명적으로 위험하니까."

"...그렇습니까?"

제법 성혈단에 관심이 많은 듯한 사내의 질문을 받아주던 영호경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혹시, 자네가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이 성혈단을 복용한 것인가?"

본래 정파로 지내던 입장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미 팽가를 한 번 감싸느라 명교에 적대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대답이 없는 남자에게 영호경은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만약 그렇다면 해약 하나 정도 준비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네. 단, 상대에게서 이 정보가 빠져나가서는 안 될 일이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정파인 이상 성혈단의 존재가 공론화되는 순간부터 명교와의 마찰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명교가 중원에 뿌리내리는 것에 협조적인 강윤으로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것은 적어도 본교가 어느 정도 민초들의 민심을 잡은 뒤로 생각하고 있을터.'

영호경은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

강윤이 명교의 손을 잡아주기만 한다면.

다행히 영호경이 흔쾌히 받아준 덕분에 준비는 별 문제 없이 될 것 같았다.

'보여줄 것도 없는데 쇼맨십이라도 해야지.'

황보효선이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민가를 지키는 다정한 마교무사'를 보여주면 어떻게든 이미지가 호전되지 않을까?

안 되면 나로선 정말 답이 없다.

아무튼 성혈단에 대한 정보 역시 덤으로 건졌다. 해약이 이미 마교에 있다면, 하나 정도 받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어떻게 매소향이나 능풍연의 입을 막느냐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다.

'지금 당장은 황보효선한테 집중하자.'

나는 영호경에게서 물러나온 이후 하루종일 무공을 연마하다, 밤을 맞았다.

"대체 뭘 보여준다는 말인가?"

내가 찾아갔을 때 황보효선은 이미 검은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자기 처소 바깥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와보시면 압니다."

대충 민가나 보여줄 생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뭐라도 있는 것처럼 보여야지.

나는 영호경과 미리 정해둔 지점을 향해 황보효선을 안내했다.

물론 평범한 경비무사에게는 이런 쇼를 한다는 정보가 들어갔을리 만무하기 때문에 계속 숨어서 이동했다.

"점점 외곽으로 나가는 것 같은데...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는가?"

"네, 맞습니다."

분명 영호경이 일장로 휘하의 사람을 써서 지키고 있을 거라고 했다.

소란을 피우다 다른 마교 사람에게 들켜서 득이 될 것도 없으니, 외곽에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고.

"잠깐 멈추게."

한창 이동을 하던 도중, 황보효선이 나를 붙들었다. 그뿐 아니라, 나를 찍어눌러 풀숲 뒤로 감추는 것이 아닌가.

"아니 여혀... 읍!"

입을 틀어막으며 황보효선은 전음을 보냈다.

[소리내지 말게. 자네가 날 여기로 데려오려던 것 아니었는가?]

무슨 소리지? 아직 도착하려면 거리가 좀 남았는데...?

[굉장한 고수들이 모여있는데, 자네가 보여주려던 것이 이것이 아니란 말인가?]

황보효선의 말에 조심스럽게 기감을 돋우어보니, 과연 몇 명이나 되는 고수가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 느껴졌다.

작은 초막 앞마당에 모여있는 것 같은데, 그런 고수들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보통 외곽은 고위급 인물들보다는 무공을 거의 익히지 못한 평교도의 거주지역이라고 들었으니까.

게다가 아마도 대부분이 나보다 실력이 윗줄.

[대답하게. 맞는가, 아닌가?]

[아닙니다.]

아니, 대체 뭐야? 왜 이런 곳에 저런 놈들이 모여있는 건데?

반쯤 소풍 기분으로 나온 거였는데. '마교는 자기 사람이라면 민초도 이렇게 챙기는 인간적인 집단이다'라는 것을 어필할 생각 뿐이었는데.

뭔가 일이 이상하게 굴러가는 것 같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심각하게 좆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물러나죠. 뭔가가 이상합니다.]

[...알겠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처소로 돌아가고 나서...]

오소소소

물러나야겠다고 판단한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도망치게!]

나와 황보효선은 집중되는 살기를 느끼자마자 즉시 내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몸을 뒤로 날렸다.

지금까지 조심해서 숨어오던 길을, 내력을 전혀 아끼지 않고 요란하게 달려나가는 우리 둘을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쫓아왔다.

뒤를 힐끗 보니 그 숫자는 넷. 전해져오는 마기로 보아 그 내공 수위는 모두가 절정 이상이었다.

"일단 들키는 건 신경쓰지 말고 달리는게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러고 있지 않은가!"

황보효선은 사실 괜찮았다. 일반적인 세가의 내공은, 마공을 상대로 반발이 심하지 않다.

이대로 잘 따돌려서 처소에 숨으면 누가 알겠나.

하지만 힘을 아낄 여유가 없어 귀식대법이고 나발이고 다 풀어버린 내 몸에서는 진한 도문의 내공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들킨다. 백 퍼 들킨다.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쫓아오는 저 마교도는, 만약 수뇌부에게서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놈이라면 내가 누군지 무조건 알겠지!

'하지만 이대로 잡히면 죽어!'

같은 사파니까 난 괜찮겠지~ 하기에는 숨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즉시 살기를 피워올리던 놈들이다.

대체 무슨 켕기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잡히면 무조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마공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거의 상시로 귀식대법으로 숨겨져있던 내 내공이 풀려나오자, 다리가 점점 가벼워진다.

"아니, 이런...!"

점점 빨라지는 내 움직임을, 오히려 황보효선이 따라오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조금만 서두르죠! 대체 마교 외곽에서 야밤에 뭘 하고 있었느냐는 추궁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사람들 많은 곳으로 가서 살아남는게 우선입니다!"

놈들도 고수라서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면, 영빈각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안 잡히...

슈슈슈슛

아잇, 싯팔.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놈들은 암기를 던져대기 시작했다.

적들이 암기를 던지는데 신경쓰느라 움직임이 조금 느려진 대신에, 우리는 회피하느라 움직임이 더욱 늦어졌다.

"이러다간 잡히겠네..."

황보효선의 말대로 한 놈이 암기를 던지면 우리가 늦어진 틈에 나머지가 더욱 달려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건물과 절벽 때문에 길이 좁아지는 지점에 들어오는 순간 황보효선이 뒤로 돌았다.

"내가 잠시 여기서 길을 막고 있을 것이니, 자네는 우선 도망치게!"

이런, 미친!

"안 됩니다, 일단 피해야...!"

여기서 혼자서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쪽수가 아니었다. 절정급의 고수가 넷인데, 아무리 길이 좁다지만 겨우 절정고수 한 명이서 뭘 한다고!

나는 급하게 몸을 틀었지만, 황보효선은 이미 수세에 몰려있었다.

남들이 보면 본인이라는 것이 바로 드러나는 거검은 처소에 두고온 탓에, 연검을 빠르게 놀려 버티고는 있었지만 벌써 몸에 상처가 몇 개 난 상태.

"으윽...!"

마기의 특성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심각한 통증을 일으키는 탓에 상처가 늘어날수록 움직임이 둔해질 터였다.

"이런, 멍청한!"

마침 모여있는 틈을 타서 측면에서 장력을 후려갈기고 지풍을 쏟아내자, 어느 정도 움츠러드는 틈을 타서 나는 즉시 황보효선을 빼냈다.

"멍청한 건 자네야, 내 분명 도망치라고..."

"누가 멍청한지는 그만 따지고 일단 뛰어요!"

놈들이 다시 덤벼들기 전에, 나는 황보효선의 손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보효선의 맥문으로 내공을 밀어넣어 마기를 억누르자, 황보효선도 아까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렸다.

"서라...!"

얼씨구, 말 한 마디 안 하던 놈들이 기어코 입을 여네.

공격을 급하게 날린 탓에 제대로 못 봤는데, 뒤를 보니 한 놈이 혼자 다리를 절면서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마 다릴 다친 모양이지.

하지만 여전히 달려드는 세 명에게 시선을 보내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부릅뜨고 뒤를 바라보며 외쳤다.

"조심해! 뒤에...!"

빠악

"뒤를 조심하라고 했잖아."

얼빵한 한 녀석이 낚여서 뒤를 돌아보다가 내가 걷어찬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각법의 내력을 듬뿍 담아서 날렸지만, 아쉽게도 기절은 하지 않은듯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런 비열한 놈!"

"칭찬 고맙다. 근데 다구리 까는 니들이 훨씬 비열해."

혼자서 잠깐 막아서준 황보효선 덕택에 운좋게 한 놈은 다릴 조져서 제대로 쫓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직도 상황은 2대 3이었다.

게다가 평균 무공 수위도 상대가 위.

'자, 이 상황을 어떻게 한다...?'

상대가 다 나처럼 내공만 많은 호구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갑자기 내가 처소에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은 사부가 날 찾으러 나와주는 행운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밤마다 나가는데 사부가 어떻게 알겠어.'

생각해라, 생각해라.

이 좆같은 상황에서 반드시 살아나가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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