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57 정보책이라고? (1)
"왜, 왜요...?"
채수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일 못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렇게 반응해주니까 가슴 속이 간질간질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는대로 황보효선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뇌가 있으면 나한테 들킨 바로 다음날에도 마교를 들쑤시고 다니지는 않겠지.'
하지만 마교에 대한 의혹만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난 협력자를 가장해 적당히 정보를 던져주며 친절하게 대해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거기서 섹스로 이어갈 빅 픽처는 요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일단 밑작업은 해봐야지.
"동행 분께 눈치가 보여서요."
"아..."
하지만 채수란에게 그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채수란은 내 이름은 알지만 내 사부가 혈마라던가, 하다못해 내가 구룡의 일인이라는 것도 모른다.
내가 이마에 입맞춤을 하자 채수란은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나중엔 꼭 임신시켜야지.'
무공의 경지도 낮으니까 빨리 마공을 상대로도 등선공을 사용할 방법을 알아내야하는데...
채수란도 당혜원 과라서 나이를 먹고 점점 미모가 쇠퇴하면 슬퍼하면서 쭈그러들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슴에 안은 상태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쳐있는 채수란과 몸을 씻은 다음에서야, 나는 황보효선을 만나러 나갈 수 있었다.
딱
잠이 들어있던 황보효선은 눈을 번쩍 떴다.
뭔가 단단한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닫혀있는 창에서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났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군지 대번에 떠올린 황보효선은 즉시 옷을 갈아입고 검까지 챙긴 다음에서야 창문을 열었다.
열리자마자 유령처럼 사내가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황보효선은, 검을 쥔 채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역시 자네였군, 염왕도."
"...그냥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좋은 밤입니다, 황보 여협."
오늘도 복면을 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에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황보효선은 입을 열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굳이 잠에서 깨운 것을 보아도 당장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좋은 용건이 있을리가 없었다.
"황보 여협께서는 본교의 행보에 제법 많은 관심이 있으신 모양이더군요."
"..."
"아, 굳이 숨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한 방 때린 더러운 마교 새끼들이 순순히 사과를 하겠다니, 저라도 수상할 것 같거든요."
상대는 고작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왔다.
증폭되는 경계심은 그녀의 손끝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입가를 여유롭게 풀어주며 입을 열었다.
"자넨, 정체가 뭐지? 마교 수뇌부의 관계자인가?"
"유감입니다. 제 정체를 알려주고 싶었으면 이런 복면을 쓰고 올 리가... 엇차!"
빠르게 복면을 베어들어오는 검의 움직임을 가볍게 회피하며 남자는 거리를 벌렸다. 역시 실력이 늘었다.
"호쾌하시군요."
"사람을 놀리러 온 건가? 얼굴 베이기 싫으면 어서 그 복면을 벗고..."
"이거 유감이군요. 황보 여협께서는 어쩌면 본교에서 유일하게 접선할 수 있는 정보책이 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너무 박하게 구시는 것 아닙니까?"
"정보책이라고...?"
"마땅히 본교에서 정보를 얻을 곳도 없어서 무모하게 혼자서 돌아다닌 것 아닙니까?"
황보효선은 상대의 말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지? 그리고 자네에겐 무슨 득이 있는 거고?"
"그야 알아서 잘 걸러들으시라고 말할 수 밖에는 없겠군요. 저는 대신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어째서지?"
"명교에도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협께서 궁금해하시는 부분을 해결하면 제게도 이득이거든요."
머리가 아팠다.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도 정하기가 어려웠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제게 궁금한걸 물어보시고, 제 대답을 들으시면 됩니다. 믿어도 그만, 의심해도 그만. 따로 지불해야할 대가도 없죠."
"..."
뭔가가 수상한데, 말하는 내용만으로는 수상한 점이 없어서 문제였다.
"복면의 수상한 남자가 알려준 정보입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대가를 지불해야할 곳이 어딘지 황보 여협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죠?"
살살 먹이를 흔들듯이 행동하는 사내의 태도가 얄미웠지만 황보효선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럼 답해보게. 교주가 순순히 사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모르니까 자네에게 묻는 것인데..."
"아, 질문을 바꾸죠. 우리집 아이가 남의 집 아이를 때렸습니다. 부모는 사과를 했죠. 어째서일까요?"
"...아이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죠. 그게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모들이 같은 상황에서 사과를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황보효선은 눈을 크게 떴다.
"싸우고 싶지 않아서...?"
"정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교가 어째서..."
"왜 말이 안 됩니까? 마교도는 적을 죽이고 그 피를 마시는 걸 즐기는 괴물들이라서?"
사내의 말은 신랄하게 황보효선을 후려쳤다.
"오면서 보셨을 겁니다. 본교라고 해서 모두가 마공을 익히는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껏, 중원을 침공한 것이 몇 번인가? 오히려 그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중원을 침공한 것이 아닌가?"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싸우고 싶지 않다는 발상 역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단, 마교도도 정파인과 다르지 않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황보효선이 말문이 막힌 사이, 서서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이런, 역시 너무 늦게 왔던 모양입니다. 오늘밤에 다시 찾아뵙기로 하죠. 조금 일찍."
"...자넨 대체 밤에 뭘 하고 다니는 건가?"
"제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알려드린다고 한 기억은 없는데요.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렇게 남자가 열려있는 창문으로 신형을 날리는 것을 지켜본 황보효선은 그제서야 손에 쥔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넣었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가까이 가보니, 역시나 사내는 다시 모습을 감춘 다음이었다.
"대체..."
사내가 들이민 결론만 들어서는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일을 벌인 것인지, 교주는 어떤 입장인 것인지, 마교의 추후 행보는 어떨 것인지.
괜히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황보효선은 머리를 싸매고 침상에 다시 앉았다.
역시 생각대로 오늘밤에는 일찍 황보효선을 만나러 가게 생겼다.
황보효선에게 적당히 떡밥을 던지고 돌아온 나는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연무장으로 나가서 수련을 시작했다.
가볍게 일주천시킨 내기가 몸의 근육을 알맞은 상태로 풀어주었고, 순서대로 초식을 풀어나가면서 몸을 풀었다.
"오, 아침부터 어쩐 일이냐?"
"사부님."
사부는 내가 수련하는 모습을 보자 기꺼운듯 자리를 잡고 앉아 내 움직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기 오고부터 수련은 방에 틀어박혀 명상만 하는 것 같더니, 마음이 바뀌었느냐?"
"원래 뭘 하다가 막히면 내려놓고 다른 걸 해보는게 좋은 방법이더군요."
잘 생각했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 앞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기경팔맥을 가득 메운 내력이 손발을 통해 터져나오면 공기가 터져나가고 흙먼지가 몰아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동작 하나하나보다는,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진기의 운행을 관찰하고 있었다.
등선공은 근본적으로 음기와 양기가 한몸에 공존하도록 만들어진 심법이다.
음기는 차고, 양기는 뜨겁게 나타나기 때문에 각각이 오행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화수목금토 오행 하나하나가 다시 음양으로 갈라지지.'
음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화기에도 엄연히 음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여기에 열쇠가 있지 않을까 짐작하고 내 몸 안의 진기의 운행을 살피고 있었다.
천양지기와 현음지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현천지기.
음양의 두 기운을 억지로 충돌시켜 만들어낸 현천지기로 내공을 모두 바꿔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일정량을 넘어선 현천지기는 다시 흩어지며 둘로 나뉘었다.
결국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완전한 현천지기를 얻지는 못한다.
"하아..."
한바탕 몸을 움직인 나는 숨을 고르며 초식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뭔가 특별한 것을 얻지는 못했다.
사부는 내 반응만 보고서도 특별한 수확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생각했다길래 난 또 이게 답인줄 알았지. 아니, 답은 아니라도 어쩌면 이런 식으로 푸는게 맞는 방법일 수는 있다.
"사부님, 이렇게 하는게 맞는 겁니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통하는 수련법이라는게 있을리가 없지 않겠느냐?"
"사부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는 그냥 혼자 수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답을 알게 되면서 무공이 진일보했으니 뭐라 가르쳐줄 방법이 없구나."
아마 사조는 사부를 가르칠 때 무공만 가르칠게 아니라 무공을 가르치는 법도 가르쳤어야되는거 아닐까? 천재성 더럽다 진짜.
한편 사부는 뭔가 불쾌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얀 녀석, 사문의 숙원보다 여인 때문에 열심히 수련하는 꼴이라니... 에잉, 쯔쯔..."
"...본문의 조사들께선 방중술로 본문의 시작을 열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즉 저야말로 조사님들의 뜻을 올바르게..."
"듣기 싫다, 이놈아.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를 내지 못하면 수련관에 가둬버릴 것이니 그리 알거라."
언소영 따먹을 때만 해도 하루가 늘어가는 내공에 희희낙락하던 사부는 어디 가고, 이젠 나더러 여인 때문에 수련한다고 핀잔인 사부라니.
사부의 경고 탓도 있지만 나는 열심히 수련해야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꼭 채수란만이 아니라, 영호경을 따먹을 기회가 올 때를 위해서라도 나는 마공과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만 하면 황보효선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검성이 손녀딸을 여기로 보냈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나에게 엮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꽤나 마교도에 대한 고정관념이 박혀있던 모양인데, 그걸 구실로 어떻게 머릿속을 흔들어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놈이,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의 황보효선이 가슴팍이 찢어져 출렁거리던 기억이 떠오른 탓인가.
어느새 발기한 자지를 보고 사부가 노발대발이었다.
아잇, 싯팔. 저도 노인네랑 둘 밖에 없는 곳에서 발기해버린거 소름돋으니까 그만 좀 해주십쇼.
"죄송합니다, 사부님!"
하지만 나는 차마 본심을 말하지 못한채 그저 사부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