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55화 (155/383)

밀푸색마 EP.155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1)

채수란에게 몇 번이나 정액을 싸준 다음, 나는 야심한 밤을 틈타 다시 경현동의 집을 나섰다.

'여기는 경비로 돌아다니는 놈들 수준도 높단 말이지...'

모조리 일류 수준이었지만, 다행히 내 신법은 상당히 발전해서 이미 절정 수준에서도 통할 레벨이 되었기 때문에 조심조심, 조용히 숨어서 갔다.

아예 경비 동선을 다 외워버린 당가와는 달리, 여기서는 동선도 잘 모르는 상태로 가야해서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귀찮지만 남의 여자 보지 따먹는데 이 정도 수고는 해줘야지.'

오늘은 달이 휘영청 밝아서 주변도 잘 보이다보니 더 잘 숨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조심조심 이동하다보니, 영빈각이 보인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경계에 빈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린 나는 이윽고 경비무사가 기지개를 켠 순간을 노려 빠르게 입구를 지나쳤다.

'어?'

그런데 지나치는 순간, 뭔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문을 지나치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썅.'

상대도 나처럼 눈에 띄지 않게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두르고 있었다. 떳떳하게 움직이는 놈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하지? 쫓아가서 잡아? 근데 왜?

결과적으로 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미친...!'

나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던 녀석은 다시 내게 달려들며 검을 뽑아드는 것이었다.

간결한 동작으로 쾌속하게 뽑아든 검은... 연검?

낭창낭창하게 뽑혀나온 검이 진기를 머금고 뻣뻣하게 펴지는 것을 보고 나도 황급히 오른손에 진기를 모았다.

장심에 모인 진기가 하얗게 빛나며 상대의 검을 받아치려는 순간, 상대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헛손질을 치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유(柔)의 이치에 따라 부드럽게 내 힘을 흘려낸 검이 다시 쾌속하게 움직여 내 허리를 베어들어온다.

나는 왼손에 음유한 기운을 실어 검결을 휘감아 힘을 흩어냈다.

서로 소음을 내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치열하게 맞붙어 싸우면서도 누군가 한 쪽이 부드럽게 공격을 흘려낸 덕에 우리는 소리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거리를 벌리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염왕도?"

"그러니까 염왕도 아니라고."

계속해서 손을 섞던 나와 녀석, 아니 그녀는 서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잊혀질리가 없었다. 내가 무림에 떨어진 이후로 죽을둥 살둥 싸웠던 첫번째 상대였으니까.

난 목소리를 약간 변성해서 내면서 물었다.

"야밤에, 이런 곳에서 정파인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황보 여협."

희미한 하얀빛을 머금은 연검을 여전히 내게 겨눈 황보효선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마교도였나? 분명 마공을 익히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여기로 온 무림맹 인사가 황보효선이었나보다.

그런데 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황보효선은 밤에 몰래 영빈각을 빠져나와서 마교 총단에 수상한 징후가 없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분명 팽가의 사건은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된 함정이었다.

관부의 일부 핵심인사를 납치하고 바꿔친 다음, 하부인원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바꿔가면서 장악했을 거라는 것이 팽가의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부에 연이 깊은 양씨 가문을 통해 소개를 받았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다고.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순순히 사과할리가 없어...'

정말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고, 어느 정도 혈마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모르는 황보효선은 마교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마땅한 계획도 없이 바깥으로 나왔다.

마땅한 정보도 없이 무작정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뭔가 수상한 꿍꿍이가 있다면 알아낼 수 있을 가능성은 분명히 없지는 않았으니까.

"네,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설마 교에서 여협을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사천 아미산에서 만났던 이 자를 이 머나먼 신강 끝자락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황보효선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어머니 운운하더니,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 때 여협을 속인 건 맞지만 지금 어머니께서 몸이 편치 않으신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그런가?"

사실이긴 했다. 황보효선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몸이 편치 않은 것뿐.

"게다가, 저는 정말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제가 왜, 죄도 없이 황보 여협께 끌려갔어야한다는 말입니까? 말이라도 지어낼 수밖에요."

"하, 하지만 자넨 마교도가 아닌가? 민초에게 해를 끼칠 작정인지도 모르는데..."

"그 때 마교도라는 확신이 있었습니까?"

황보효선의 입이 콱 막혔다.

분명 뭔가가 수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체 어떤 부분이 수상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복면을 쓰고,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서 의심하기에 그 길에서는 거의 다른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까. 흉계의 대상이 될 사람이 너무 적은 것이다.

그 모든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직감이 상대가 수상하다고 경고했음을 알 리가 없는 황보효선은 입을 열려다 멈추었다.

사사삭

두 사람은 어느새 가까이까지 다가온 경비무사의 기척을 느끼고 물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자넨 그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본교의 일입니다. 신경쓰실 것 없습니다.]

분명 사내도 영빈각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았다.

자신을 제외한 외부인이 이 곳에 있던가? 워낙에 넓게 건물이 분포된 탓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나를 해치려고...!]

[제 실력으로요? 저 말고도 기라성 같은 고수가 널린 본교에서?]

얄미운 목소리에 황보효선은 발끈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분명 1년 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실력이 늘기는 했다. 아마 이젠 상대가 마음먹고 도망치려고들면 절대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실력은 절대 아니었다. 암습이라도 가한다면 모를까.

[그러는 여협이야말로 무슨 일로 이 야밤에 마교 총단을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정파인이 이러다 잡히면 큰일나는거 모르세요?]

엄연히 사절로서 파견된 입장의 그녀를, 마교는 절대 명분없이 건드릴 수 없지만 이런 행동은 충분히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이거야말로 무림맹의 일이네. 자네가 알 필요는 없어.]

[그렇군요. 그럼 경비도 지나간 것 같으니 나가죠.]

황보효선이 입을 다물어버리자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궁금증을 털어버렸다.

계속 캐물을 것이라고 짐작한 황보효선은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의 옷자락을 붙잡아 멈춰세웠다.

[더, 더 안 물어보나? 자네 마교도라면서?]

황보효선의 상식으로는 자신의 본거지를 헤집고 다니는 적대세력의 사절이 있다면 그 이유를 캐묻던가, 아예 사람을 불러모아 그녀를 잡을 것인데 이 자의 행동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더 캐묻길 바라십니까?]

[...그건 아니네만...]

어느새 느슨해진 손에서 옷자락을 빼내며, 사내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어느새 건물 사이로 돌아들어간 탓에 쫓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대체 뭐였던 거지...'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안면이 있는 마교도였던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지는 황보효선이었다.

깜짝 놀랐네.

나는 황보효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건물들 틈으로 숨어서 내 처소로 돌아왔다.

일부러 외곽 건물들 쪽으로 갔으니까, 영빈각 바깥으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해주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바깥으로 나갈 때 조심해서 다니는게 좋겠다.

'근데 꼴리긴 오지게 꼴리네...'

이미 채수란에게 정액을 잔뜩 싸주고 오기는 했지만, 등선공이 운공되지 않는 한계 탓에 채수란이 버티지 못해 평소의 절반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복면을 한 채 몸에 꼭 맞는 검은 야행복을 입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황보효선의 몸을 보니 자지가 다시 꼴리는 것이다.

'명경지수... 명경지수...'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섹스하느라 소모된 내력을 다시 보충해주면서 평화로운 심상을 떠올려 자지를 가라앉혔다.

보통 야밤에 그렇게 몰래 돌아다니면 할만한 일은 세 종류 정도로 제한된다.

'암살, 조사, 접선.'

황보효선은 뭔가 마교에서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 있다.

마교의 핵심인사를 해치기에 황보효선의 실력은 그닥 뛰어나지 않고, 마교 내에서 외부와 내통하는 인사와 접촉하기에 그리 요령이 좋지도 않으니까.

그런 짓에 써먹기에 맹주의 손녀라는 위치도 적절하지 않다.

나는 자지를 가라앉힌 다음 우선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내일 영호경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뭔가 알 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안휘성 남궁세가.

언소영은 모처럼 돌아온 세가에서, 노년에 들어선 황보세가의 가모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드님이 아직 나이도 어린데, 가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굉장히 놀랐답니다. 아, 나쁜 뜻이 있는 말은 아니고..."

"이해합니다. 저도 보면서 깜짝 놀랐는걸요."

경솔했다는듯 황보 노부인이 사과해오는 것을 가볍게 받아주며, 언소영은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황보준과 남궁혜의 혼례는 이미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지금 나란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유는 두 가문의 가주가 다른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사대전이라는, 굉장히 무겁고 진중한 화제로.

"맹주께서는 지금 정사대전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보고 계시오. 승산이 낮다는 점도 문제지만, 마교의 입장도 들어보는 것이 옳다는 말씀이시지."

"하지만 황보 가주, 정파의 일원이 당했습니다. 이대로 그들이 사죄를 하는 척하면서 야금야금 전력을 깎아낸 다음 정사대전을 벌이면 어쩌시렵니까?"

"그 부분은 무림맹의 무력단체가 어떻게든..."

지금의 황보세가주인 황보형은 무림맹주인 검성 황보운검의 아들이었다. 당연히 무림맹 친화적인 의견을 낼 수 밖에 없는 입장.

한편 아들인 남궁학은 마교가 사죄를 해오더라도 그것이 정파의 전력을 깎아내기 위한 눈속임이 아닐까 염려하는 입장이었다.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혼례도 미뤄지게되겠지요...?"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요."

황보 노부인의 대답에 언소영은 수줍게 대화를 나누는 황보준과 남궁혜를 건너보았다.

황보준은 실로 선량한 생김새의 청년이었다. 구룡은 되지 못했지만 무공실력도 뛰어날 뿐더러, 인품도 생김에 걸맞게 선하다는 평이었다.

게다가 남궁혜에게 굉장히 깊이 빠져있어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까르르 웃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니 언소영은 문득 생각이 났다.

<오라버니와 창이가 강 소협이랑 어떤 사이냐고 너무 걱정을 해서,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증거로 혼례에 강 소협을 초대하기로 했어요.>

소태 씹은 표정으로 알려주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기뻐할 소식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말해준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언소영은 소망했다.

정사대전이 벌어지지 않고, 딸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조만간 다시 안휘로 찾아올 어린 남편이 자신의 아들을 보고 기뻐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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