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51화 (151/383)

밀푸색마 EP.151 교주께 여쭙시다 (2)

황보효선이 마교 총단에 있는 동안, 그녀를 주로 상대한 것은 영호경이었다.

같은 성별에 연령대도 비슷하면서, 혹시 황보효선이 허튼 생각을 할 경우 여유롭게 제어할 무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여인은 서로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쪽은 무림맹주의 손녀이고, 다른 한쪽은 마교 교주의 딸.

정과 사를 대표하는 자들의 후인이었으니, 관심이 없는 편이 이상했다.

"황보 여협은 여기서도 무공 수련을 쉬지 않는군요."

은하검법의 궤적을 따라 별빛처럼 운행하는 검기를 바라보며 영호경이 말했다.

황보세가의 가전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만, 황보효선은 엄연히 적대세력의 사자.

감시의 시선을 뗄 수 없기에 벌어지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존경하는 할아버님의 십분지일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는 수련 말고는 길이 없으니까요."

무림사에서도 손꼽힐 천재인 검성 황보운검의 십분지일이라니, 그조차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아치는 별빛의 파도는 가상의 표적을 향해 좁혀지고 좁혀진 끝에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땀을 흘리며 숨을 길게 내뱉던 황보효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호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교주."

"...왜 그러죠?"

"팽가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로..."

"정말 본교가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어요. 일부 집단의 돌발적인 행동이었죠. 교주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을텐데요?"

몇 번이고 반복되는 문답에 앞서서, 영호경은 바로 대답을 해버렸다.

교주가 전면적인 사과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황보효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여기에 와서 느낀 점은, 이 곳의 환경이 더없이 열악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녀가 마교 교주라도, 교도들이 가여워서라도 중원을 침공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도절이 쓰러진 지금 중원무림을 침공하지 않고 오히려 온건하게 사과를 건넨다?

"소교주,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교주께서 찾으십니다."

"아, 곧 찾아뵙겠네."

일부 집단이 돌발적으로 벌인 행동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현장에 있던 영호경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물어보려던 순간, 교주가 보낸 사람이 영호경을 데리러 왔다.

"같이 들어가죠."

황보효선이 바깥에 나다닐 수 있는 것은 영호경이 동행해주기 때문이고, 영호경이 자릴 떠야하는 이상 황보효선은 손님을 위한 처소인 영빈각으로 돌아가야했다.

어느새 끊겨버린 대화를 다시 이어나가려던 황보효선은, 곧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결국 상대는 마교의 차기 교주. 대화로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뭘 숨기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영호경이 교주전에 들어왔을 때, 교주전은 모처럼 9명의 장로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교내의 크고 작은 살림을 도맡아하는 장로들이 교주의 곁에 모조리 모여있을 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들이 교주에게서 명령을 하달받을 때가 아니라, 교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교주전에 모인다는 점이었다.

'이제 슬슬 혈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라고는 생각했어.'

어차피 비무를 벌인 시점에서 관심이 안 생기는 쪽이 더 이상했다.

"소교주, 이리 오게."

교주의 부름에 따라 그의 옆에 시립하면서 영호경은 장로들의 면면을 훑었다.

교주에게 절대 충성하는 일장로와, 그를 따르는 칠장로와 구장로.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은, 교주를 향해 경외를 드러내고는 있되 교주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표하는 자들이었다.

"자,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 말을 해보게. 내게 묻고 싶은 것이란 무엇인가?"

교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이장로, 황두명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교주, 최근 흑마단주가 교주전에 와있는 손님과 비무를 벌인 일을 아십니까?"

"알지. 나도 곁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제가 듣기로 그 자가 강호에 알려진 자와 용모가 매우 흡사하여... 혹여 교주께서 알고 계신지 여쭈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이것은 의외였다. 생각 이상으로 이장로가 빠르게, 혈마 사제의 인상착의를 파악한듯 싶었다.

"그 자가 진정 제가 알고 있는 자가 맞다면, 명백히 정파인으로 알려진 자가 총단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교주께 확인코자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흠..."

교주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이장로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전에, 한 가지 알려줘야할 일이 생겼네."

"...무엇입니까?"

"이장로의 휘하들이 하북에서 팽가를 상대로 일으켰던 사건 말인데... 본교의 관리 소홀임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로 했네."

"예?"

이장로는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교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사과라니요! 독단으로 일을 벌인 자들을 처형한 것만으로도 본교는 할 도리를 다 하지 않았습니까!"

주전파 장로들이 입을 모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와중에도, 이장로는 입을 꾹 다물고 교주를 지켜보기만 했다.

"조용히 하게."

마치 시전 상인들처럼 쉼없이 지껄여대던 장로들의 말이 뚝 그쳤다. 마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싹둑 잘라내버린 것처럼.

"자네들이 원하는 것은 잘 알아. 정파에게 핏값을 물리고 싶겠지. 상황에 따라서는, 본교는 정파와 전면전을 벌일 준비는 되어있네."

"..."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교의 미래를 위해서, 교주인 내가 결정을 내려야할 일이지. 자네들이 본교의 강자존의 원칙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면, 내 말이 틀리다고는 못할 거야."

영호경은 교주의 등 뒤에서 직접 그 기세를 맞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교주가 뿜어내는 기세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 자네들이 원하는 바에 나도 일정 부분 공감했기 때문에 내버려두었지만, 이젠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을 벌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겠네. 특히 이장로."

"...예, 교주."

"자네의 수하들이 자네를 아주 잘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말게."

팽가의 사건이 이장로의 사주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교주의 경고에, 이장로는 허옇게 변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방임주의에 가까웠던 교주가, 적극적으로 장로들에게 압박을 넣는 모습을 본 영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내가 할 말은 다 끝났으니, 이장로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자네가 바로 보았네. 그 자는 최근 강호에 떠오른 신성, 손룡 강윤이 맞지."

과장된 수사를 붙여가며 소개하는 교주의 모습에, 영호경은 혹시 교주가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던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하, 하오면, 그 자는 혹시 교주께서 중원무림에 보낸 자입니까?"

"자넨 정말 포기할 줄을 모르는군. 이장로, 내 의도를 그렇게 곡해하려고 애를 쓰지 말라는 뜻에서 내가 미리 얘기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가?"

"..."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일세. 하지만, 그의 사부는 나와 관계가 깊지."

"사부라 하시면...?"

"이제 곧 올 때가 되었는데... 아, 도착한 것 같군."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무공 경지는 최소가 절정 중급.

대전에 접근하고 있는 두 사람의 기운을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저 자는...!"

문을 지나온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일부 사람들이 경악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성을 터뜨렸다.

"혀, 혈마...!"

나는 사부가 주는 눈치에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비무의 결과, 마교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정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터였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정체가 밝혀질 것이고, 혈마가 자기들 본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나 세상에 하고 놀라겠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사람들을 모아뒀을 때 자기가 직접 소개해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이야기다.

<네가 한 짓이 있으니, 한 번은 얼굴을 비추라더구나.>

마교 교주로서는 사부를 통제할 능력이 사실 없지만, 마침 내가 채수란과 떡치는 것을 감지한 마교 교주는 이게 웬 떡이냐 했을 거다.

남의 집에서 유부녀 강간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싫으면 얼굴 한 번이라도 비추라고 사부를 협박한 거지.

사부님, 죄송합니다.

"혀, 혈마... 다, 당신이...!"

이장로가 부릅뜬 눈으로 사부를 보고 있었다. 덕분에 나 따위는 시야에도 안 들어오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이 개새끼가 양하정을 험한 꼴로 만들어놓은 것을 아직 잊지 않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반갑네. '색'혈마, 이자성일세."

사부는 일부러 '색'자를 강조하면서 장로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한가운데에 섰다.

그러자 교주가 입을 열어 우리를 소개했다.

"자네들에게는 소개하는 것을 미뤘지만, 이 두 사람은 손님 자격으로 교주전에 머물고 있었네."

교주전, 을 강조하는 것을 보니 어디까지나 교주 일가의 개인적인 손님이라는 점을 강조할 생각인가보지.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장로 한 명이 그 말귀를 못 알아듣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나섰다.

"그, 그럼 혈마 대협께서 본교에 투신하신다는..."

"팔장로, 물러나있게."

교주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팔장로면, 장로들 중에서는 거의 말단일 터였다.

'왜 말단인지 알 것도 같고.'

"이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내가 아닐세. 소교주가 개인적으로 초청한 거지."

정확히는 초대받은 건 나고, 사부는 날 걱정해서 따라온 거지만.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겠네. 만약 혈마가 우리에게 가세할 뜻이 있다고 해도, 정사대전은 가능한 한 피할 생각이라는 것을."

"교주, 그게 무슨..."

영호경이 경악한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부녀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인데?

손님을 불러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사이에서, 나는 뻘쭘하게 서서 사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부님, 저희 언제 나갑니까?]

[네 녀석만 아니었으면 이놈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미 나갔다, 이 녀석아.]

사부의 말에 나는 다시 쭈구리가 되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들어보니 몇몇은 압도적인 전력이 생겼다면 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하고.

몇몇은 교주의 말대로 오래도록 지배를 유지하지 못할 거라면 정사대전을 안 일으키느니만 못하다면서 대판 싸웠다.

'아, 그래서 참고 있는 거였어?'

공식적으로 총 12명의 절대고수를 반반 나눠가진 정파와 사파지만, 실상을 파고들어가보면 사파가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6명의 정파고수들 중에 1명은 부상으로 출전 불가.

반면 사파고수는 사부를 제외하고서도 영호경을 포함하면 6명이 있다.

게다가 마교가 보유한 사람만 해도 3명이니까, 초기에는 일방적으로 두드려팰 수 있을텐데 참고 있는 이유가 뭔가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아까 사부가 마교로 투신하는 거냐고 설레발을 치던 팔장로와 눈이 마주쳤다.

"오, 오호, 강 소협이라 했는가? 자네도 한 번 말을 해보게! 여기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미친 새끼, 니들이 얘길 하는데 왜 외부인을 끌어들이려고 해?

나는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팔장로한테 핀잔을 줄 줄 알았는데, 특히 교주가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도 팔장로를 제지하지 않고 언쟁이 중단되었고, 교주는 그저 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렇군, 자네 의견도 한 번 들어보세. 본교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리고 교주는 말을 끝내자마자 소리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방... 사. 방사. 섹스?'

그러니까 여기서 대답 안 하면 섹스 건으로 날 엿먹여주겠다는 협박이었다.

아니 여기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면서요. 진짜 개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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