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44 몸을 보이게 (1)
'왜 이렇게 됐지...?'
나는 교주전에 딸린 연무장에서 독이 잔뜩 오른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경현동과 대치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단주? 지금이라도 철회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놈이 내게 그런 수모를 주고서도 무사하기를 바랬더냐! 정 죄를 용서받길 바란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라! 팔 하나를 가져가는 선에서 용서해주마!"
아니, 그게 어떻게 용서야.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케하는 용모하고는 전혀 다르게, 솔직히 조금도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형편없어보이는 것이다.
소교주와 둘이 있는 자리에서 경현동의 무례한 방문을 받은지 하루만에, 나는 난데없는 비무첩을 받았다.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인지 수신자의 이름도 적지 못한 비무첩이었다.
<받지 않았다면 모르되, 받았다면 거절하지 말거라. 수련도 되고 좋지 않으냐?>
거절하고 싶었지만, 사부가 그것을 보고 수련의 연장이 될 수 있을 거라면서 받아들일 것을 넌지시 강요해왔다.
남일이라고 쉽게 생각한다니까.
"이 비무는 본 소교주가 관장하겠다. 승부를 결하는 조건은, 항복하거나 비무를 지속할 수 없다고 본 소교주가 판단했을 것. 이의없는가?"
"물론입니다!"
"...예, 이의 없습니다."
"비무 결과에 따라, 패자는 승자의 의견에 따를 것. 이도 문제 없겠지?"
"예."
비무 당사자를 제외하고서도 몇 명의 사람이 제법 떨어진 곳에서 비무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당연히 사부가 있었고, 교주도 있었다.
뭔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교주의 표정이 빙긋거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재미있을 것 같은가보지.
"그럼, 시작하게."
영호경이 시작을 선언하자마자, 나는 즉시 바닥을 박차며 놈에게 접근했다.
분명 손에 무기가 없으면서, 권장법을 쓰는 사람치고는 소매가 넉넉하다. 아마 암기무공이거나, 그에 준하는 원거리 공격 타입.
아니나다를까, 소매에서 반월 같이 생긴 암기가 곡선을 그리는 궤도로 날아왔다.
가볍게 피해서 마저 접근하려는데, 경현동의 입꼬리가 야비하게 말려올라갔다.
'뭐지?'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공기를 찢는 소리와 섬칫한 예기.
나는 즉시 상체를 숙였고, 아슬아슬하게 반월형 암기가 회전하며 경현동의 손으로 돌아갔다.
경현동은 혀를 찼지만, 나는 몸을 낮춘 자세 그대로 놈에게 접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 방인데...'
사부의 명령으로 나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귀식대법을 유지한 채로 비무하도록 되어있었다.
마치 코를 막은 채 마라톤을 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력의 수발이 원활하지 않아 평소의 절반이나 힘이 나올까말까였다.
"건방진 놈!"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현동은 자세를 낮춘 채 다가가는 나를 각법으로 찍어누르려고 했다.
그 기세가 제법 예리하기는 했지만, 급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묵직함이 부족했다.
바짓단을 잡아채서 역으로 밀어올리자, 경현동은 뒤로 나자빠졌지만 오른손에서 수십개의 가는 바늘이 나를 덮쳐오는 탓에 나는 장력을 날리며 뒤로 빠져야만 했다.
그 틈에 넘어졌던 경현동이 다시 일어나서 비도를 세 자루 날렸다.
물수제비치듯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비도를 유심히 본 나는, 어느새 내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그것을 모조리 잡아채는 것을 깨달았다.
'또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내 몸이 멋대로 펼쳐내는 때가 있었다.
사부에게 까닭을 물었지만 조만간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그냥 두는 편이 날 위한 일이라고 했다.
두 자루는 도로 경현동을 향해 내던진 다음 한 자루는 왼손에 거꾸로 쥐고 덤볐다.
"대, 대체...!"
상대의 얼굴에 서서히 공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경현동의 무공은 일류 상급, 거의 절정으로 넘어가기 직전 정도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보기에는 부족했지만 내 나이의 젊은 고수를 상대로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겠지.
사실 나도 암기무공에 대한 대처방법의 기초를 당혜원에게 배우지 않았더라면,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것도 모르고 비무첩을 보내셨습니까?"
내 말에 경현동은 할 말이 궁한듯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소매에서 칼날 달린 원반 같은 것을 날렸다.
"이런."
하지만 이미 한 번 통수를 맞을 뻔한 나는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대화하는 중에 암습이 날아올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던 나는 즉시 손가락을 튕겨 지풍으로 암기를 맞춰 떨어뜨렸다.
펑
"으윽!"
연막 종류인지, 지풍에 맞아 깨지자마자 하얗게 퍼져나오는 연기.
경현동은 아무래도 나에게 연막을 뒤집어씌우고 암기로 고슴도치를 만들 생각이었겠지만, 본인이 연막에 휩싸이는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허둥지둥 연막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던 경현동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목 뒤에 지력이 서린 손가락을 겨누었다.
급하게 일어나려다 뒷덜미를 겨눈 지력의 감촉을 느끼고 우뚝 움직임을 멈추는 경현동.
"거기까지!"
영호경의 판정이 적절한 시기에 들어왔다. 경현동은 분한 듯 바닥을 내리쳤지만, 승패는 이미 갈렸다.
"이제 되었는가?
영호경의 말에는 경현동에 대한 가벼운 질책이 담겨있었다. 애초에 네가 잘못했는데 무슨 낯짝으로 비무를 신청했느냐는.
"예..."
"그럼, 사전에 정해둔대로 경 단주는 이 소협에게 사죄하고 추후 이 일을 다시 꺼내드는 일이 없도록 하게. 알겠는가?"
"...예."
특별히 내상을 입은 것은 아닐텐데, 경현동은 주저앉은 채 일어나질 못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타격이 제법 컸기 때문 아닌가 싶었다.
"대협, 괜찮으십니까?"
아무리 미운 놈이라도 주저앉힌 상태로 두기가 뭣해서 손을 뻗어주자, 경현동은 멍한 표정으로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시지요. 심하게 다치신 곳은 없지요?"
경현동은 내 질문에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내 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내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눈빛이 흐릿한 것이, 이래서야 제대로 사과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몸조리부터 하시는 것이 순서일듯 싶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시지요."
"..."
솔직히 먼저 싸움 걸어놓고 졌다고 이 꼴이 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어쩐지 검찰청에만 가면 갑자기 휠체어를 타시는 분들이 왜 휠체어를 타나 이해가 간다.
표정만 죽을상을 쓰고 있어도 말을 세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몸을 돌리고 사부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다. 사부가 만족하고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기긴 했으니까 뭐라고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으아아아아!"
갑자기 경현동이 괴성을 지르자,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경현동이 손에 비도를 쥔 채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영호경은 강윤의 승리를 선언하며 내심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그녀가 원하던대로, '멋대로 구는 부하들 때문에 신뢰하는 수하를 찾는 소교주'를 연출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경현동이 이렇게 비무까지 벌여가며 강윤에게 적의를 보이는 상황은 그녀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명교도라면 시비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비무를 종종 사용하긴 하지만, 경현동은 예외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부친의 위명에 기대에 위세를 부리고 있을 뿐, 무공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으니까.
'다른 누군가가 부채질을 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한가... 일장로나 삼장로는 아닐 거고... 이장로, 아니면 사장로?'
장로는 총 아홉이었지만 그 중에 독단적으로 일을 벌일만한 사람이라면 위의 넷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장로는 당연히 제외, 삼장로는 경현동의 아비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제외였다.
"으아아아아!"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연무장을 지켜보지 못했던 영호경의 귀에 경현동의 괴성이 꽂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자 경현동이 강윤의 뒤를 향해 비도를 찔러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아닌가!
'안 돼!'
영호경은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날렸다.
제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내력을 운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비무에서 순간적으로 기력을 폭발시킨 직후라면, 반응이 늦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미친...!"
강윤은 욕설을 뱉으며 회피를 시도했지만, 역시 순간적인 상황이어서 내력의 수발이 원활하지 않은 듯했다.
유령처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영호경은 급한대로 손에 내력을 실어 천마검법의 투로에 따라 수도를 휘둘렀다.
"컥!"
암기술을 주로 익힌 경현동의 비도는 형편없이 영호경의 손날에 걸려들어 박살이 났고, 검을 타고 흘러든 내력에 경현동이 신음하며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끼어드느라 힘조절을 하지 않아서, 아마 내부가 진탕이 되는 느낌일 것이었다. 아무튼 일단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영호경은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즉시 경현동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강 소협, 괜찮은..."
영호경은 말을 하다 등 뒤에 후끈한 감각이 스쳐가는 것을 느끼고 기겁을 했다.
"소, 소교주!"
"...괜찮은가?"
아무래도 강윤을 보니 급한대로 각법으로 공격을 걷어내려다 갑자기 끼어든 영호경을 보고 공격을 멈추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등을 후끈하게 덮친 것은 각법의 진기의 파동이었을 것이고.
아무래도 다친 곳은 없어보였는데, 갑자기 강윤이 바닥에 웅크려앉자 영호경은 다시 당황했다.
"왜, 왜 그러는가?"
그녀가 못 본 사이에 다른 암기에 당한 것인가?
분명 강윤은 훌륭하게 암기에 대처했을 터였다.
비무가 끝난 다음 암기에 당한 것인가, 영호경은 고민했지만 확인을 위해서는 우선 강윤이 몸을 보여줘야만 했다.
"강 소협, 몸을 보이게!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소, 소교주, 그, 그게..."
"안 되겠네, 우선 바닥에 눕게. 어서!"
"아, 안 돼...!"
저항하는 강윤을 억지로 힘으로 눕힌 영호경은, 몸을 샅샅이 살폈지만 딱히 상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대신, 우람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신체 부위를 하나 발견하긴 했다.
"아으... 진짜... 안 된다니까요...!"
마치 팔뚝처럼 커다란 남근이, 바지를 뚫어버릴 것처럼 부푼 채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제 몸을 내려다본 영호경은 자신의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젖가슴이나 둔부가 일부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