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43 혈마가 왔다고? (4)
영호경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남자, 경현동은 삼장로의 아들로서, 영호경에게 묘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교내에서 소교주인 자신과 맺어지기에 적합한 위치의 유일한 남성이기도 했다.
"이놈, 네놈의 사부가 누구인지 당장 고해라, 치도곤을 낼터이니!"
"제가 코흘리개 아이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저는 제 행동에 완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인데."
안 그래도 그것을 이유로 안하무인이 심했는데, 오늘 기어코 선을 넘었다 싶어 손을 봐주려는 와중에 강윤이 나서서 그와 대거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서 그따위로 지껄이는 것이냐? 정녕 감당할 자신이 있느냔 말이다!"
영호경은 피식 웃었다. 뒷배로만 따지면 감당하지 못할 것은 오히려 경현동 쪽이다.
마교 삼장로 정도라면 어지간한 대문파의 장문인에 준하는 위치지만 혈마에 비할 수 있을리가.
그 웃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경현동의 화살이 영호경을 향했다.
"소교주, 말씀해주시지요. 어째서 혼담을 거절하신 겁니까? 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후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겁니까!"
"교의 무궁한 발전이라..."
경현동이 그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잘 알았다. 처녀적부터 자신에게 기묘한 집착을 가지고 있던 남자.
아이도 갖지 못하고, 남편을 잃어 홀몸이 된 자신을 보고 슬금슬금 아비를 등떠밀어 혼담을 넣어놓고 무궁한 발전은 무슨.
"풉."
역시 손을 봐줘야하나 싶어 기세를 끌어올리려던 찰나, 다시 강윤이 입을 열었다.
"아니, 혼담을 넣었으면 사랑한다, 같이 살고 싶다, 그런 소리를 해야지 교의 무궁한 발전? 당신 정말 고추달린 남자 맞습니까?"
"뭐, 뭐라...!"
"사람이 그럴 수 있긴 해요. 상대가 날 받아줄 것 같지 않으면 다른 걸 인질 삼아서 혼담을 넣을 수도 있죠. 근데 그걸 남 앞에서 당당하게 밝히는거,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노옴!"
강윤이 경현동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찔러대는 것을 보고 속시원한 구경은 많이 했으니, 영호경은 그쯤에서 제지하기로 했다.
"두 사람 다 그쯤 해두게."
"하지만, 소교주!"
"누가 옳고 그른가 이전에, 소교주인 내가 객을 맞이하고 있는데 대뜸 끼어들어 항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그녀의 대에서 숙원을 이룩하지 못한다면, 그를 남편으로 맞을까 생각도 했었다.
영호씨는 명교 모든 이의 위에 군림함과 동시에, 수호하는 존재. 숙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어져나가야할 핏줄이었으니까.
하지만 명교천하를 최소한의 손실로 이룩할 가장 중요한 열쇠가 눈앞에 나타난 지금, 그럴 필요성이 흐려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자, 나가주게. 내 그대의 이야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겠네."
경현동은 씩씩댔지만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래부터 부친의 위명에 기대는 자였으니까.
기세로 눌러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지만, 영호경은 강윤의 태도를 보고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게 있었기에 자제하고 있었다.
"네놈, 두고보자. 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줄 터이니!"
"아, 예. 살펴가십시오."
이런 면모가 있는줄 몰랐는데 남의 속을 뒤집어놓는 솜씨가 천하일품이었다.
경현동은 속이 부글거리는지 핏발선 눈으로 강윤을 노려보다 고개를 홱 돌리고 나가버렸다.
두 사람만 남자마자, 강윤의 눈에 동정심이 가득 어리는 것이 보였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영호경이 모종의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보였다.
'그렇다면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죄송합니다, 소교주. 제가 괜히 나서서..."
"아닐세. 안 그래도 곤란하던 차였는데, 강 소협이 나서주어서 다행이야."
영호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절정도 되어보이지 않는 상대인데도, 무려 초절정고수인 영호경이 세게 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니 뭔가가 있다.
돈이든 그 외의 이해관계가 되었든, 뭔가가 영호경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얽매고 있는 상황이겠지.
"대체 누구길래 소교주께 함부로 나서는 겁니까?"
"경현동. 흑마단주이면서, 삼장로의 아들이기도 하지."
흑마단이라고 하면 굉장한 고수들의 집단 같지만, 실상은 대부분이 하급고수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한다.
치안유지나 기타 잡일을 도맡아하는, 이른바 포졸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런 집단의 단주라고 하면 높은 건지 낮은 건지 애매하다.
하지만 적어도 장로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의 아들이라면 꽤나 콧바람이 센 사람일 것이다.
"교주께서 물러나시면 그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할텐데, 내겐 아직 후계가 없다네."
"그래서 무궁한 발전이 어쩌고 한 겁니까? 명교를 이어받을 아이를 가져야해서?"
"..."
영호경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무언은 곧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거절한 것 아닙니까? 거절당했으면 끝이지, 이렇게 와서 따져도 되는 겁니까?"
"본래는 그래야하지만... 내가 소교주라고는 해도, 교내의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네."
"..."
"답답한 일이지... 본교의 모두가 하나가 되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래서 나나 사부를 끌어들이고 싶어한 건가?
하긴 밖에서 보면 한없이 단단해보여도, 안에서 콩가루라면 전적으로 자기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절실하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나한테 '내 것이 될 생각은 없나' 하고 당당하게 묻던 영호경의 모습과 비교되면서 문득 그녀의 어깨가 매우 작아보였다.
"만약 그 자가 자네를 핍박하는 듯 싶다면 내게 알리게. 손님까지 보호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지는 않으니."
"...괜찮습니다. 제 입으로 꺼낸 말이 가져오는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죠."
어쩌면 내가 한 말 덕분에 영호경도 속이 시원했을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더 난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당할 일의 뒷감당까지 맡겨서야 면목이 서질 않는다.
결국 칙칙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남은 차를 다 마신 다음 소교주의 처소에서 물러나왔다.
그 날 저녁, 일장로는 소교주의 조용한 방문을 받았다.
"...동정심을 부추겨볼 생각이시라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자를 끌어들일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일장로의 떨떠름한 질문에 영호경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현동 그 자가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교주를 가벼이 여기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 양물이 제 목을 지켜줄 거라고 믿은게지."
명교의 고위 가문 중에서, 경현동을 제외하면 영호경과 짝이 될만한 나이대의 사람은 없다.
차라리 영호경이 사내였다면 어린 여인을 붙여주어도 흠이 되지 않겠지만, 여인이었기에 생기는 문제였다.
"언제든지 목을 쳐버려도 상관은 없지만, 당분간은 그냥 두게."
"목을 쳐버리는 건 조금... 게다가 소교주께서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그 자를 휘하에 두셔야겠습니까?"
"가지고 싶어.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지. 스승을 제외하고 재보아도, 매력적인 인재야."
"동정심으로 수하를 들일 수는 없습니다."
"일단 심리적으로라도 묶어두는 거야. 그 다음에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내 그릇이 부족한 것 아니겠나."
일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물러나는 듯, 멀리 돌아가는 듯 보여도 결국 원하는대로 하고 마는 성격.
"곁에 두는 시비는 조금씩 바꾸면서 간을 봐. 어린 나이에 무공만 익히느라 여색을 밝히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하얀 천이 더 쉽게 물들기 마련이지."
"...알겠습니다."
이런 포주 같은 짓까지 하게 되다니.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일장로는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강호에서 닳고 닳아 어디에도 빈틈이 없어보이는 혈마에 비하면, 여러모로 무른 점이 보였다.
교내로 안내해올 때, 그가 어린 아이에게 몰래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떠올려본 일장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비들 가운데 이장로의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 부분은 어떻게..."
"그냥 두게. 어차피 경현동이 휘젓고 간 이상, 뭐라도 주워듣겠지. 게다가 이장로라고 해서 이 상황을 꺼릴 이유가 없네."
이장로를 비롯한 주전파가 지향하는 바는 다양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된다.
척박한 신강까지 명교를 몰아낸 정파무림에 핏값을 물어내게 하는 것.
오히려 명교가 혈마라는 날카로운 칼을 쥘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제자가 넘어온 다음이라면, 혈마도 마냥 팔짱끼고 구경만 하지는 못할테지."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일을 서둘렀다가는 그르친다.
영호경은 여유를 두고 확실하게 강윤 한 사람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젊은 남자라..."
이장로는 수하가 가져온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예, 경 대인께서는 분명 소교주와 젊은 남자가 독대하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건장한 체격에, 준수한 얼굴을 가진 젊은 남자. 비슷한 조건을 강호에 나가면 적어도 수백 수천 명은 찾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경현동이 준 쓸모없는 정보는 우선 제쳐두고, 이장로는 다른 쪽 수하에게 턱짓을 했다.
"명하셨던, 손룡 강윤에 대한 추가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뭔가 더 있었나?"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청년 고수에게 이유 모를 경계심을 느낀 이장로는 수하에게 조사를 명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존재. 사천당가에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의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철저히 파헤쳐볼 것을 명령했는데 그 결과가 지금 나온 것이다.
"역시 과거 기록은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만... 최근 행적에 수상한 점이 있어 보고드리려고 합니다."
"수상한 점...?"
수하의 보고가 이어지고, 보고를 전부 듣고나서 이장로는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것인지 아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그 자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여인이 아이를 가진다는 말인가?"
먼저 남궁세가의 언소영. 강윤이 한동안 안휘에서 머물렀던 장원의 주인은 언소영이었고, 아무래도 그 장원에 아기가 있다는 것 같다는 보고.
그 다음은 고가표국의 제갈미령. 그녀는 최근 아이를 가져 한동안 머물던 당가를 떠나 고가표국으로 돌아갔다는 보고.
그 외에도 당가의 팽연화나 당혜원 역시도 그가 있던 시기에 모습을 감춘 것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말이 되는가? 사내가 되어 색을 밝히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치겠네. 하지만 다들 어미뻘인 여인들 아닌가!"
구룡이라면 더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남의 부인을 골라서 건드리는 정신나간 색마라면 모를까, 정파의 일원으로서 자신에게 당당하게 맞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그 외에는 별다른 특이사항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죄송합니다."
수하는 면목이 없는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무래도 신변관리가 너무 깨끗해서 그나마 마음에 걸리는 것을 이잡듯이 뒤진 결과인듯 했다.
"됐네. 그 자에 대한 조사는 우선 접어두고, 지금 교주전에 머무르고 있는 두 사람이 누구인지나 어서 알아내게."
교주의 명으로 교주전에 머무는 빈객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은 지극히 한정되어있었다.
아직 이장로가 포섭한 시비들이 그들의 수발을 들기까지는 제법 시일이 남아있었고, 정보는 빨리 아는 것이 생명.
'아, 그래... 경현동이 그 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다고 했겠다...?'
이장로는 안하무인인 그의 성품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런 때는 오히려 잘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