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42화 (142/383)

밀푸색마 EP.142 혈마가 왔다고? (3)

우린 하루를 쉰 다음, 깔끔해진 몸으로 교주를 만나게 되었다.

뭔가 호화찬란한 의자에 앉아있는 교주는 30대 정도로 보이는 장한이었다.

70대인 그가 오히려 딸인 영호경보다 연하로 보일 정도였으니, 팽연화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초절정을 찍으면 늙지 않는다!'

그 사실에 고무된 나는, 곧 교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했다.

뭔가 눈이 웃은 것 같은데, 교주는 곧 사부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물었다.

"편히 쉬셨소?"

"덕분에 잘 쉬었소. 그러고보면 지난번에 왔을 때도 교주전에 머물지는 않았는데, 꽤 괜찮더이다."

"그 때와 지금의 귀하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 아니겠소?"

그렇게 평범하게 인사를 두런두런 나눈 두 사람의 대화의 초점은 곧 내게로 옮겨왔다.

"내 제자를 불렀더군."

"내가 아니라, 내 딸이 그랬지. 귀하의 제자가 어지간히 탐이 났나보오."

"덤으로 나도 낚여오면 좋고?"

"부정은 하지 않겠소."

두 사람이 나를 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갈렸다. 사부는 날 한심한듯 바라보는 반면에, 교주는 재미있다는듯 나를 바라본다.

"약속을 했고, 그것을 지키러 왔소. 한 달 보름이던가? 그 기한은 반드시 지키지. 하지만 수련하는 시간을 방해하면 곤란하오."

"아, 명심하지. 교주전의 연무장 중 하나를 내어주고, 거기에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겠소."

"그 누구도에 그대와 그대 딸은 포함되지 않겠지?"

"그러면 불러들인 의미가 없지 않겠소? 적어도 말을 건네볼 기회 정도는 줘야 꼬실 여지가 있지."

주거니, 받거니.

애초에 주인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요구는 너무 무리한 요구였기에 사부는 한 발짝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반가웠네. 앞으로 여기 지내는 동안 자주 보지."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교주의 앞에서 물러나오려는데, 사부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사부님?"

"난 나중에 가마. 오늘은 우선 수련시간이 없을 것이니, 편히 쉬어두도록 하거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난 시비의 안내를 받아 내 방으로 걸어가는데, 나를 곧 따라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소교주?"

"처소에 방치해두고 있는 것도 손님을 올바르게 대접하는 예는 아니지. 잠시 차라도 한 잔 하겠나?"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그 뒤를 따라갔다. 당장 떡만 안 치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성혈단에 대한 정보도 들을 수 있으면 들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언제고 매소향에게 떡을 칠 미끼로...

안 돼, 안 되지. 지금은 섹스 생각은 하지 말자. 난 지금 생불 그 자체다!

"정말 제자를 들였을 줄은 몰랐소."

"그래서 내보낸 것이 남가 녀석이었나? 확실한 물증이 없으면 죽이려고?"

"일장로라면 귀하의 무공을 견식한 적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말이오."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남지 않은 대전에서, 혈마는 예전처럼 말을 낮추었다. 그리고 교주 역시 그것을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자가 걱정이 되어 온 것이오? 내가 기억하는 혈마는 분명 그런 걱정까지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좋을대로 생각하게. 하지만 어린 제자놈을 마음대로 구워삶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하, 구워삶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교주가 시치미를 떼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혈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팽가에서 일을 벌였더군. 게다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소림에서도 일을 벌였고."

"여전히 귀가 밝으시구려. 아직도 하오문만큼은 각별히 아끼고 있는 모양이외다?"

"대충 제자에게 들은 이야기와 조합해보니 소림 쪽은 이제 더는 뒤집을 염려가 없을 것 같더군. 남는 건 팽가 정도인가."

자신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교주는 포기한듯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내가 듣기로 팽가의 사건은 일부 교도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하더군. 그 입장을 지키되, 정파에는 명확한 사과를 표해주면 좋겠네."

"...하. 제자가 정파 노릇을 하고 있다던데, 혹시 귀하도 전향이라도 생각하고 있소?"

교주는 날을 바짝 세워 물었다.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상대는 강자였으니까.

하지만 명교의 행보까지 좌지우지하려고 드는 태도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 교주는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오해하지 말게. 전향을 한다면 자네들이 덤비도록 내버려둔 다음 내가 박살을 내놓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더 극적이지 않나?"

"..."

"충분히 그 자들이 딴 생각을 못하게 제어할 수 있을텐데도, 자네가 방치하고 있는 것은 자네도 핏값을 받아내야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는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억측이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그렇다는 가정하의 이야기라고 치자는 말일세. 하지만 분명히 경고해두겠네. 그들이 언제 자네의 손을 벗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말이야."

"...그 말을 하려고 남았단 말이오?"

"밥값으론 충분하지 않은가?"

교주는 이장로를 주축으로 한 주전파의 면면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사과하라는 소리가...'

정파에만 보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교내의 주전파 무리들에게 교주의 명확한 의지를 드러내고, 그들을 통제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들이 진정 명교에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파를 물어뜯으려고 들기 전에.

"...알겠소."

혈마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꼽지만, 교주는 그 말에 따르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을 내렸다.

이로써 혈마가 보는 이득이 무엇인지는 아직 미지수이기는 했지만.

화려하다.

영호경의 처소는 지극히 화려했다.

심지어 목재로 된 것으로 보이는 가구마저도 번쩍거리는 것이, 애초에 그런 물건인지 손질이 잘 되어서 그런 건지 궁금했다.

"이것은 최상급 대홍포일세. 맛이 어떤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마실만하군요. 살짝 달달한 느낌도 들고..."

차는 떫은 맛이 나서 사실 그냥저냥 마시는 정도였지만, 이 정도면 먹을만할 것 같았다.

시간이 한 달 넘게 남아서인지, 영호경은 내게 성급하게 빨리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이번에 새롭게 구룡이 다 맞춰진 셈인데, 혹시 삼봉은 만나본 적이 있나?"

"네, 있습니다."

남궁혜를 제외하고도, 비봉 능휘연을 만나본 적은 있다.

매소향의 딸이면서도 매소향을 닮지 않은, 신비로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흐음, 나도 영봉 남궁혜를 제외하면 남은 둘은 소림에서 보았지. 미색이 제법이던데."

호로록 차를 마시면서 찻잔 너머로 나를 넘겨보는 모습이, 어느 쪽이 타입인가 재보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아마 결혼하고 10년 정도 다시 지나고 나서 보면 자빠뜨리고 싶은 밀프로 바뀌어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사실 영호경이 더...

"쿨럭쿨럭!"

"괜찮은가?"

"괘, 괜찮... 쿨럭!"

안 된다, 안 돼. 아무리 이동하면서 한 번도 해소하질 못해 욕구가 쌓였어도 마교 여자만큼은 안 된다.

나는 차를 마시다 사레가 들린 것을 진정시키며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영호경을 훔쳐보았다.

이 여자는 내가 밀프만 골라먹는다는걸 모른다. 그걸 안 들키고 조용히 시간만 보낼 수 있으면 승산이 있다.

'처녀는 어떻게 참아낼 수 있다. 참아내야한다!'

"여긴 굉장히 규모가 크더군요. 천연의 절벽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요새라니, 귀교의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길게 이어졌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기침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음, 그렇지. 이 곳은 비단길을 옆에 끼고 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도 자주 일어나는 편이야. 이렇게 요새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많은 일반교도들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네."

"일반교도..."

"오면서 보지 않았나? 우리라고 모두가 마공을 익힌 무사로 구성되어있는 것은 아냐. 그저 교리에 따르는 평범한 민초도 많이 섞여있지."

영호경의 설명에 명교의 교리는 일종의 미륵신앙이라고 한다.

즉, 교리에 따라 선하게 사는 자들을 구원할 미륵을 기다리는 기복신앙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일반교도들의 어려움으로 동정심을 사려는 행동은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내게 담담하게 사실을 말해주는 태도를 보면, 영호경도 보통은 아니다.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으면서 반감을 최소화하고 나를 흔드려는 영호경의 깔끔한 설득방식에 내심 감탄하던 나는, 문득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 단주님! 손님이 와계십니다! 부디 나중에 다시...]

[비켜라! 소교주,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문이 요란하게 열리면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남자가 들어왔다.

"경 단주,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가?"

"소교주, 어째서 거절하신 겁니까!"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왜..."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던 남자는 곧 내가 빤히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닫았다.

"누굽니까?"

"내 손님일세. 결례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장 나가주게."

영호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나더러 알아서 나가라는 뜻 같은데?

나는 굳이 상대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차를 마저 마셨다.

"애송아,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어른들이 이야기할 때는 끼어드는게 아니란다."

"제가 알던 것과는 끼어든다는 말의 뜻이 많이 다른 것 같군요. 먼저 와있던 사람이 끼어들었다는 주장을 듣는 건 난생 처음입니다."

"뭐?"

만약 나 혼자 왔더라면 그냥 물러날 수도 있었다. 이런 부류한테 괜히 정론으로 맞서려고 해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하지만 영호경도 남자에게 물러나라고 한데다가 무엇보다 나는 여기에 사부와 함께 왔다. 내 행동이 사부의 자존심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란 말이다.

"애송이, 이름이 뭐냐?"

"남에게 이름을 밝힐 때는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는데 여기는 다른가봅니다?"

"이놈이 정말...!"

남자는 기가 막힌듯 눈을 희번득거렸다.

하지만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내 쪽이었다. 갑자기 뛰어들어와서 나더러 나가라고 하는 쪽이 더 이상한 것 같은데.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마교 넘버 2, 영호경이 명령을 하는데도 바로 안 따르고 미적대고 있는 거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있긴 한 건지, 덥수룩한 수염을 길러 호랑이 같아보이는 남자는 마치 나를 때려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서안 무림맹.

검성은 모처럼만에 돌아온 일상이, 다시 마교의 준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탓에 나날이 피폐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마저도 그에게는 고역이었는데, 어떤 뜻밖의 소식이 더해짐으로써 검성은 급기야 현기증을 느끼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청량... 그러니까... 뭐라고...?"

"대, 대단히 죄송합니다, 맹주. 백호단의 황보 부단주가..."

"그래, 효선이가, 뭐...?"

"마, 마교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열흘 가까이 전에...!"

검성은 무심코 손에 실린 내력으로 탁자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그것을 지적해야할 부맹주 청량자 역시도 머릿속이 얼어붙은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지시 착오로 인한 엉뚱한 인선의 파견. 평소라면 그대로 수행을 명령하거나, 인선이 정 부적합하다면 뒤늦게라도 바꿔주면 된다.

하지만 무려 열흘 가까운 시간이 경과해버렸다.

"아니, 대체 왜 효선이를... 그보다, 혼자 간 건가?"

"그, 그런듯 싶습니다."

최악이었다. 분명 마교의 명확한 입장을 파악하기 위해 누군가를 파견할 계획이기는 했다.

하지만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보내야할지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어쩌다 지시가 내려갔는지 맹주의 손녀인 황보효선이 마교로 출발한 것이다.

차라리 어린 아이를 보내고 말지, 황보효선만큼은 안 될 일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의감이 들끓는 그녀가 갔다가는, 마교 교주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라는 말을 뱉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설마 그러겠어?'

설마, 설마 싶다가도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여기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정사대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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