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41화 (141/383)

밀푸색마 EP.141 혈마가 왔다고? (2)

"혈마가, 왔다고?"

일장로가 보내온 수하가 비밀스럽게 올린 보고에, 교주는 미간에 손을 짚었다.

옆에 시립한 딸의 얼굴을 힐끗 보니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젠장, 직접 눈으로 본 사람 말을 믿었어야했는데...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교주는 잠시 딸을 응시하더니 무릎을 꿇고 있는 수하에게 말했다.

"앞으로 오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한나절 정도 뒤면 총단에 당도할 듯합니다."

"그래..."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교주는 다시 딸을 보고 말했다.

"그래도 오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구나. 그 노인네가 무슨 생각으로 여길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도달해야할 목표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교주, 무의미한 충돌은 곤란합니다."

교주는 묵묵무답, 그저 웃으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영호경은 일장로의 수하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동문으로 오고 있느냐?"

"아닙니다, 일장로께서 남의 시선을 피하는데는 북문이 좋지 않을까 하셔서..."

"그렇구나."

영호경은 가슴이 뛰었다. 혈마의 행방이 묘연하기에, 당장은 제자와 연을 만들어두는 선에서 그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혈마와 대면할 자리가 성사될 줄은 몰랐다.

갑자기 성사된 자리에서, 대체 뭐라 말해야할지 생각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자가 만족할만한 조건이 뭐지?'

아버지인 교주는 이미 만나본 적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 혈마에 대해서 세인들이 아는 것은 얼마 없다.

아마도 천하제일고수일 거라는 것. 그리고 정사를 가리지 않고 미색이 고운 처녀라면 범하는 색마라는 것.

행적으로 보아 지극히 파렴치한 자일 것이라는 점만은 사실이었지만, 세력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뭘 줘야하는지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처녀를 제공할 수도 없을 뿐더러, 스스로가 원한다면 억지로 취하는 것이 가능한 상대에게는 교섭조건조차 될 수 없다.

거기까지 결론을 내렸을 때, 영호경은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설마?'

기분좋게 웃고 있는 교주가 실은, 이미 혈마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래서 방해될 일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거라면?

"...가봐야겠어요."

"그래, 다녀오거라. 네가 부른 손님이니, 잘 대접할 거라고 믿으마."

태평하게 손을 팔랑여 그녀를 배웅하는 교주를 일별한 영호경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동행한 것을 보면, 혈마는 제자를 꽤나 아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혈마 본인이 안 된다면 제자다. 반드시 혈마의 제자가, 명교의 손을 잡도록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봐, 그녀가 알아낸 범주 내의 정보에 따르면 강윤은 마치 청정한 도인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주변에 동년배의 여자라고는 없으니 여색을 탐한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재물을 탐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알아내리라. 스승이 되었든 제자가 되었든, 반드시 원하는 것을 알아내서 억지로라도 쥐어주고야 말리라.

강윤이 그녀에게서 가장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영호경이었다.

"와... 크다..."

기암절벽을 천연의 성벽삼아 만들어진 마교의 총단은 마치 일개 성을 보는 듯한 규모였다.

당가, 팽가, 소림을 모두 가보았지만 이만한 규모를 가진 곳은 단연코 없었다.

단일세력으로는 무림 최강이라는 명교의 위세가 실감이 났다.

내 솔직한 감상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일장로가 하얀 천을 내밀었다.

"그럼 두 분, 죄송하지만 이걸 써주시지요."

"이건...?"

"두 분을 초청한 것은 아직 본교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 웃기는군. 그래서 가까운 동문이 아니라 북문으로 길을 잡은 것이었나?"

사부가 불쾌한 웃음을 터뜨리자, 일장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협께서 본교에 왔다는 사실을 알면 덮어놓고 날뛸 자들도 있는지라..."

아, 역시 마교 처자도 따먹어서 그런가. 하지만 사부는 당당했다.

"마교는 힘이 전부인 곳 아닌가? 자기들이 약해서 당했으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대협께서 본교에 입교하시기만 한다면 그 자들은 모조리 입을 닫겠지요."

"..."

"...이렇게 쓰는거 맞습니까?"

입을 다물어버린 사부를 대신해서 내가 천을 받아들고 머리에 썼다. 사부 역시 내 손에서 천을 낚아채서 나와 비슷하게 얼굴을 가렸다.

일장로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일장로쯤 되는 위치면 지나가면서 '명교 천세! 천천세!' 같은 소리는 들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원래 안 하는 건가?

[여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한편 사부는 여기로 온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지 가끔 내게 전음을 보내며 마교 총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는 세가나 문파와 비교할 곳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을 그 자체.

광대한 규모에 비해서 안에 밭까지 만들어두고 있으니 오히려 군데군데 열악하게까지 보이는 곳도 있었다.

[이런 곳에 살고 있으면 중원을 침략하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느냐?]

[...살기 편하지는 않겠군요.]

마교라고 하면 모두가 전신에서 마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는 사악한 무림고수들만 사는 곳일줄 알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꼬질꼬질해보이는 아이가 입을 헤 벌리고 이쪽을 구경하는 모습을 보고 무심결에 손을 흔들어주자, 그 아이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의 어머니가 허겁지겁 아이의 팔을 잡아내리는 모습을 보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나니, 일장로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조용히 가야하는데..."

"아닐세. 어차피 저런 일반교도들이 본다고 해서 알아보는 것도 아니니."

그럼 왜 빤히 쳐다보고 있던 거지?

알쏭달쏭하게 여기는 와중에도, 마교의 중심부는 가까워져만 가고 있었다.

확실히 중심부로 갈수록 서서히 호화로운 건물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중 어느 건물 앞에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교주를 뵙습니다."

우리와 동행하던 마교 무인들, 특히 나이든 일장로까지도 일사불란하게 한쪽 팔을 가슴팍으로 들어올리며 영호경에게 인사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나와 사부만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이 되었고, 영호경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혈마, 이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명교의 소교주를 맡고 있는 영호경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되서 반갑네."

"다시 뵙습니다, 소교주."

인사를 나눈 다음 일장로를 제외한 사람들을 전부 물린 영호경은 곧 앞장서서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즉시 교주에게 안내할리는 없고, 우리가 지낼 곳을 안내해주려는 모양인데 그걸 굳이 두 사람이나 달라붙어서 해야되는가 싶기도 하고...

[미색이 제법이구나, 나이는 조금 있다만.]

[사부님...]

사부가 내 쪽을 힐끔대면서 전음을 보내왔다. 입꼬리가 씰룩대는 것을 보니 내가 왜 굳이 약속을 지켜서 마교에 오려고 했는지 알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해다. 분명 영호경과 떡을 칠 기회가 온다면 나는 분명 발기를 참을 수가 없겠지만, 상대는 마교 소교주다.

치는 것도 문제지만 어찌어찌 떡을 치는데 성공하더라도 잘못 떡을 쳤다가는 마교의 사위가 되서 중원무림 침략의 첨병이 된다는 말이다.

'난 이상한 소문이 퍼질까봐 막으러 온 거지, 절대 영호경과 떡치러 온게 아니다!'

약속을 어겼다가는 정말로 '손룡 강윤은 혈마의 제자이며, 본교와 밀월관계에 있다' 같은 선언이라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무사히 돌아가서 다시 밀프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여기서 어떠한 빌미도 주지 않고 시간만 때우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난 여기서 머무는 기간동안, 색욕을 끊어낸다. 모든 것에 해탈한 부처가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니 모든 것은 곧 공이다! 무의미한 욕망에 매달리는 것은 곧 인세의 행복과 멀어지는 지름길인 것이다!'

하지만 앞장서서 걸어가는 영호경의 엉덩이는 욕망을 끊어낸 내 눈에도 여전히 탐스러웠다.

지금의 마교는 둘로 갈라진 상태였다.

일장로로 대표되는, 명교천하를 위해서는 잠시 웅크리고 있어야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이 하나.

이장로로 대표되는, 명교의 전력이 압도적인데 굳이 웅크릴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이 또 하나.

물론 그들 모두가, 표면적으로 교주에게 충성을 다했고, 교주의 의향에 따라 조용히 힘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팽가 습격과 같이 교주의 명을 어기고 몰래 정파무림에 다툼의 씨앗을 뿌리고 싶어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들의 눈은 명교 곳곳에 퍼져있었고, 기어코 일장로가 외부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몸을 가린 자 둘... 나머지는 분명 본교의 사람이 맞느냐?"

"틀림없습니다, 정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기는 합니다만, 전원이 일장로 휘하라는 것까지 확인되었습니다."

"아, 그놈들이로군. 일장로도 참 사람이 좋아... 그런 것들까지 거두고 있다니."

그리고 그 사실은 지체없이 그들을 대표하는 이장로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아마 그렇게 비밀로 감추고 있더라도, 결국은 교주께는 보고를 올리겠지."

전대 교주 시절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다해온 일장로라면 틀림없을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교주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라는 의미.

"예, 그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소교주께서 그들과 접촉하신듯 합니다."

"소교주께서?"

소교주, 영호경이 언급되자 이장로는 불편한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근 들어 부쩍 이장로와 거리를 두게 된 그녀의 행보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소교주께서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실 줄은 몰랐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 팽가 사건은 이장로가 제법 공을 들인 일이었다. 설령 이장로의 속셈을 알아차리더라도 틀림없이 소교주는 도절 팽무도의 목을 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덕분에 팽무도 뿐만이 아니라 제법 눈에 걸리적거리던 손룡이라는 애송이의 숨통을 끊어놓지도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그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봐. 교주전에 머무른다고 해도, 하다못해 시비든 뭐든 매수해서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알아내."

명교에 흔치 않은 외부인, 갑자기 바뀌어버린 소교주의 행보, 그들을 직접 맞이하러 나간 일장로.

냄새가 났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소교주가 이장로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교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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