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37 태어났으려나? (3)
생각이 짧았다. 이걸 생각하지 못했다니.
"이렇게 또 아이가 생길 줄은 몰랐구려."
"정말 그래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가 임신 2개월이 지나갈 무렵, 드디어 몸이 반응해서 임신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가에서 약천각주가 직접 와서 어머니의 임신을 확언해주었고, 다들 축하세례.
섬서에 있는 고가표국으로 아버지에게 연통을 넣어 소식을 전했는데, 애처가인 아버지가 한달음에 달려와 어머니를 데리러 온 것이다.
"당가에 와서는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게 다 팽 여협 덕분입니다."
"별 말씀을... 그냥 동생이 마음을 잘 다잡아준 덕분입니다. 고 국주께서 잘 지탱해준 덕도 있고요."
"제가 뭘 했겠습니까. 다 아들 하나 잘 둔 덕이죠."
팽연화의 공치사에 아버지가 내 등을 철썩 쳤다.
"윤아, 정말 너는 같이 안 가겠느냐? 표국을 이어받지는 않더라도, 식구들과 안면을 익혀두는 정도는 하는 것이 좋을듯 싶은데..."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따라가겠습니다."
"의원을 한다고 했더냐? 생각은 나쁘지 않다만..."
아버지는 묘하게 섭섭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은 이후로 나는 더 빨리 의원을 차려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어머니가 임신 4개월이 될 때가 되면, 나는 마교로 출발해야한다.
애초에 의원에게 물어봤다가는 임신중에 방사라니 미쳤냐고 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잡은 안정기, 즉 섹스해도 되는 시기가 4개월이다.
여유있게 한 달을 남겨두고 출발한다고 해도 며칠 정도는 보테배 섹스를 진하게 할 수 있을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아비에게도 말을 하거라. 아비도 의원 중에 뛰어난 사람을 몇 알고 있으니."
아버지는 그런 내 생각을 알 리가 없었기에, 걱정 섞인 말을 건넬 뿐이었다.
'마교에서 다녀오면 일단 섬서부터 간다...!'
한편 어머니는 내 눈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짐작한듯 싱긋 웃었다.
[아들, 몸조심해야한다? 어미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거, 알지?]
[그럼요, 평생 제 배만 불리면서 살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일 다 보면 바로 표국으로 갈게요.]
벌써 몇 달이나 전, 가짜 아들일 적에 했던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나눈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당가를 떠났다.
"휴우..."
어쩐지 속이 헛헛했다. 나중에 다시 볼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배가 꺼진 것처럼 텅 빈 감각이 느껴지는 것이다.
언소영도 나를 배웅하면서 이런 느낌이었을까?
"자, 들어가세."
나를 데려가는 팽연화도 곧 당혜원이 있는 안가로 옮길 예정이었다.
명분은 제자뻘인 내가 의원을 모아 의료원을 차리는 것을 도울 겸, 외유를 나갔다온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일반적인 가모와는 달리 안살림을 대체로 각주들에게 맡기고 있었던 팽연화는 굳이 인수인계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같이 지내다가, 임신 만 3개월이 되면 마교로 출발하겠지.'
애는 가지게 해놓고서, 자꾸 자리를 비우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당혜원도 그렇고, 팽연화도 그렇고.
내가 가기 전에 당혜원은 아이를 낳겠지만 당연히 낳는다고 끝도 아니기 때문에, 가기 전에라도 최대한 도와주고 가야지.
"어머니, 강 소협, 여기에 있었군요."
팽연화의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느새 팽연화의 딸 당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당 소저, 무슨 일입니까?"
"다른 일은 아니고... 어머니께 몇 가지 여쭐 것이 있어서..."
그리고 팽연화를 붙잡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팽연화가 없는 동안 세가의 안주인 노릇을 하느라 걱정이 많아보였다.
그래도 이번에 돌아와서 당영의 덕을 많이 보았다.
구룡이란 타이틀을 달았다는 사실 때문인가, 당영의 육촌뻘 자매들이 은근히 내게 말을 걸어오면서 작업을 치는 일을 종종 겪은 것이다.
다들 꽤 예쁜 아가씨들이었지만 밀프충한테 그런게 눈에 들어올리가.
그 와중에 당영이 끼어들어서 적절히 실드를 쳐준 덕에 어색하지 않게 도망칠 수 있었으니,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보름에 한 번 정도, 이재각주가 간략히 정리한 세가 내 재정 출납내역을 올려오는 것만 잘 확인하면 된단다."
"알겠어요..."
"소저, 미안합니다. 제가 팽 여협을 데려가는 바람에..."
"아, 아니에요! 그냥 제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당영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팽연화랑 닮은 무뚝뚝한 얼굴로 가끔씩 보이는 수줍음이 많은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나한테 말을 걸어오는걸 보면, 역시 어머니랑은 상관없이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게 분명해.'
종종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내가 곤란한 상황에 도와주는 당영은 이제 여사친...? 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성격도 괜찮고, 팽연화의 딸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아요... 아가씨..."
"응? 왜?"
당영은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이제 제법 강윤과도 매끄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은 생겼다.
육촌 자매들과는 대화조차 꺼려하는 반면, 자신과는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가장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닐까?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시비, 유하의 의견은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강 소협의 태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안 느끼셨어요? 편해도 너무 편하잖아요."
"그야, 그만큼 나한테 호감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니?"
"그야 호감은 당연히 있겠죠. 문제는 그게 여자로서의 호감이 아니라는 거죠."
"여자로서의 호감...? 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남자란 말이죠, 잘 보이고 싶은 여자 앞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게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유하의 말이 이어질수록 당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갔다.
그야 조금 정도는, 자신이 여성성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래서 강윤에게서 여자 앞에서 잘 보이고 싶어하는 태도가 조금, 조금 정도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하의 설명이 길어져 '남자를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는 말이 나왔을 때, 당영은 못 참고 반박했다.
"내, 내가 그렇게까지 못난 것은 아니지 않니? 응?"
"미색이 전부가 아니죠... 중요한 건 사내가 여인을 보고 설렐만한 매력 아니겠어요?"
"매, 매력...?"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설명에 당영은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허둥댔다.
자신의 옷이나 화장은 시비들이 골라준 것이었다. 특별히 남들에 비해 월등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빠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당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유하의 말이 이어졌다.
"복색이나 화장도 중요하지만요, 그걸 드러내는 표정? 언행? 같은 것도 적지 않게 중요하답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건..."
주변의 시비 언니들이 연애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아온 유하의 설명을, 당영은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그 열의가 과연 빛을 보는 날이 올 것인가. 적어도 당영은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아..."
팽연화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강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딸은 역시 강윤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미가 되서...'
딸이 마음에 품고 있는 남자를 빼앗은 격이 되고 말았다. 아니, 사실을 따지자면 남자 쪽에서 먼저 덤빈 것이긴 하지만.
"왜 그래요?"
당혜원의 안가 근처까지 온 남자는, 이제 거리낌없이 손을 잡아왔다. 아마 딸의 소극적인 성품을 제대로 모르는 남자로서는, 짐작도 못할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기도 좀...'
아마 실패로 돌아갈 딸의 연애사업을 말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고민하던 팽연화는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사내에게 대답할 기회를 놓쳤다.
다가오는 두 사람을 알아본 머슴이 급하게 달려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마, 마님께서...!"
당혜원의 해산이 가까워졌다는 머슴의 말에 허겁지겁 달려간 두 사람은 곧 당혜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혜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려는 강윤의 팔을 팽연화가 붙들었다.
"이거 놔요!"
"자네가 가면 방해만 돼!"
"옆에서 손만 잡아줘도..."
"안 된다니까!"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허둥지둥하는 남자를, 팽연화는 억지로 붙잡아두느라 애를 먹었다.
붙잡혀있는 동안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자, 팽연화는 입을 열었다.
"아이를 낳는 동안은 집중해야 오히려 빨리 끝낼 수 있네. 자네 표정을 봐. 그렇게 염려하는 표정을 보고서 아가씨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강윤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마치 일그러진 얼굴을 평평하게 펴려고 하는 듯했다.
하지만 손이 지나간 다음에도 여전히 얼굴은 엉망이었다.
"연화... 연화도 저렇게 아플까요?"
"아프겠지."
아이를 이미 둘 낳은 그녀였지만 아프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당연히 없었다.
"아파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고... 비명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나?"
"...사실 그래요."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나도, 아가씨도, 아플 것을 알고서도 낳기로 한 거니까..."
"...하아..."
팽연화의 말로는 위안이 되지 않는지, 강윤은 다시 눈두덩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생각보다 많이 답답한 일이네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지는 않지. 아이가 태어나면,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주는게 남편의 일이야."
"...그럴까요...?"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는지, 강윤은 당혜원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수차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기를 두 시진, 산모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곧 새로운 울음소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아, 아기! 아기 태어난 것 맞죠?"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허락은 받고 들어가게."
에둘러 표현한 긍정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강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팽연화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때의 남편이 어땠을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 저 남자처럼 안절부절 못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가, 네가 태어날 때도 분명 아빠가 기뻐해줄 거란다.'
아직 의원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미 달거리는 오지 않고 있었다. 틀림없이 자신의 뱃속에는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리라.
배가 불러옴에 따라 남자는 기뻐할 것이고,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는 오늘처럼 근심해줄 것이었다.
팽연화는 아이가 태어날 그 날이, 자신의 어린 남편이 안절부절 못할 그 날이 못내 기다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