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27화 (127/383)

밀푸색마 EP.127 소협, 괜찮은가? (2)

"소협... 윽..."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엉켜있던 내 눈에, 몽아가 입을 열다 말고 어깨를 감싸쥐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이런 생각에 붙잡혀있어봤자 좋을게 없다. 일단 움직여야한다.

"사태, 금창약은..."

"지, 짐 안에..."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몽아의 짐을 뒤져 금창약을 꺼냈다.

몽아가 살짝 옷을 걷어 어깨를 드러내자, 피를 빨아들인 옷 너머로 하얀 어깨가 보였다.

깨끗한 헝겊을 꺼내 피를 닦아내고, 주변의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고 금창약을 발라준 다음 헝겊으로 싼다.

"고맙네..."

"아닙니다. 사태께서 절 도와주시느라 이렇게 된 거니까요. 오히려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몽아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보다 훨씬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옷을 다시 입는 몽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급하게 풀어헤친 몽아의 짐을 다시 역순으로 쌌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기절시킨 놈들을 다시 깨울 생각이 들었다.

우선 가장 아는 것이 많을 절정고수의 마혈을 짚은 다음, 맥문으로 진기를 거칠게 밀어넣어 고통을 주어 일으켰다.

과연 정신을 차린 절정고수는 멍한 눈이었다가, 곧 증오스러운 시선으로 날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 네 이놈...! 으윽..."

"입이 험하네."

나는 인정사정없이 절정고수의 명치를 짓밟았다. 아마 아까 몽아한테도 맞은 부위니까 어지간히 아프렷다.

"저기 저 친구들이 다 불었어. 당신들이 소문 퍼뜨려서 이쪽 사태님 고생시키는 것 맞지?"

"뭣...?"

절정고수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다 내 얼굴을 보고, 표정을 재빨리 바꾸었다.

"너, 넘겨짚지 마라!"

"넘겨짚는 건지 아닌지는 얘길 해보면 아는 거고."

사실 넘겨짚는게 맞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만한 재료는 있었다.

사람들이 제법 있는 곳에서는 카더라를 들은 조무래기만 공격해오는데,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제대로 공격해온다는 것 자체가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이번만이 아니다. 사천에서도 이 녀석들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공격해왔다.

뒤에서 실을 잡아당기는 놈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소협...]

[사태께서도 이 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짚이는 것이 있다거나.]

몽아는 잠시 내 쪽을 응시하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자네 좋을대로 해주게.]

[알겠습니다.]

"저기 저 친구들은 무림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말고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안 해주던데. 그래서 당신을 깨운거야."

"...정말 넘겨짚은 것이 맞았군."

"아, 들켰나?"

절정고수는 표정에서 당황을 씻은듯이 지워내고 뭘 당해도 절대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심문을 해야되나, 어떻게 해야되나 고민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뭐가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하늘.

"사태, 날씨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우선 내려가죠."

"알겠네."

몽아 역시 그것을 알았는지 즉시 몸을 일으켜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몽아의 짐을 들어올리다가, 눈 위에 뭔가가 떨어져있는게 보였다.

'아, 급하게 열다가 떨어뜨린 건가보네.'

나무로 된 구슬들이 줄 하나에 엮여있었다. 아무래도 몽아가 탄지공에 쓰는 나무구슬을 보관해둔 듯 싶었다.

쉬이이잉

이제 본격적으로 바람이 거칠어지고,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일단 급한대로 구슬들을 내 품 속에 밀어넣었다.

"이, 이봐! 어딜 가는 것인가!"

"내려가야지. 여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진짜 얼어죽을 것 같은데."

"나도..."

난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렸다. 아마 자기도 데려가라고 말하려고 했을 절정고수는 수혈을 짚여 잠이 들었다.

뒷일은 곤륜산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

어깨를 다쳐 몸놀림이 원활하지 않은 몽아를 데리고, 나는 곤륜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빠르게 내려갈 수가 없었다. 몽아는 어깨의 부상 때문에 내력의 수발이 원활하지 못했고, 나는 눈 덮인 산에서 뛰는 것에 익숙치 않았다.

날씨 때문인지 해도 일찍 저물 것 같은 것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사태, 어쩌면 산에서 밤을 보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내려가면서 주변에 눈보라를 피할 곳이 있는지를 확인해봐야겠군."

점점 하얗게 뒤덮여가는 시야는 주변을 알아보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찾아헤맨 끝에 간신히 건물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제묘인가..."

민간에서 인기 좋은 신령인, 관우를 모신 사당이었다. 사방 1장 정도의 좁은 공간에 관우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것이 보인다.

"하루만 머물다 가겠습니다..."

일단 먼저 들어온 나는 조심스럽게 위패를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짐을 풀었다.

일반적으로 관제묘는 여행객이 자고 가는 경우까지 고려하여 화로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여기는 화로 따위는 없었다.

아마 곤륜산까지 올라와서 관제묘에 머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아닌가 싶었다.

주변에는 태울 것도 마땅치 않았고, 잘못 태우면 화재가 날 것도 같았기에, 나는 우선 헝겊을 꺼내 몽아에게 건넨 다음 내 몸에 난 땀을 닦았다.

몽아 역시도 내 쪽에서 몸을 돌리고, 몸에서 난 땀을 닦아냈다.

그렇게 땀이 말라서 체온을 빼앗아갈 위험을 피한 다음, 우리는 다시 옷을 껴입고 바닥에 앉았다.

'벽이 있으니까 조금은 견딜만하네.'

나무로 만들어진 벽은 틈새로 바람이 새어들어왔지만, 내력을 조금 끌어올리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투 중에 상당량의 내력을 소모한 상태라는 점.

'개새끼들.'

복면인들은 다들 잠을 재워뒀거나 기절시킨 상태였으니 추위로 이미 동사했을 것이다.

그놈들이 어줍잖은 공격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

운기행공으로 내력을 회복해보려고 했지만, 사방이 눈보라로 휩싸인 상태라 그런지 필요한 천양지기는 거의 모이지 않고 현음지기만 줄기차게 모여댔다.

주변에 양기가 부족하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 역시 한정적인 것이다.

'개새끼들.'

게다가 바쁘게 움직일 때와는 달리, 가만히 앉아서 체온을 보존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으니 내가 죽인 녀석들이 다시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분명 먼저 손을 써온 것은 그 쪽이었다. 맞서지 않으면 당할 것이었고, 죽이지 않으면 언제고 또 찾아올지 모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계속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장 추위에 덜덜 떨만큼 끔찍하게 내력이 부족하지는 않다.

'개새끼들.'

계속해서 머릿속에, 내 장력에 바짝 구워져버린 놈, 턱을 맞아 눈을 훼까닥 뒤집고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복면을 적시며 죽어가던 놈이 떠오른다.

데려가달라고 나를 애타게 부르던 절정고수의 목소리도.

너희가 나쁜 거잖아. 왜 날 죽이려다 실패한 주제에 뻔뻔스럽게 살려달라고 하는 건데.

'대체 왜...'

덥석

"사태...?"

죽인 놈들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와중에, 갑자기 내 손을 잡아오는 몽아의 손길에 내 생각이 끊겼다.

몽아는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상대에게 손을 쓰는 모습만 보아도 몽아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이 남자는 상대에게 살수를 처음으로 써본 것이다.

그 기억이 이제야 머릿속을 괴롭히는지, 남자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떤 기억을 곱씹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이 저도 모르게 안쓰러워져서, 몽아는 손을 뻗고 말았다.

"사태...?"

남자의 손은 후끈했다. 그녀 역시 내력의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사내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기분좋았다.

"뭐, 뭔가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어떤 일이든 상관없네. 이대로 집중이 풀려 잠이 들기라도 하면 위험한 상태가 아닌가 싶어서 말일세."

사내는 곧 수긍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다.

제갈미령과 동행했던 여정에 관한 이야기, 구룡쟁패에서 있었던 일...

하지만 문득 몽아는 상대가 자신의 남편에 대한 화제를 철저히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 역시도 별로 언급하고 싶은 화제는 아니었지만, 막상 떠올리고 보니 남편과의 기억이 뇌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유매, 사람은 모두가 연결되어 살아가는 거야. 남을 도우면 그건 분명 보답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

그러고보니 남편도 그랬다. 기어코 오지랖을 부려서 남일에 참견을 하고는 했다.

분명 열에 아홉은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보답이 돌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어느날,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한 결과 남편이 목숨을 잃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보니 눈앞의 이 남자의 장래가 괜히 불안해졌다.

'역시 돌려보내야겠어.'

첫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남자 자체를 싫어하게 된 그녀의 시각에서, 묘하게 자신의 몸을 살피는 것 같은 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몽아의 착각인듯 했다. 다시 살펴본 남자의 눈은 오히려 적개심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기녀를 들여 관계하는 모습까지 봤을 때는, 정말...

'그, 그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그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몽아도 완전히 깨끗하지는 않았다.

교접하는 소리를 훔쳐듣고 몸이 달아오른 결과 뒷구멍을 만지작댄 끝에, 절정까지 하고 말았으니.

게다가 지금 봇짐 안에 들어있는 '그 물건'은...

붕붕

사내가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않고 고개를 힘껏 도리질쳐 생각을 떨쳐낸 몽아는, 아무튼 사내에 대한 평가를 재조정했다.

어려움에 처한 남을 외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협의가 무엇인지 아는 정파의 협객이라고.

행실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런 청년이 남편과 같은 최후를 맞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태... 추우십니까?"

그렇게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던 몽아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한편 깊이 생각에 잠겨있던 덕에 정신은 또렷했지만, 추위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손만 잡고 있어도 따뜻하다고 느꼈지만, 두 사람은 서서히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자, 자네는 괜찮은가?"

몽아는 말이 떨려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저, 저도 아무래도 멀쩡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몽아는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기함했다.

글렀다. 이 남자는 역시 글러먹었다.

몽아는 고작 오지랖이 넓다는 점 하나를 보고서 남편을 떠올려버린 것에 죄책감을 느껴버릴 지경이었다.

"나, 나더러 옷을 벗으란 말인가?"

"예."

정말,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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