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26화 (126/383)

밀푸색마 EP.126 소협, 괜찮은가? (1)

"사태."

"왜 그러는가?"

"눈이 쌓였네요."

"그렇군."

나와 몽아는 멍하니 곤륜산을 올려다보았다.

해발이 높은 산 위에는 당연히 눈이 더 잘 쌓인다. 추우니까.

지금은 초겨울이었기에 눈이 제법 수북하게 쌓였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돌아가시죠."

"단단히 준비를 하고 가면 괜찮지 않겠는가?"

몽아는 고집을 부리는듯 했지만, 시전의 상인들이 뜯어말린 결과 몽아 역시 포기했다.

단순히 든든한 겉옷과 밧줄을 사려고 했을 뿐인데도, 상인들은 귀신같이 곤륜산에 오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알고보니 무림인이랍시고 객기를 부리다 불귀의 객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대체 곤륜파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고 있을까...?'

곤륜산맥은 상당히 멀리까지 이어져있는 모양이라 곤륜파 사람들이 사는 곳은 우리가 있는 곳과 다르다.

"천무는 신선이 있는 산에 있다...?"

단서의 내용도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이런 내용만을 믿고 산 전체를 뒤질 생각을 했는지...

알고보니 무당산도 그리 깊이까지 찾아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離)로 들어가 건(乾)으로 나오는 곳, 그 곳에서 구궁의 비밀을 풀 수 있다면 천무를 얻을 수 있나니..."

팔괘에서 이괘는 불, 건괘는 하늘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괘는 정남쪽, 건괘는 북서쪽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찾으실 계획이셨습니까?"

"이로 들어가서 건으로 나올 수 있다면 남쪽과 북서쪽이 비어있는 지형에 있지 않겠는가?"

하긴 그렇다. 일단 들락거리려면 뚫려있어야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산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위성 카메라도 없이 방향을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다는게 문제인데...

내 생각에는 적어도 몇 달, 심하면 몇 년은 뒤져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만약 이게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가...?"

몽아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 그럼, 초입까지만이라도 올라가보면 어떻겠는가? 일단 보기만이라도... 안 되겠는가?"

"뭐, 보는 것 정도라면..."

여기까지 와놓고서 그냥 돌아가기는 아쉬웠는지, 산세라도 보자는 말에 나는 동의했다.

사실 산세 한 번 본다고 해서 짐작이 갈리가 없지만, 아쉬움이라도 털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옷을 단단히 껴입고 곤륜산을 올랐다.

곤륜산의 초겨울은 정말 끔찍하게 추웠지만 내공의 힘이 더해지니 옷을 든든히 입은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이런 곤륜산에서 겨울을 나는 곤륜파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리는 어느 정도 올라가다 산세가 명확히 보이는 지점에서 멈춰섰다.

"과연 신선이 있다는 소리가 나올만 하네요."

중국 설화의 곤륜산처럼, 끔찍하게 험해서 신선 밖에 못 살 산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었으니.

그렇게 산세를 살펴보아도 사실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는 몽아가 충분히 살폈는지 지켜보다가 이제 슬슬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응?"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불청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몽아는 어느새 탄지공을 사용하기 위한 나무구슬을 꺼내들었다.

흑의인이 다섯. 지난번에 쫓아낸 녀석들과 비슷한 복장 같았다. 흑의는 원래 거기서 거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손을 들어올리며 상대와 맞설 준비를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에 입을 열었다.

"뭐하시는 분들이십니까?"

흑의인은 말없이 검을 뽑아 내 쪽을 향해 겨누었다.

다섯 사람 모두가 검을 쥐고 있었는데, 지난번 내가 끼어들었을 때에 비하면 기세가 좀 더 뛰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천무비경에 관심이 있습니까?"

쉬이이익

흑의인들은 두 패로 갈라지더니 공격해들어왔다. 내가 둘, 몽아가 셋.

일류로 보이는 이인조 가운데 한 명의 검은 영활하게 움직이며 내 요혈을 노리고 찔러들어왔다.

반면 다른 한 명은 검을 휘두르기보다 내 공격에 대응할 생각인지 적절히 견제하는 선에서 멈추었다.

뱀처럼 흐느적거리는 검의 움직임에 나는 맞추는 것을 포기하고 우선 장력을 쏟아냈다.

압도적인 거력에 밀린 검격의 움직임이 둔해졌지만, 다른 한 자루의 검이 압력을 나누어받자 곧 다시 영활함을 되찾았다.

분명 한 줄기의 공격일텐데도, 그 뱀같은 느낌이 기분나빴다. 지력을 담은 내 손가락이 검 끝과 부딪히는 순간, 난 그 기분의 이유를 알았다.

그 검은 정말로 뱀처럼 움직인 것이다. 마치 내 손가락이 타고 올라가기 위한 작대기인 것처럼 그대로 내 팔을 타고 올라오며 나를 상처입히려고 했다.

나는 내 팔이 넝마가 되기 직전 반대쪽 손으로 탄자결을 실어 장력을 밀어냈다.

순간적으로 밀려난 검의 뱀은 다시 또아리를 틀며 나를 노리려고 했고, 그것을 다른 한 명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의 합격은 제법 능숙해서 피를 감수하기 전까지는 쉽게 뚫어낼 자신이 없었다.

한편, 몽아의 상황은 그래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저 나무구슬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력이 실린 탄지공은 상대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저쪽에는 절정고수가 한 명 끼어있는 것 같은데,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이상 숫자의 우위를 살리기 어려울 듯 싶었다.

아마도 나를 적당히 잡아두고 몽아부터 처리해서 끌고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잘못됐다.

나부터 전력으로 밟아놓으려고 했다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라면 싸워볼만하다.

음산한 검기가 안개처럼 주변을 흐릿하게 만들며 공간을 잠식해온다.

나는 그물처럼 얼기설기 엮인 검기를 손날에 내력을 실어 각각 양 옆을 내리쳤다.

형편없이 그물이 무너지며 빈틈이 생기고, 그것을 또 다른 한 놈이 메우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공격의 흐름을 즉시 방어담당에게 틀어 지풍을 짧은 간격으로 여러번 튕겨냈다.

마치 짠 것처럼 정확히 빈틈을 밀고 들어간 지풍이 놈이 반사적으로 일으킨 검막을 비단찢는 소리를 내며 뚫어냈다.

"이놈!"

말없이 검만 휘두르던 복면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격담당이라고 한가하게 둘 이유가 없지.

내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던 두 가닥 검기가, 내 이마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장력을 뒤로 쏘아낸 반동으로 몸을 눕히다시피해서 전진했기 때문이었다. 바닥이 눈으로 미끄러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움직임.

"크헉!"

멱살을 잡아 끌어내려진 복면인을 그대로 패대기쳐버리고, 나는 그놈을 손으로 딛으며 몸을 일으켜 방어담당 쪽을 향해 덤볐다.

"사형!"

사형? 사형제인가?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내 몸은 제법 몸에 익은 동작을 자연스럽게 펼쳐내며 빗장뼈를 손날로 내리찍었다.

"으윽...!"

부러지는 촉감이 손에 전해졌고, 방어담당의 검을 쥔 손이 축 늘어졌다.

넌 이제 내 밥이다.

하지만 안심하고 패기에는 일렀다. 등 뒤에서 공격담당이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나자마자 앞으로 몸을 굴렸다.

살벌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검의 존재를 느낀 직후, 나는 방어담당의 검을 빼앗아서 던졌다.

제대로 된 비검술도 배우지 못한 내 검은 허무하게 격추당했지만, 곧이어 공격담당이 흘리는 신음성이 내 기분을 좋게 했다.

"이, 이놈! 네놈이 그러고도 정파냐?"

뭐, 어쩌라고. 먼저 다구리쳐놓고 나는 고기방패도 못 쓰냐?

나는 방어담당의 목덜미와 허리끈을 붙잡고 그대로 공격담당을 향해 돌진했다.

"사, 사형!"

살려달라는 의미가 물씬 담긴 목소리는 효과만점이었다.

몇 번 보법으로 내 접근을 회피하던 공격담당은, 결국 방어담당을 무기삼아 휘두르는 내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방어담당을 던져버리고 그 뒤를 따라 달렸다.

"비열한 놈...! 크윽!"

공격담당은 방어담당을 받아내려다 실패했다. 몰래 방어담당의 몸에 실어보낸 내력이 묵직하게 팔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을 거다.

그렇게 두 명이 뒤엉킨 다음에야, 나는 바로 그들의 뒤통수를 내리찍어 기절시키는데 성공했다. 자, 이제...

"이노옴!"

아, 이런. 방심했다.

몽아를 몰아붙이던 세 명 가운데 일류고수 하나가 내 뒤를 찔러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몽아의 탄지공이 지원해준 덕에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탄지공을 날리느라 한 호흡이 비어버린 몽아는 상대 절정고수가 찔러낸 네 줄기의 검기 가운데 하나가 어깨를 스치는 부상을 입었다.

내 방심 때문에 몽아가 다친 것이다.

"하하, 어떠... 으악!"

내 뒤통수를 쳐서 기어코 몽아에게 부상을 입히게 만든 통수 놈.

나는 지풍과 장력과 권풍을 번갈아가면서 쉴새없이 한꺼번에 쏟아냈고, 내력에서 밀리는 통수 놈은 금방 열양장력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아마 죽었으리라.

"씨발."

의외로 첫번째 살인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결국 무림인인 이상,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언제고 일어났을테지만, 내 첫번째 살인이 이런 놈을 상대로 벌어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급박한 상황은 살인의 더러운 뒷맛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어깨에 부상을 입어 몽아의 탄지공의 위력이 급감해버린 틈에, 절정고수 놈이 열심히 몰아붙이고 있었다.

나는 신형을 날려서 즉시 나머지 일류고수에게 붙었다.

이놈은 아까 기절시킨 공격담당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듯, 제법 정묘한 검술을 펼쳤지만 혼자서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환의 묘리에 따라 펼쳐진 환상같은 검식이, 조법을 펼치듯 억지로 밀어넣은 손바닥이 뿜어내는 내력에 강제로 찢어발겨졌다.

"이런 무식한...!"

무식한 건 니놈이고요.

인정사정없이 강한 내력이 실린 일권이 벼락처럼 일류고수의 턱을 날려버렸고, 같은 순간 몽아의 탄지공이 절정고수의 명치를 맞춰 기절시켰다.

"젠장..."

분명 일류고수의 뇌는 내력에 진탕이 되서 죽었겠지. 이렇게, 나는 또 한 명 사람을 죽였다.

문득 내 주먹을 보니 피가 묻어있다. 속이 울렁거렸다.

"소협... 괜찮은가...?"

한편, 어깨를 다쳐 두터운 옷 위로도 희미하게 핏자국이 새어나오는 몽아가 나를 걱정스럽게 응시했다.

인적이 드문 곳. 사람 하나 죽이고 싶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곳이다.

아마도 몽아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뭔가의 수단으로 파악하고 죽이려고 덤볐겠지. 아니면 잡아가서 원하는 걸 뜯어냈을 수도 있고.

자업자득이다. 죽이려다 죽은 놈들일 뿐이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채 일어난 살인은, 오늘밤 꿈자리를 더럽게 만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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