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25 아는 거 다 말해 (2)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몽아는 기가 막혔다. 바로 얼마 전에 또 보자며 배웅하던 자가, 자신의 뒤를 밟았다니.
그것도 명색이 정파의 일원이라는 자가 아니던가.
"죄송합니다, 사태. 하지만 이 자들을 먼저 좀 손을 봐야겠군요."
하지만 남자는 뻔뻔하게 몽아의 말을 흘려들으며 산적에게 다시 물었다.
"이 분을 노린 이유를 말해. 정말 죽인다."
그러면서 기세를 개방해 상대를 압박하는데, 그 위세가 자못 대단했다.
내력만으로 말하자면 능히 몽아 자신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수위.
"그, 그러니까..."
계속해서 눈치를 보던 산적은 기어코 실토하고 말았다.
몽아는 산적의 입이 열리는 것을 막고 싶었지만, 막을 명분이 없었다.
"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소문이, 돌고 있다..."
"무슨 소문?"
"몽아라는 여승이, 천무비경의 소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소문..."
"난 처음 듣는데?"
"나, 나도 비밀스럽게 전해들은 거라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을 거다..."
몽아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오랜 세월 불심을 닦아온 아미파의 어른들조차 그 이름에는 탐욕을 감추지 못했다.
"거 이상하네."
"..."
"면전에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비밀정보를 안다고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무림인에게 무공이란 곧 가장 큰 재산이고, 천무비경이라는 이름은 어느 무림인에게나 가슴 뛰게 하는 이름이었다.
200여년 전, 천마와 싸워 이긴 검신 화천우의 무공이 실려있다고 알려진 비급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그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행동했다.
"나,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 손에 넣으면..."
"죽겠지. 당신보다 더 대단하고, 마찬가지로 비천무경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한테."
"...천무비경이다."
"...아, 실수로 잘못 말한 거야."
남자는 몽아에게 휙 고개를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알고 계신 것 맞습니까, 사태?"
"...모르네."
"겨우 이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태를 노리는게 전부구요?"
몽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를 희롱하다 박살난 자들이 원한을 품는 경우도 적지 않기는 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산적의 혈도를 내리쳤다.
산적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마혈이 풀린 것을 알고 도망치려고 했고, 남자는 다리를 걸어서 그것을 저지했다.
"가긴 어딜 가. 니들 다 줄 서."
남자는 지풍으로 산적들을 위협하면서 줄을 세웠고, 두목을 시켜 윗옷을 찢어 부하들의 손목을 결박하게 만들었다.
몽아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샘솟는 것을 느꼈다.
줄줄이 손목을 묶인채 20여명의 산적들은 무사히 관아에 인계되었다.
나는 정파인으로서 정의구현을 나한테만 떠넘길 거냐는 명분으로 몽아와 동행해서 청해성까지 들어왔고, 우리는 객잔에 들러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객잔에 딸린 별관에 빈자리가 있기에 거기에 상을 차린 것이다. 이걸로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문제 없겠지.
"왜 따라왔나?"
"사태께서는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보통 사람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는 집에서 안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행히 별 것 없는 산적들이었지만, 언제 위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돌아다니시라고 방치하는 건 조금..."
"그렇다고 뒤를 밟는다는 말인가?"
"저도 당가를 잠시 떠나있을 필요가 있었거든요."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설픈 핑계로 말이 꼬일 바에는 정면돌파를 하고 만다.
"소협의 뜻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그렇지만 그런 헛소문은 금방..."
"정말 그럴까요?"
천무비경.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이름도 그렇고, 부연설명이 따로 없는 걸로 봐서 누구나 알만한 대단한 무공비급이겠지.
중2병 센스 철철 흘러넘치는걸 보니 고금에서 손꼽히는 무공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동네방네 소문이 나있다면 모르지만, 일부만 아는 고급정보가 저런 산적한테 비밀스럽게 넘어간다는 상황 자체가 정상이 아니잖습니까."
난 굳이 따지면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라는 건, 누군가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차라리 구파나 오대세가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사태,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더 관여하려고 하지 말게. 자네도 위험해질 수 있어."
뜻밖에 건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지금까지 몽아의 목소리는 대개 퉁명스러운 것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따뜻하게 들렸다.
"문제가 있다면 아미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 않습니까?"
"...본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네."
환장하겠네.
"참견도 싫다, 아미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대체 어쩌시려는 겁니까?"
"...참견이 싫은 것이 아닐세."
응?
"자네는 강호의 은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몰라. 가벼운 마음으로 끼어든 일에서 어떤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모른단 말일세."
"..."
"자네의 뜻은... 옳아. 정파 무림인으로서,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 하지만..."
몽아는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아픈 기억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아미파는요? 문파의 도움을 받는 것은 소속원으로서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
헛웃음을 짓는 것을 보니 이것도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자네, 천무비경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떻던가?"
"와, 굉장하겠구나... 그 정도요?"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는 모르지만, 설령 등선공보다 대단한 무공이라도 딱히 나한테는 의미가 없었다.
등선공조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무학에 대한 이해가 내공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데 더 대단한 무공이라도 무슨 소용이겠어?
"자넨 그럴 것 같았네. 그 이름을 듣고 덤덤한 표정인 것을 보고 짐작했지만..."
"...그 말은, 아미파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군요."
이해가 간다. 문파가 문도를 보호해야한다면, 반대로 문도 역시 문파에 헌신해야한다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아미파가 천무비경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면 당연히 자기들이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면서도 정작 자파에는 안 돌아가시는 겁니까? 알지도 못하는 것을 요구하니까?"
"그래, 맹주만이, 이런 내 상황을 알고 있지."
검성.
사부를 못 물어뜯어서 안달인 또라이이기는 해도, 정파 사람들에게는 명망높은 대협이니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문파 일이니 대놓고 나서지는 못하고, 무림맹의 이름으로 몽아에게 이런저런 요청을 함으로써 바깥으로 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두번째로군요."
"...그런 셈이지."
꼬여도 개같이 꼬였다. 누군가가, 몽아가 아주 대단한 비급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
무림인이 보기에는 금은보화나 다를 것이 없는 물건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막상 몽아 본인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모른다고 해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는 개같은 상황.
"자, 그럼 이해했으리라 생각하네. 자네가 관여해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든 해보려는 생각은 사태께서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해까지 오신 이유가 뭐죠?"
"..."
몽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음을 굳힌듯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사실... 아무 단서도 없는 것은 아니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아미산에 입산하기 전... 내겐 남편이 있었지. 그 남편이 우연히 천무비경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손에 넣은 일이 있었네.]
지금은 죽고 없는 남편이 가지고 있던 단서를, 몽아는 그저 고이 가지고만 있었을 뿐이었지만 요 몇 달 사이 갑자기 그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 분이 가지고 계셨던 단서를 가지고 돌아다니고 계신다는 말씀이죠? 천무비경을 찾아서?]
[...그렇네.]
젠장, 천무비경 자체에 관심이 없으면 그냥 단서를 없애버리던가 남을 줘버리던가 할 것이지.
아무래도 남편의 죽음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하기 싫어서 하는 일이라면 앞뒤는 맞으니까.'
[그럼 다음 목적지는 곤륜산이란 말씀이군요.]
몽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북에서는 무당산을 갔던 것을 떠올려보고 찍었는데 맞춘 것 같다.
'같이 가자.'
마냥 밉상이던 몽아도 사정을 알고보니 다 나름대로 납득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도와주고 싶다. 남편과의 기억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나는 모질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사태, 그럼 지난번 여정에서 보았던 자들도 모두..."
"아, 그 자들은 거의 전부 나와 은원이 있던 자들이네만. 여승이라고 해서 상대를 가벼운 마음으로 희롱하는 자는 세상에 많다네."
...그렇다고 그걸 다 손봐주는 사람도 흔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역시 자업자득도 있는게 맞는 것 같다.
"그래, 혜아야, 어쩐 일이니?"
남궁혜는 기울였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서 자상한 미소를 짓는 어머니가 있었지만, 남궁혜는 그저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해야했다. 혼인에 집안의 어른이 끼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부자연스러우니까.
"어머니, 지금 황보세가에서 혼담이 들어왔어요."
"그렇구나."
언소영 역시 기울였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을 해준다는 건 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인데... 상대는 누구니? 만나는 봤고?"
"현 가주의 장남의 차남인 황보준 소협이에요."
남궁혜는 황보준의 얼굴을 떠올렸다. 산동에서 안휘까지 찾아온 황보준은,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다소 왜소한 체격이기는 했지만, 자상하고 배려심이 있어 나쁘지 않은 상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은 그리 혼인을 서두르는 추세가 아닌데, 꼭 지금 해야겠니? 천천히 좋은 상대를 찾아보는 것이..."
"아니요. 필요없어요."
남궁혜는 언소영의 말을 매정하게 잘라냈다.
어머니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보여주는 모든 모습이 그 날 밤의 모습과 겹쳐보였기 때문에 무심결에 매정한 말이 나왔다.
남궁혜는 언소영의 배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언소영의 배는 이제 굉장히 크게 부풀어,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보준을 선택한 것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다.
'그런 남자랑은 절대 같이 살 수 없어.'
짐승처럼 여인을 탐하는 그런 남자보다는, 자상하게 여인을 아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 선택의 결과가 황보준이었다.
"아마 몇 번 정도는, 그쪽 어른들과 만나뵈어야할 것 같아요."
"그래..."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어머니도 다시 대외활동을 할 수 있게 되리라.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남궁혜는 예전과 같은 눈으로 어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저 혼례만, 혼례만 치르면 된다.
그로써 남궁혜는 황보세가의 사람이 될 것이었고, 변해버린 어머니에 대해서 더 생각할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