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24 아는 거 다 말해 (1)
팽연화는 서류를 읽어내려가면서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제가 안긴 사내가 알고보니 사파, 그것도 천하제일마의 제자라는 것은 팽연화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히려 제갈미령이나 당혜원이 은근히 그를 감싸는 태도를 취한 것이 더 당황스러울 지경.
'내가 이상한 건가?'
들어보니 언소영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하지 않는가.
즉, 4명 중에 자신만 수용을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후우..."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팽연화는 곁에 걸어두었던 도를 집어들고 연무장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만약 제갈미령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시비의 음성을 들은 팽연화가 도를 다시 걸어놓으며 입실을 허가하자, 제갈미령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화 언니... 지금 바빴던거 아니죠?"
"바빴으면 들어오라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앉게."
제갈미령은 팽연화를 힐끔거리며 탁자 반대쪽에 앉았다.
팽연화는 내심 씁쓸했다. 20년 이상 서로 벗으로 지냈지만 이렇게 어색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많이 바쁜가봐요...?"
"원래 했어야했던 일을 지금껏 안 하고 있었을 뿐이야."
당조명은 팽연화가 세가의 일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팽연화가 지금껏 하지 않았던 일이 다시 그녀의 손으로 넘어온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팽가에 대한 지원을 진행할 것이 결정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일은 굳이 숨길만한 일이 아님에도 팽연화는 어쩐지 말을 아끼게 되는 스스로를 느꼈다.
숨겨야겠다는 생각보다도, 그저 제갈미령을 보고 있으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달랐을까.
팽연화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 소협이 날 속였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야."
"알아요."
"강 소협이 싫어져서 그런 것도 아니야."
"알아요."
맥락도 없이 변명하듯 늘어놓은 말에, 제갈미령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안다고 할 뿐이었다.
'안다고? 무엇을? 나도 왜 내가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혼란에 빠진 팽연화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미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이가, 잠시 당가를 떠나있고 싶다고 해요."
팽연화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덜컥 걱정이 되었다.
필사적으로 다잡은 목소리가 어쩐지 떨려나오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런가? 그럼 동생도...?"
제갈미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살며시 제 배를 쓰다듬었다.
꿀꺽
팽연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윤은 자신이 익힌 내공을 사용해 여인의 뱃속에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생기게 하는 대법을 사용했다고 했다.
언소영, 당혜원에 이어 제갈미령까지도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지금은 있다는 것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작겠지만.
"이 아이가 있으니까,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과보호가 지나치죠?"
"..."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언니."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려던 팽연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은 여전하다.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면 주책맞게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 품에 안겨있었을 때의 감촉을 상상하게 된다.
"언니는, 너무 성실해서 그래요."
"...무슨 말인가?"
"윤이를 긍정하는 것이, 혈마에게 당한 피해자들의 고통까지도 긍정해버리는 것이 되는게 아닌가 고민하는 거겠죠."
"...아니야."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실은 별 상관없는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매달리는 미련한 자신.
"언니, 언니는 그대로도 괜찮아요. 윤이도 언니가 계속 그 상태일까봐 걱정하지, 원망은 하나도 안 하던걸."
제갈미령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오자, 팽연화는 화들짝 놀라 손을 빼버렸다. 하지만 제갈미령은 여전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윤이가 없는 동안, 잘 생각해봐요. 언니 나름대로 답을 내면, 윤이도 분명 받아들일 거에요."
"...동생, 내가 더 오래 살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내가 언니보다 더 똑똑하잖아요."
제갈미령은 깔깔대면서 웃었다. 팽연화는 동생뻘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자신이 부끄러운 한편으로, 제갈미령이 고마웠다.
사내에 대한 애정은 틀림없이 남아있다. 팽연화는 분명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었다.
"소협, 다음에 꼭 한 번, 우리 도흥이와 다시 보세."
나 당신 동생이랑 별로 안 친한데...
곽청라는 그렇게 인사를 남긴 다음 이른 아침에 당가를 떠났다.
어쩐지 나중에 곽도흥이랑 만나게 되면 누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나와 친해지려는 모습을 볼 것 같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하지만 싸가지없이, 어머니에게만 인사를 건네는 몽아에 비하면 곽청라는 선녀였다.
"사태, 또 뵐 날이 있길 바랍니다."
"...그러세."
내가 각잡고 뒤를 밟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몽아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해준 다음 당가를 떠났다.
그렇게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파악해둔 다음, 나는 어머니에게 나도 떠날 것을 밝혔다.
이미 이야기는 해두었지만, 몽아가 떠난 다음 즉시 떠나려는 내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이야기인데, 몽아사태는 속세와 인연을 끊은 승려라는거, 알고 있지?"
"그럼요."
애초에 몽아 개인에게는 호의가 손바닥만큼도 없다.
굳이 따라가서까지 상황을 지켜보려는 것은, 첫째가 당가를 잠시 벗어나는 것이고, 둘째가 그녀의 처신이 너무 위험해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저렇게 사방팔방에서 덤비는 사람을 혼자 두고 잊어버리는게 나는 안 된다.
무림인들 기준에서는 과한 참견이겠지만 나는 일단 기본이 현대인이었으니까.
"아무 생각도 없으니까, 걱정마시고. 어머니는 연화나 좀 챙겨주세요. 많이 놀란 것 같으니까. 시간 있으면 혜원도..."
"못된 녀석... 그럼 가지를 말던가..."
어머니가 내 가슴을 툭 쳤다. 그렇다, 결국은 내 잘못이다.
마두의 제자 주제에 정파 밀프를 따먹으려고 애를 썼던 것도 그렇고, 그런 주제에 상황을 해소하지 못하겠으니까 바깥으로 나도는 것도 그렇고.
내가 나쁜 놈이고 내가 개새끼다.
폭
나는 주변을 잠깐 탐색한 다음 어머니를 가볍게 한 번 안고 떨어졌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안 봐요, 아무도."
그리고 슬쩍 손을 올려 어머니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 안에 우리 아기 있는거, 이제 알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적어도 4달을 채울 때까지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걸로."
"이젠 떨어질 낙엽도 없단다..."
말귀 못 알아들을 사람은 아닌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머니를 보자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키스라도 한 번 해주고 싶은데, 바깥이라는 것이 한이었다. 리스크가 포옹이랑은 너무 다르단 말이지.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작별을 고하고, 몽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급하게 떠난 것 같지는 않으니,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지.'
나는 신속한 한편으로, 조심조심 기척을 드러내지 않게 신경써가면서 이동했다.
성내에서는 당분간 인기척이 많으니 괜찮겠지만, 강한 기세를 느끼면 몽아도 의심할테니까.
성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는, 천천히 거리를 둬가면서 따라가면 될 것이다.
몽아의 동선은 단조로웠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를 수가 없을만큼 쭉쭉 앞으로만 나아갈뿐.
아마 이 방향으로 쭉 가면, 사천을 벗어나 청해성으로 가게 될텐데...
'청해성 쪽에는 곤륜파가 있지...'
지난번에는 분명 호북에서 무당파가 있는 쪽으로 갔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뭐지? 설마 다른 문파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건가?
'뭐하러?'
나는 풀숲 너머로 몽아가 길가에서 쉬는 모습을 관찰하며 생각했다. 위험한 몸이면서 왜 아미파로 돌아가지 않지?
"왜...?"
"왜는, 뭐가 왜야."
음?
가래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귀두도를 쥔 산적스러운 남자가 꼭 저 같은 남자들을 이끌고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하는 놈인지 모르지만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라. 저 중은 우리 거니까 건드리지 말고."
"...하."
생각해보면 무림에 와서 너무 굴렀다.
만나는 여자마다 최소 절정고수라서 따먹으려면 행운이 필요했고, 그나마 상대를 실력으로 압도할 기회라고는 구룡쟁패와...
'몽아와 같이 있을 때뿐이지.'
내가 헛웃음을 짓는 것을 본 산적은 날붙이를 위협적으로 붕붕 휘두르며 겁을 주었다.
칼질 연습을 제대로 하기는 했는지, 제멋대로 흐트러지는 투로.
그래도 내력이라고 할만한 것이 제법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류 끝자락에 간신히 걸친 실력 같은데 산적질이라.
"야."
"야?"
"아는 거 다 말해. 저 중을 노리는 이유가 뭐야?"
대가리가 있는 놈이면 강호에서 중을 상대로 산적질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가진게 있는 놈이면, 무림의 고수일 확률이 높고. 무림의 고수가 아니라면, 가진게 없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즉, 뭔가가 있다는 것.
"이런 미친 놈이, 어디서...!"
깡
제법 내력이 실린 산적의 도가 내 쪽으로 날아왔지만, 순간적으로 내력을 실어 날린 일권에 도 옆면을 얻어맞은 산적은 간신히 버텨서기에 급급했다.
도로 전해진 힘에 분명히 실력 차이를 느껴야함에도, 산적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지질 않는 것은 덤이었다.
"흐읍...!"
"말해, 새꺄."
손목이 꺾이지는 않았는지 제 손목을 주무르던 산적은, 내 말에 얼굴을 흉악하게 찌푸리더니 그에 어울리는 째지는 외침을 토해냈다.
"이 새끼, 죽여!"
아, 귀찮게. 주변의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게 칼을 휘둘러대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딱히 사람을 때리는 것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너무 힘자랑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어딜 베어들어오는지 너무나도 명확히 보이는 도.
제대로 하체의 힘을 싣지도 못한채 찔러오는 검.
아마도 양민일 시절 애용했을 투박한 도끼.
어떤 무기도 나를 상처입힐 수 없었고, 내가 빗겨낸 무기가 동료들을 다치게 할까봐 점점 공격들이 소극적으로 바뀐다.
정말 이런 어중이떠중이를 달고 다니는 몽아의 정체는 무엇일까?
"으윽! 놔, 놔라!"
나는 두목의 도를 빼앗아 바닥에 꽂아버리고, 마혈을 짚어 바닥에 패대기쳐버렸다.
제 부하들에게 안 돕고 뭐하냐고 윽박을 질러댔지만, 정작 부하들은 두목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슬금슬금 허리를 뒤로 빼며 달아나고 싶어했다.
"도망치는 놈부터 죽인다."
무림인이라고 하면 어감은 듣기 좋지만 본질은 깡패다. 제 사정 때문에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깡패.
난 사람을 죽인 경험이 없었고, 그 개시를 이런 산적들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산적들은 내 경고에 우뚝 멈추었다.
상황이 조금 정리되자 나는 바닥에 누운 두목에게 입을 열었다.
"야, 이제 말해."
"무, 무엇을..."
산적 두목의 목소리에 공포가 서렸다. 약간의 공포는 심문에 아주 좋다.
"저 중을 노리는 이유, 내가 아까 물어봤잖아."
두목은 딴청을 부려댔다. 내가 아직도 만만히 보이나? 나는 고문이나 폭행을 가할 필요도 없었다.
"야, 그 이유, 너 말고도 아는 놈 또 있지?"
"어, 없다."
순간 두목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분명 주변의 부하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음이 분명했다."
"여기서 내 질문에 대답해주는 놈 빼고 다 죽는다. 여기 일단 두목 녀석부터 죽이고, 모르는 놈도 죽이고, 다 죽일 거야."
죽인다는 말을 너무 입에 담아대는 것 같지만, 이런 놈들은 원래 제 목숨이 가장 귀한줄 잘 안다.
거리낌없이 죽인다고 말을 해야 오히려 빨리 대답하는게 살아남는 길이라는걸 잘 이해하겠지.
"자, 두목아. 이제 셋을 센다. 그 안에 니가 나한테 말 안 해주면 일단 숨통부터 끊어놓고 생각해볼테니까 잘 생각해."
"어, 어, 그러니까..."
대체 정보가 얼마나 귀중한지는 몰라도, 서서히 사혈을 향해 뻗어가는 내 손가락을 지켜보던 산적은 말을 계속 더듬었다.
"하나, 둘..."
"그, 그러니까..."
산적의 눈이 덜덜 떨리는데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죽여야되나? 싫은데.
"세..."
"무슨 짓인가!"
결국 셋을 다 셀 뻔한 순간, 타이밍좋게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아래의 길에서 휴식을 취하던 몽아가 어느새 올라와서 나를 씩씩대며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가면서 팼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게다가 난감한 일은 하나 더 있었다. 몽아는 내가 자기 뒤를 밟았다는 사실을 알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뭐라고 변명을 해야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