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120화 (120/383)

밀푸색마 EP.120 실은 제 사부가 (2)

몽아는 사내, 강윤의 등장에 내심 기겁을 했다.

사내와 더 같이 있는 것이 싫어, 황보효선이 부탁한 일임에도 억지로 떠나온 것이 아니던가.

'밤마다, 밤마다!'

기녀를 불러 배를 맞추던 그 모습이 또다시 몽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는 몽아, 그리고 같이 있던 여인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사태, 이번에도 괜한 참견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몽아는 사내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몽아도, 그녀의 동행자도 행색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무림의 은원을 가볍게 보고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그녀의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상대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 역시, 그녀의 처지에서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동행자의 안전까지 자신만의 아집으로 위협하는 것이 옳은 도리는 아니지 않은가.

"강 소협, 인사는 처음 하는군. 반갑네."

"...저를 아십니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몽아를 대신해 그녀의 동행자인 여인이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모르지. 하지만 화산 능 소협과 벌인 비무는 잘 보았네."

"선배께선 제 비무를 보셨군요.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한 번 스쳐지나가듯 보기도 했지. 자네 혹시 점창의 곽도흥이라고 아나?"

사내의 표정에 알겠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난 곽청라, 곽도흥의 손윗누이일세."

"아, 뵌 기억이 납니다. 다시 뵙습니다, 곽 여협."

사내는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곽청라는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도와줘서 고맙네. 사태께서도 경황이 없어 말을 못하신 거지, 사태께서도 감사하고 계실거고."

"괜찮습니다, 뜻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도왔을 일이니까요."

사내는 미소 걸린 얼굴로 몽아에게 고개를 꾸벅였지만, 몽아는 그것이 어쩐지 자신을 비아냥대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 사실일 터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

곽청라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몽아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그것을 곽청라가 돕다가, 여기까지 동행하게 된 이야기를.

"전에도 그러시더니... 대체 누구에게 원한을 사면 저런 복면을 쓴 작자들까지 옵니까?"

몽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원한을 사서 찾아오는 자도 있지만 아닌 자도 있다는 것을 굳이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곽청라에게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당가에 잠시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 저도 식객이라 많은 것을 해드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옷이라도 갈아입고 쉬다가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몽아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도움을 준 곽청라에게까지 찢어진 옷을 입고 자파로 돌아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 호의를 고맙게 받겠네."

두 사람은 제법 지쳐있던 탓에 강윤의 말에 함께 타기로 하고, 강윤은 신법으로 달려 따라가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셋이 타도 되지 않겠는가?"

"제가 말을 타본 경험이 적어서... 말로 표현드리기 어려운 곳이 조금 아프군요."

사내가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로 달리는 것보다 두 발로 달리는 것이 편할리가 없었다.

밤마다 기녀나 부르는 작자 주제에, 제법 여인을 배려해주는 체를 하는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아무튼 호의는 호의니까...'

승마에 좀 더 익숙한 곽청라의 등에 매달린채 사천 성내를 향해 달리는 몽아는 빨리 이 남자와 떨어지고 싶었다.

뜬금없이 구파 밀프가 사천 인근에서 나타났다. 우선 누가 되었든 밀프에게는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내 철칙.

몽아는 여전히 민머리를 한 채 내게 간간이 경멸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탈락이지만, 곽청라는 괜찮았다.

대략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키가 조금 작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묘하게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을 주는 미인.

'아으, 데려가면 어쩐지 바가지를 긁힐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지만...'

밀프에겐 첫째도 친절, 둘째도 친절이다. 일단 친절 스택을 쌓아놓으면 손해볼 일은 없다.

어차피 당장 떡각이 나올 것도 아니고, 사해가 동도인데 어쩌고 저쩌고 하면 팽연화나 어머니나 관대하게 넘어가주겠지.

길을 가다보니, 익숙한 길이 나왔다. 몇 달 전, 사부가 팽연화에게 적발당하고 나를 납치한 척 데려갔던 곳 근처.

그리고 어떤 꼴리는 몸매를 가진 여자가 멱을 감는 모습을 목격했던 장소였다.

'그거 맞았으면 진짜 세상 하직했겠지.'

어떤 공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원거리에서 나무에 구멍을 깔끔하게 뻥뻥낸 걸 보면 암기술이거나 탄...

"소협, 물소리가 들리는데 잠시 쉬다가지 않겠는가?"

곽청라의 말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쉽사리 수긍했다. 설마 그 여자가 또 있겠어?

개울에서 간단히 얼굴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내고 물로 목을 축인 다음 우리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말도 말게. 호북에서부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네. 아, 사태를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곽청라는 말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우리 도흥이랑 좀 친한가? 아, 처음 봤어도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이 사람은 내 벗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팽 소협은 튼튼하더군. 유효타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전혀 아쉬워할 것 없네."

"나는 사천의 성내로 들어가보는 것은 사실 처음이라네. 그쪽에는 지인도 없고..."

일단 생각난 내용을 바로 입으로 내는 타입인듯, 동그란 눈을 반짝거리며 수다를 늘어놓는 것이다. 솔직히 미묘하게 불편한 화제까지.

하지만 통통 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묘하게 듣기 좋아서 신기하게도 기분은 상하지 않는, 이상한 여자였다.

"예, 곽 여협.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제 다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곽청라의 뒤에서 몽아가 계속 눈치를 주고 있었다.

이 수다가 더 듣고싶지 않은 건지, 추격자가 불안한 건지 모르지만 이대로 여기서 시간을 뭉개서 좋을 건 없었다.

"아, 그렇군. 가세."

곽청라의 수다는 다행히 끝이 났고, 우린 다시 반나절을 달린 결과 드디어 사천당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때쯤에는 노을도 거의 다 저물었고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두 달 이상 떨어져있었던 탓인지, 조심스럽게 경비무사에게 말을 걸었는데, 다행히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는듯 문을 열어주었다.

팽연화의 배려로 내가 머물던 객관은 항상 청소해놓고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마음이 찡했다.

이미 아미산에 있던 사부의 오두막보다도 오래 머물던 곳이다보니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었지만.

"윤아...!"

말을 맡겨두고 우선 팽연화에게 이 두 사람이 머물 곳을 마련해달라고 하기 위해 가모의 처소로 걸음을 옮기다 어머니가 나오셨다.

"우리 아들... 혼자 오는 동안 무슨 일 없었고?"

쪽팔린다... 곽청라는 이미 곁눈질을 하면서 내 어깨를 잡고 여기저기 살피는 어머니를 구경하고 있었다.

"예, 괜찮아요. 아무 일 없이 잘 왔어요."

"그럼, 다행인데... 이 분들은 누구... 아, 몽아사태께서 계셨군요."

"다시 뵙습니다, 제갈 시주."

몽아는 모르지만, 어머니도 기녀인척 하면서 몽아한테 섹스 장면을 목격당한 전적이 있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몽아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흠잡을데 없이 정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 여협. 점창의 곽청라입니다."

"아... 곽 여협.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이미 면식이 있는 사이였는지 죄송하다는 인사를 건넨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옆을 지나던 당가의 시비에게 두 사람의 처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짬밥에는 안 되지만 가모의 친구인 어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덕분에 팽연화를 만나러 가기 전에 씻을 여유가 생겼다.

"아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지?"

어머니의 눈이 샐쭉 가늘어진 것을 보니, 역시 곽청라를 보고 매소향의 악몽이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양하정을 따먹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시간을 두고 하는게 맞겠지...?

집무실에서 일을 하던 팽연화는 경비무사와 시비를 통해서 두 번, 강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모로서도, 여인으로서도 남자가 곧 저를 만나러 올 것을 짐작한 그녀는 동경을 살폈다.

초절정에 달한 그녀는 운기행공만 거르지 않고 해주면 아름다운 피부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저 왔어요."

"왔는가?"

남자가 왔을 때는 이미 동경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있었고, 팽연화는 태연하게 서류를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팽연화는 가슴에 목화솜이라도 채워넣은 것처럼 몽실몽실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와서 그녀가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했다.

"...명색이 세가의 일인데, 외인이 함부로 읽어서는 곤란하네만."

"그냥, 멋있어서 구경한 거에요."

"멋...?"

팽연화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내가 함박웃음을 짓는 것을 보니 지금 자신의 모습이 뭔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식은 들었네. 구룡쟁패, 월이한테 깨졌다지?"

"네, 아주 제대로."

"느낀 건 없나?"

"드럽게 단단하구나?"

팽연화는 픽 웃었다. 사내도 마주 웃으며 팔을 벌리며 그녀를 안아왔다.

이미 약관이 넘은 사내가 더 클 리가 없을텐데도, 어쩐지 더 키가 커진 것 같았다.

그 품 속에 쏙 안긴채 팽연화는 사내의 살내음을 즐겼다. 두 달 넘게 맡지 못한, 사내의 살냄새.

오기 직전에 씻고 온 듯, 보송보송한 느낌이 났다.

"잘했네... 자네가 정말 자랑스..."

"다시. 자네 말고."

"...내가 못살아..."

팽연화는 인지범위를 최대한 확장시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서야 사내의 고개를 끌어내려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여보가 최고에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 같았지만 남자가 방실방실 웃는 것을 보니 역시 말해주길 잘했다 싶다.

"집무실에도 소리가 나지 않게 방음대책을 세워놔야겠어요..."

"...여기서도 하려고?"

팽연화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휴식을 위한 간이침상조차 없는 곳에서 방사를 할 생각을 하다니.

"다 들었네. 몽아사태와 점창 곽 여협을 여기로 데려왔다지?"

"절대 아니에요, 맹세코 손끝 하나 댄 적 없어요."

이미 제갈미령에게 제법 시달리고 왔는지 남자의 입에서는 완강한 부정이 나왔다.

"딴 얘기 하지 말고, 여기에도 깔 수 있게 해줘요, 응?"

"그거야말로 절대... 후웁...!"

팽연화는 사내가 자신의 입술을 제 입술로 덮어버리는 것을 느끼고, 얌전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섞었다.

사내의 거친 입술과 제 여린 입술이 맞닿는 이 순간을 팽연화는 일부러 회피하지 않고 즐겼다.

츄룹, 할짝...

"푸하아... 입만 맞추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건 그냥 인사에요. 다녀왔다는 의미로 하는 입맞춤. 이제부터가 진짜."

그리고 다시 입술이 덮쳐왔다. 무공경지가 훨씬 고강한 그녀였지만 어쩐지 사내와 입을 맞추고 있을 때면 숨이 찬다.

다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팽연화의 입에서는 허락을 알리는 말이 나왔고, 이어서 불평이 덧붙었다.

"못됐다니까...!"

"못된 짓은 예쁜 여자한테만 해요. 하지만 이제부턴 일 이야기를 해야되니까 그만할게요."

남자는 다시 이마에 입술을 맞춘 다음, 몸을 떨어뜨리더니 품 속에서 한 통의 서신을 꺼냈다.

팽연화가 그것을 받아들고보니, 봉투에 '하북팽가 가주 팽무도'라고 적힌 이름이 있었다.

수신인은 그저 '사천당가'.

"팽 가주께서, 연화에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친정인 팽가의 가주이자, 사적으로는 오라비인 팽무도의 서신을 받아들고 팽연화는 신음했다.

팽가를 천하제일세가로 만드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오라비가, 자신에게 굳이 서신 따위를 보냈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팽연화는 편지를 가져왔을 뿐 죄가 없는 사내에게 원망의 시선을 잠깐 보낸 다음, 한숨을 내쉬며 겉봉을 뜯고 서신을 읽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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