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19 실은 제 사부가 (1)
날이 밝았고, 양하정은 의원을 찾아 진맥을 받고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판정을 받자마자 가솔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완치 판정을 주지 않고 주사를 놓아준 야매의원에게 한 번 눈을 흘긴 것은 덤이었다.
역시나 안주인으로서 그동안 팽가를 운영해온만큼, 이것저것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면 아랫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고보면 거대세가 가모를 셋이나 따먹었는데도 가모로서 제대로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신선했다.
"멋있네요."
"...지금 방해하면 자네한테도 일 시킬 거야."
일 돕는 정도야 상관없지만 잘못 치근덕대면 양하정이 정말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는 우선 물러났다.
다행히 양하정은 완치가 되었지만, 팽가의 상황은 안 좋다.
다수의 제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니, 한동안은 웅크리고 살아야겠지.
손님으로서 방문한 상황에서 그 집이 어려운 상황이면 나는 당가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옳은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 옳은가.
고민된다.
"강 아우, 여기 있었는가?"
맞은편에서 팽월이 내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항상 넉살맞던 표정이 상당히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형님, 괜찮은 겁니까?"
멀쩡하던 세가가 하루 사이에 마교의 함정에 당해 휘청이게 되었으니 표정이 안 좋을만도 했다.
게다가 본래 팽월은 관부와 손을 잡는 것이 썩 탐탁치 않은 기색이기도 했고...
"괜찮네. 그래도 자네를 데려온 것이 내가 아닌가? 자네 덕에 마교를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고, 어머니도 치료할 수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데.
"아, 이런 얘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아버지께서 자네를 찾고 계시네."
팽월은 알고보니 팽 가주의 지시로 나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시비를 시켜서 기별을 넣으면 될 일인데도 굳이 팽월을 보냈다는 건,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일까?
"나는 당분간 병상에서 일어날 수가 없네."
하지만 팽무도의 이야기는 감사보다는 좀 더 앞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 하지만 그 때는 분명..."
벽을 부수고 나타나자마자 곧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기에 팽무도의 실력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 영호경과 오랜시간 전투를 벌였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기저기 검이 스쳐간 상처가 건재할 뿐, 양하정처럼 마기가 잔뜩 쌓인 케이스도 아닌 것 같은데 왜지?
"산공독을 이겨내는 일이 공짜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일 뿐일세."
팽무도는 산공독에 당했다. 내력에 대한 운용능력이 떨어지고, 내력 자체도 흩어지는 상황에서 팽무도는 진원지기를 열었다.
본래 내력이란 쉽게 회복시킬 수 있는 내력과, 그렇지 않은 내력으로 분류된다.
후자가 바로 진원지기이며, 보통 내력을 바닥까지 끌어썼다고 해도 진원지기를 건드리지는 않는다.
이 진원지기가 훼손되면 즉시 다시 원래의 무위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그, 그럼...!"
"아,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니야. 무작정 사용한 것이 아니니. 그래도 적어도 몇 달 정도는 이 모양이겠지만."
팽무도는 내 추측을 부정했다. 팽무도가 살아남았을 뿐 오절의 한 사람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냐는 내 질문을, 부정한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소협에게 밝힌 것은 소협에게 부탁이 있기 때문이야."
하긴 그럴 것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손님에게 가주가 골골댄다고 말해서 이득이 있을리가.
"이럴 때 좋은 것이 핏줄 말고 있겠는가? 소협과 연화의 인연이 작지 않으니, 당가에 가면 이 서신을 연화에게 가져다주게."
"팽 여협 말씀입니까...?"
나는 팽무도로부터 서신을 건네받았다. 팽무도는 마뜩찮은 신음을 흘렸다.
"당조명 그 머저리가 얽히면 절대 연화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겠지. 그러니 자네가 가서 직접, 연화에게 서신을 건네주길 바라네."
"아...!"
내가 낸 탄성에 팽무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팽무도는 모른다. 팽연화의 남편이자 당가 가주, 당조명의 영향력은 적어도 팽연화를 상대로는 이제 개똥만도 못하다는 것을.
그러니 내게 이런 서신을 넘긴 거겠지. 혹시나 당조명한테 보내면 즉시 요청을 거절당할까봐.
"그렇다면 팽 여협을 이 곳으로...?"
"바로 보내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네. 어차피 신강의 마교에서 본가를 즉시 치는 일이 쉽지는 않을테니."
그저 연계를 엄밀히 하고 유사시에 서로를 돕기로 한다는 약속이라는데, 글쎄?
'거의 당가 쪽은 팽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겠지.'
마교의 근거지가 있는 신강은 중국 땅을 기준으로 변방 중의 변방.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땅이다.
하지만 사천 역시도 간신히 중국으로 분류될만한 남방의 변방지역, 곤륜파를 제외하면 마땅한 방파제도 없는 곳이란 말이다.
마교가 갑자기 기습을 날리면 당가는 그대로 얻어맞고 끝. 지금 전력이 부족한 팽가는 지원을 급파해줄 여력도 시간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하북, 즉 내륙에 있는 팽가가 두드려맞는다? 서안, 섬서, 사천의 무림세력은 이미 마교의 준동을 포착하고 준비하고 있겠지.
"알겠습니다, 꼭 팽연화 여협께 이 서신을 전달하겠습니다."
"...부탁하겠네."
하지만 나는 서신을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내가 팽연화를 무조건 설득해야되는 일도 아니고, 팽무도가 알아서 좋은 조건을 적어서 보냈겠지.
정신머리가 없어서 상황파악 못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면 그 때 가서 팽연화와 같이 팽무도를 씹어주면 그만이다.
"그럼 오늘 바로 출발해주겠는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팽무도의 용건에는 이것도 포함되어있던 것 같았다. 손님을 데리고 있기에는 세가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돌려보내는 것.
주인이 이렇게 말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마 하고 사정을 밝힌 후, 양하정과 팽월에게 당일 중에 떠날 것을 알렸다.
당장 마땅히 챙길 것도 없었던 나는 말을 끌고 간단한 짐만 챙겨서 즉시 여정을 나설 준비를 했다.
[나중에 또 올게요.]
[굳이 그럴 필요 없네.]
명목상 안주인으로서 나를 배웅나온 양하정은, 남들 몰래 보내는 전음에 섭섭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원래 해서는 안 될 일이었을 뿐이야. 내 잘못으로 시작된 일인데 누구를 탓하겠나?]
[또 올 거에요. 그 때까지 계속 예쁘게 있어야돼요.]
[안 와도 된다니까.]
의례적인 웃음에 잠깐 진짜 웃음이 섞인 것 같다고 느꼈지만, 사람 속은 모를 일.
나는 정중하게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넨 다음 또 보자고 전음을 한 번 더 보내고 몸을 돌렸다.
우선 여정은 산서, 섬서를 거쳐서 사천으로 가기로 했다.
급하게 떠나오느라 약속을 맞추지 못했는데, 섬서를 거쳐서 사천으로 길을 가기로 했던 어머니가 당가로 갔을지 아니면 그대로 고가표국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선은 고가표국에 들러서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한다.
'임신했겠지...?'
아마 생리주기를 바탕으로 임신여부를 확인했을 가능성은 적다. 어느 정도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임신했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을 때, 옆에 있어주고 싶다.
그렇지만 사천에는 가야하니, 결국 어머니를 여행길에 오르게 만들어야한다는 건데...
'하지만 이젠 알려줘야될 것 같다.'
한 번 내가 검성을 피해버린 이상, 어머니에게는 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사부가 천외삼존 가운데 하나인 혈마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언제고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은 존재하니까.
뿔뿔이 흩어놓고 말하는 것보다는, 한 곳에 모아두고 동시에 알려주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사실 당혜원이 임신했다는걸 아니까 사천으로 바로 갔을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며칠동안 천천히 말을 몰았다.
곡창지대인 하북은 오가는 상행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말을 몰아 산서를 지나 섬서까지 갈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고가표국을 어떻게 찾아갈지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오대세가나 구파가 대기업이라면, 고가표국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조금 이름이 알려진 중소기업 정도일 것 같단 말이지.
"윤아!"
그렇지만 기우였다. 생각외로 고가표국은 유명한 편이었다.
제갈세가의 사위라는 위치가 그렇게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질적인 도움은 전혀 없더라도 말이지.
어머니는 역시 이미 당가로 먼저 갔다고 한다.
나는 고가표국에서 하루를 쉰 다음, 다시 당가를 향해 말을 몰았다.
'자기 전까지 계산기 노릇을 했지만, 쉬긴 쉬었으니까.'
난 그렇게 약 보름만에 사천 땅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완전히 내 페이스에만 맞춘 여행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피로는 덜했지만 거의 하루종일 말 위에 올라탄 상태는 역시 조금 힘들었다.
빨리 성내로 들어가서 당가에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모는데, 이런 젠장.
어디선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자기들끼리 싸울테면 싸우라지, 라고 하고 싶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왜 하필 사천에서 이래.'
사천에 있는 거대세력만 해도 셋이다. 당가, 청성파, 아미파. 운남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 점창파까지 포함하면 넷.
성 하나에 이렇게 거대세력이 뭉쳐있으니, 자잘한 세력들이 제대로 설 틈이 없는 동네가 사천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자잘한 세력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대세력이 이 싸움에 관여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
나는 혀를 차면서 수풀 사이에 말을 묶어두고 신형을 날렸다.
"이놈, 대체 어디에서 보낸, 크윽!"
"알 것 없다!"
응, 정말 알기 쉽네.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적에게 습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두 문장이었다.
슬쩍 상황을 보니 두 명을 상대로 복면인 여섯명 정도가 돌아가면서 차륜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 쟤는...'
당하고 있는 두 명 중에 한 명이 아는 얼굴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습적으로 뛰쳐나가 일장을 날렸다.
"으윽!"
다행히 그리 실력이 높지는 않은듯 내가 날린 일장에 고스란히 손해를 본 복면인 한 명은 숨을 헐떡이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당하고 있던 두 명 중에 하나가 손가락을 튕겨 아예 그 자를 무력화시켰다.
"웬 놈이냐!"
"지나가던 무명소졸!"
안 그래도 여섯이 둘을 상대하고 포위하고 있던 상황에서 내가 뒤를 치자 정신이 없어진 듯했다.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놈까지 알뜰하게 챙기고 싱겁게 달아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나는 습격당하고 있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태. 여전하시군요."
오늘도 뭘 잘못했기에 습격을 당하고 있느냐는 내 내심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몽아는 소태씹은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소협, 오랜만일세."
하지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몽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