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16 세 달 주겠네 (3)
"아버지...?"
이장로는 팽월이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실로 감미롭게 들렸다.
사적으로는 든든한 아버지요, 공적으로는 정파의 기둥인 가주가 죽을 지경에 처했으니 좌절할만도 했다.
하지만 의외였다.
영호경이 팽무도를 끝장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오다니, 팽무도의 실력이 생각 이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설마 산공독까지 버텨낼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실로 미약한 기세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팽무도를 죽이고, 눈앞의 애송이만 죽이면 된다. 팽가의 전력은 팽무도 하나가 사라지는 것만으로 절반 이하로 떨어지니까.
'무서운 놈...'
손을 섞어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절세라고 할만한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줄 모르는 애송이.
그것이 강윤이었다. 뛰어난 내공으로 억지로 찍어누르는 재주밖에 없는 반푼이를 상대로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예상밖으로 싸움 중에 무섭게 발전하기는 했지만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팽월마저도 무시한채 작정하고 펼친 독아쌍교의 초식에도 별 피해를 입지 않다니.
'분명 일류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절정 수준의 무학을 펼치고 있었다.
반드시 죽여야한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이 자는 반드시, 수십년 안에 절대고수가 되어 명교의 위협이 된다.
'응?'
순간, 강윤의 눈이 엉뚱한 곳을 향했다. 생사결의 와중에 그 눈이 향하는 곳은...
'소교주?'
면식이 있는 사이인가?
감히 윗단계의 고수 앞에서 눈을 돌리다니, 자결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시선이 향한 상대가 소교주다보니, 이장로는 순간 손을 쓰는 것이 늦었다.
덕분에 목이 단숨에 꺾였어야 마땅할 상대는 무사히 다시 이장로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온전히 이장로에게 집중되지 않고 있었다. 당장 공격해들어가도 치명상은 피하겠지만, 싸우는 상대에게 집중하는 눈이 아니다.
'역시 소교주와 면식이...'
이장로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소교주의 재지와 성정이라면 이장로가 무슨 의도를 품었는지 짐작하고 팽무도가 저 꼴이 된 시점에서 가차없이 목을 베었을 것이었다.
소교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는 것이 명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하지만 여기로 온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이, 이장로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째서 그대가 이 곳에 있는 거지?]
[그 말씀, 저도 묻고 싶군요. 대체 귀교는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영호경은 나에게 조만간 마교에 찾아오라고 했다.
그 말은 내가 마교에 언제 찾아가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만큼, 당분간 마교에서 분쟁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의미도 된다.
'그렇게 말해놓고 이렇게 통수를 쳐?'
애초에 마교가, 영호경이 내게 지켜야할 신의 따위는 없기는 하지만, 솔직히 마음에 안 든다.
마교가 어디서 어떤 정파세력을 무너뜨리든 관심밖이지만, 당장 내 눈 앞에서 쓰러진 여자가 있단 말이다.
[본교의 일을 아직 외인인 그대에게 알려줘야할 이유가 있나?]
소강상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버린 것을 자책하며 다시 노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눈이 한 번 깜빡일 사이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 강호의 생사결인데.
[그대야말로 혈마의 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게 거짓을 고한 것인가?]
[전혀요. 지금도 사부님의 명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사부의 명이다.
사부는 오로지 내게 등선만을 원한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위해 밤새도록 같이 등선공을 운기할 여자를 찾고 있지.
나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오히려 귀교의 행사 때문에 사부님의 명을 수행하는데 지장이 생겼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대로 사부의 이름을 잘 팔면 오히려 영호경을 비롯한 마교도들을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무림인의 자존심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아야 했다.
[착각하지 말게. 본교의 번영을 위해 혈마의 도움이 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사건건 그대 사부의 눈치를 봐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
[혈마의 이름으로 본교를 겁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그 자는 물론 강하지만, 혼자서 본교의 행사를 막을 수 있으리라고 믿나?]
전음을 나눈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영호경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음성에는 진한 노기가 스며있었다.
"소교주, 이런 일이 벌어지게 두다니 이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세."
"소교주라고...?"
갑자기 입을 연 노인의 말에, 팽월을 비롯한 팽가 사람들이 웅성대며 영호경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팽무도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놓은 저 여고수가 마교의 소교주라는 사실을 알고나자, 뒤쪽의 분위기가 암울해지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노인에게 호명된 영호경은 싫은 표정을 지었다.
문득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이건 영호경이 관여한 상황이 아닌 것 아닐까?
[소교주, 혹시 이 상황... 소교주도 몰랐던 겁니까?]
[...그래.]
영호경은 마뜩찮은 목소리였지만 순순히 인정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일을 벌인 것은 눈앞의 노인, 이장로이며 그녀는 다른 이유로 동행했다가 얼떨결에 손을 쓰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럼 저 노인네도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끌어가지는 못한다는 말이네?'
아무리 봐도 주동자인 것 같아도 주동자라는 물증이 없는 상황을 연출한 이상, 이장로는 이 상황을 주도하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사실 내가 주동자요, 라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소교주, 팽가를 놔주십시오.]
[대가는?]
영호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보다시피, 본교는 팽가에 손을 쓴 상황이야. 어차피 정사대전은 벌어지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정사대전이 기왕 벌어질 거라면 마교 입장에서 팽가, 특히 팽무도는 무조건 숨통을 끊어놓아야된다.
팽무도가 죽는다?
솔직히 나로서는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일 수도 있었다. 팽무도가 없으면 양하정은 미망인이고, 더 거리낌없는 섹스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기는 했어도 팽무도는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영호경이 가장 귀가 솔깃할 법한 이야기를 꺼냈다.
[만약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사부님을 설득하겠습니다.]
영호경이 나를 원한다는 것은 나라는 인재 자체의 전망도 있지만 사부와의 커넥션을 원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일단 이대로 물러난다고 해도 당장 정사대전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고, 팽무도만 무사하다면 적당히 협상하는 차원에서 마무리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이번 마교의 흉계는 '일부의 일탈'이니까.
게다가 대부분의 강호인은 모르겠지만, 검성은 사파 척결을 외치고 있는 것치고는 사파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잘 아는 사람이다.
'정파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까지, 최대한 싸움은 피하려고 하겠지.'
설령 정사대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도절이 정파에 끼어서 생기는 손해보다, 사부가 사파에 끼어서 생기는 이득이 훨씬 크다.
하지만 영호경은 쿨하게 내 제안을 수락하지는 않았다.
[그럼 나 개인에 대한 대가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영호경의 대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협상에 들어갔다.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한동안 전음을 통한 대화는 이어졌다.
나와 영호경이 전음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듯, 어느새 마교 팽가 가리지 않고 이쪽만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팽 가주."
"...뭔가?"
영호경의 부름에 팽무도가 쇠약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말 몸을 가누고 있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아무래도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우린 이만 물러나려고 하는데, 괜찮겠나?"
"..."
날 응시하던 이장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 뒤통수 때려주고 싶네.
"소교주...!"
"본교는 팽가와 충돌할 생각이 없어. 이건 일부 교도들이 꾸민 일이고, 교주께 아뢰어 적절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네."
개소리가 따로 없는 얘기였지만, 당장 전력이 밀리는 쪽은 팽가였다. 속으로는 이를 갈더라도 받아들이는게 이득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한편 이장로는 영호경을 원망스럽게 몇 차례 부를 뿐, 소교주의 의견을 뒤집고 모조리 죽이는게 옳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받아들이겠네."
조금 전까지 서로가 무기를 겨누고 죽이려고 들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두 세력의 다툼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끝이 났다.
하지만 허를 찔린 팽가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이 앙금은 언제고 다시 튀어나올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팽가의 사람들은 사상자를 수습해서 팽가로 돌아왔다.
애초에 관인인 척을 하면서 팽가의 전력을 찢어놓고 두들기려는게 마교의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덤으로 가장 성가신 팽무도까지 죽이려고 했고.
양하정은 가솔들을 지키려고 이장로에게 맞서싸우다가 너무 많은 마기가 내부를 진탕시킨 탓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래도 의원이 알아서 잘 치료해주겠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내가 곁에 계속 붙박이로 있는 것도 수상하기 때문에 나는 내 처소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팽가 내에 있는 의원은 물론, 바깥에서까지 의생을 데려와서 팽가는 시끄러웠지만, 내 처소는 조용했다.
내 부상은 전부 얕은 자상 정도였기 때문에 특별히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이 금창약만 바르면 땡이었기 때문이다.
<세 달 주겠네.>
침상에 누워서 영호경이 말했던 조건에 대해서 떠올렸다. 세 달 안에 신강에 있는 마교의 본거지로 오라고.
나는 절대 거부를 외쳤다. 그냥 포인트만 찍고 오는 것도 아니고, 한 달이나 머무르라는 조건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제 당혜원이 출산하기까지 몇 달 남지 않았다. 한 달이나 거기에 발목을 붙잡혀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격렬한 항의를 거듭한 끝에 여섯 달로 기한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대신 체류기간까지 한 달 보름으로 늘어버렸지만.
'이제 곧 돌아가야하는데...'
원래 내일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양하정이 마음에 걸린다. 이미 검성은 서안에 도착했을테니 걱정은 없지만... 역시 좀 더 있다가 가는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더 늦으면 당혜원이나 팽연화가 많이 섭섭해할 것 같아서 영 마음에 걸린다.
내가 있다고 양하정이 빨리 낫는게 아니니까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소협, 주무십니까?]
어두운 방에 불도 켜고 있지 않은데, 바깥에서 여자 목소리가 날 부른다. 아마 시비겠지.
"무슨 일이죠?"
[다름이 아니라...]
나는 자초지종을 듣고 시비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양하정의 처소로 갔다.
아까까지 비교적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던 양하정의 안색이 다시 안 좋아진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옆에 선 의원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울 일이 있다니, 무슨 말씀이죠?"
의원이라고 해도 팽가의 의원인만큼, 단순히 침을 놓고 탕약을 놓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내상을 치료하는데도 정통할텐데.
"다름이 아니라, 소협이 도문의 내공을 가지고 계시고 있다기에 찾았소."
의원의 설명에 따르면, 체내에 축적된 마기의 양이 보통이 아니라서, 기맥의 타격이 심대하고 한다.
내가 흘려넣은 내공도 어느 정도 임시방편이 되었을 뿐 증상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데는 한없이 부족했다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은 이장로에 대한 살심이 치미는 것을 참으면서, 나는 조용히 의원의 설명을 들었다.
"타인의 신체에 밀어넣은 내력을 통제할 방법은 없지만, 소협의 내력을 불어넣어 운기요상을 유도해준다면, 가모의 상세가 크게 좋아질 것이오."
나는 의원의 제안을 두말않고 승낙했다. 양하정 본인이 의식이 없어서 스스로 마기와 맞서싸우지 못한다면 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의원은 내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다른 환자를 찾아서 처소를 나섰고, 나는 옆에 한 명의 시비를 대동한채 운기조식을 해서 축적된 내공을 양하정의 체내에 밀어넣었다.
운기요상은 원래 내기를 순환시켜 신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렇게 타인의 체내에 내력을 불어넣어 운기요상과 비슷한 효과를 보는 방법도 종종 쓰인다고.
'어?'
그렇게 맥문을 통해 양하정에게 흘려넣은 내력을, 다시 운기조식을 통해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타인의 신체에 밀어넣은 내력을 통제할 방법? 그거...'
나는 내 아랫도리를 내려다보았다.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