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15 세 달 주겠네 (2)
화가 난다.
"요즘 구룡 실력은 이 정도인가?"
얄밉게 지풍을 피하는 저놈도, 그 다음 이어지는 반격에 쩔쩔매는 나 자신도.
그 분노가 나 자신의 손발을 멋대로 이끌고, 다시 무모한 공격을 가하다가 적의 움직임에 말려든다.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뒤쪽의 팽가의 제자들이 양하정을 걱정해서 속닥대는 소릴 듣고 있으면 다시 분노가 일어난다.
[아우, 너무 급하게 나가지 말게. 상대의 실력은 굉장한 수준이야.]
팽월은 그게 분석이 되는지 몰라도, 나는 저 얄미운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눈앞의 노인은 내 공격을 최대한 절제된 움직임으로 흘려버리고, 언제 중도를 뽑아서 덮쳐올지 모르는 팽월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와 움직임이 엉켜있는 사이에 팽월이 덤비면 골치아파질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강하고, 빠르지만, 그게 전부로군. 분명 뛰어난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그 위력의 반도 살려내질 못하고 있구나."
"그래도 노인 하나 죽이기에는 충분하지."
나는 노인의 말을 받아치면서 바쁘게 손을 놀렸다. 천양장과 현음지를 동시에 날려도 성과를 보지 못하면, 다음, 그 다음 수는 더욱 정교하게.
팽월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인지, 그럭저럭 버틸만한 공방이 벌어졌다.
'눈으로 보고 판단하면 늦는다.'
노인이 뿜어내는 마기가 내게 아릿한 통증을 준다.
마기 역시 내력의 산물이고, 공격이 들어오려고 할 때 더욱 맹렬해지는 것이다.
나는 피부의 감각을 최대한 살리는 느낌으로 기감을 돋웠고, 한없이 가볍게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이놈의 마기, 예측, 약간의 직감.'
눈으로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보를, 전신으로 해석해서 다음 수를 둬야하는 죽음의 체스였다.
손끝에는 자연스럽게 근력이 실리기보다 적을 격살하기 위한 강력한 기운이 한없이 부드럽고 가볍게 실린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군. 하지만 부족해."
이놈의 무공은 아마 어머니와 비교해도 윗줄. 제대로 붙어보진 않았지만 아버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거의 초절정에 들어갈락말락한, 최상위 수준의 절정고수.
대체 노인의 시야에 뭐가 비치는지는 모르지만, 공격의 흐름이 죽죽 갈라지고 날카롭게 정련된 엄밀한 기운이 단검 끝에서 밀려나온다.
마치 제멋대로 뻗어오는 촉수처럼, 검기가 길이를 제멋대로 바꿔가며 나를 농락하려고 든다.
"이제 곧 죽으려는 와중에 가르침까지 내려주시고... 혹시 마교가 아니라 소림 출신입니까? 왜 이렇게 대자대비하시지?"
"그 입은 쉴 줄을 모르는구나. 네놈의 목을 베어버려도 분명 네놈의 입은 떠들고 있겠지."
예리한 검기는 검강이 아니기에, 실체가 없는 기운만의 타격은 실체가 있는 검에 검기가 실린 것보다 훨씬 약하다.
하지만 내 지풍이나 장력에 비하면 집약된만큼 그 위력은 배가되기 마련.
찌이이익
내 오른손에 맺힌 두터운 장력 정도는 손쉽게 찢으면서 들어오지만, 애초부터 버리려던 패였다.
다섯갈래로 흩뿌린 왼손의 현음지를 노인이 회피하고 격퇴하는 사이, 내 다리는 바닥을 내리찍으며 진각을 밟고 있었다.
대지에 힘있게 내딛은 발을 중심으로, 내 주먹에서 강력한 권풍이 쏟아져 나간다.
"흐읍!"
그 위력은 노인도 경시하기 어려웠는지, 검기로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 맞은편 손에서 똑같이 권풍이 쏟아져나와 상쇄했다.
역시 내력도 나보다 윗줄. 노인은 진각도 없이 약간 불안정한 자세에서 쾌속하게 뻗어나온 권으로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아우, 이제 되었네. 물러나게.]
[아직 여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러나라는 거야. 여력이 없을 때 물러나려고 하면 쉽지 않을걸세.]
팽월이 있는 쪽을 곁눈질해보니 팽가의 제자들이 양하정을 돌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가 갈리지만 이놈은 내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역시 손을 섞어보고 나서 확실히 알았다.
나와 팽월은 합공하기에 궁합이 아주 안 좋다. 강력한 한 방, 든든한 방어력 모두가 팽월에게 있는 것이다.
내게 있는 것은 빠른 움직임 뿐인데, 팽월과 보조를 맞추려면 팽월이 중도의 장점을 희생해야만 한다.
굳이 따지면 팽월이 합공을 하기에 적합하지 못한 방식으로 수련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수도 있다.
"가려는가? 적당한 때 꼬리를 마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지."
"그것도 격장지계라고 생각하면 일단 천자문부터 다시 배우시지."
나는 이죽거리면서 물러났다. 이놈을 당장 죽일 힘이 없다는 것이 분하지만, 어느 정도 기운은 빼놓았을 것이다.
일단 팽월에게 맡기자. 나는 양하정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양하정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기에 당하신듯 합니다."
팽가의 제자가 슬쩍 알려주었다.
나는 완전히 손을 놓고 양하정을 보지는 못하고, 언제든지 전투에 끼어들 수 있도록 노인을 견제하면서 들었다.
마기.
사악한 기운이니 뭐니 하지만, 그 실체는 그냥 자연스러움에 반대되는 기운일 뿐이다. 마공의 기운이라는 소리다.
악마와는 상관이 없고, 일반인에게 자연스러운 불쾌감을 주며, 마지막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해를 입힌다.
운기행공을 해서 몰아내면 되긴 할텐데, 지금처럼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는 그것도 어렵다.
"우선 이거라도..."
도문, 불문의 내공은 모든 마공에 상극이다. 내 내공은 마공에 맞서싸우기에 적합한 내공이란 소리.
나는 선 채로 운기를 하면서 일부 내력을 양하정의 맥문을 통해 흘려넣었다.
"으윽..."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는 조금 편안해진 안색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소협."
팽가의 제자는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나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가주님이나 다른 제자들은요?"
이놈들이 머리가 있다면 팽무도를 계산에 넣지 않았을리가 없다. 뭔가 준비 정도는 하고 덤볐겠지.
하지만 팽가의 제자는 아는 것이 없는듯했다. 양하정이 일부 제자들을 이끌고 물러나왔기에 그것을 따라왔을 뿐이라고.
'뭐하고 있는거야.'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는 점은 아는데, 서서히 밀리는 팽월을 보고 있으려니 초조함이 느껴졌다.
구룡쟁패에서 요새처럼 내 공격을 방어하고 가끔씩 이빨을 드러내던 팽월이, 노인의 공격 앞에서는 그 방벽이 빛이 바랜다.
빠르게 허를 찔러오는 지풍을 상대로 익숙하지 않게 도를 급하게 놀리느라 막상 중도의 위력이 반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쾌로 중을 누른다는 예시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젠장.'
이래서는 내가 놈을 상대하고 팽월이 견제할 때가 더 나았다.
내게 노인을 단숨에 몰아붙일 한 방이 없기 때문에, 노인은 상대적으로 팽월에게 기량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형님, 물러나세요!]
내 전음을 들었지만 팽월은 쉽게 물러나질 못했다. 운기로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내가 먼저 끼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잠시 소피 좀 보고 왔습니다!"
"웃기는군. 혹시 자네 심법은 소피를 보면 내공이 회복되나?"
"나이 먹고 관짝에 못 들어간 노인네를 편히 쉬게 해주려면 부지런해야죠!"
잠깐 표정이 일그러진 노인의 다리를 현음지가 쓸어들어가는 사이, 팽월이 뒤로 몸을 뺀다.
다시 팽월이 뒤에서 대기하고, 내가 노인과 직접 맞붙는 형상으로 돌아왔다.
"역시 저 친구는 너무 무뚝뚝해서 재미가 없어. 자네가 좀 놀아주게."
젠장.
역시 명색이 절정고수인 팽월이 밀리던 이유가 있었다. 노인은 대충 감을 잡았는지 나를 더욱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팽월을 위해서 남겨도 되는 여력을 정확히 판단한 모양이지?'
적절하게 내 공세를 무마하는 수준에서 그쳤던 노인의 공격이, 서서히 늘어가기 시작한다.
서로의 공격 비율을 따지면 7대3 정도였던 것이, 6대4를 지나 5대5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 정도가 좋아. 아까까지 자네의 공격에는 조급함이 너무 많았지."
지금도 이놈을 죽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놈의 실력을 확인하고 보니 어느 정도 냉철함이 돌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평가당하고보니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윽!"
결국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아까까지 나름 상처없이 버텨냈기 때문에 할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더, 더 가볍게.'
이놈의 공격에 맞서려고 하면 안 된다. 바람에 휘날리는 버들잎처럼, 몸을 가볍게 하고 적의 흐름에 내 흐름을 맡긴다.
공격은 생각하지 않는다. 여유가 있으면 해도 좋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사치다.
공격의 비율은 더욱 줄어 2대8 정도까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노인의 표정은 안 좋아졌다.
왼손에 쥔 단검이 어느새 오른손으로 옮겨가 마치 장검처럼 길게 늘어진 검기가 나를 노리고 쇄도해온다.
받아내기보다 팔의 움직임에 순응하고, 밀어내기보다 당겨서 타점을 흐트러뜨린다.
내 손끝에서 더없이 부드러워진 내기가, 마치 솜털처럼 느껴졌다.
"반드시 죽여야할 놈이로구나."
나는 씨익 웃었다. 노인의 말이 적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칭찬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이 노인네는 죽일 거지만.
나는 노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검기와 지풍의 그물로 나를 옭아매려고 들었다.
위험하다.
뒤쪽에서 팽월이 가세해오려고 하지만, 워낙 기습적으로 공세의 성격이 바뀐 탓에 적어도 반 수는 늦을 것이다.
아마 팽월이 들어온 다음에는 노인네도 손해를 보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생각해라, 생각해.
사사사사삿
마치 사과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공간을 깎아들어오는 죽음의 그물이, 한 발 한 발 내게 사망선고를 내리기 위해 좁혀져온다.
가속된 사고 속에서 나는 이것을 완벽히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개같은 노인네.'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등룡보법을 최대한 전개해서 노인에게 접근했다.
노인에게 접근할수록, 검기와 지풍의 세례는 더욱 강해졌지만 상대적으로 짧아진 거리 탓에 공격이 직선적이고 단순하게 변해간다.
문제는 그만한 공격을 당해낼 수 있는 위력의 공격이 내게는 없었다는 점.
가벼운 공격에 수십번 당해 죽을 것이냐, 강력한 공격에 한 번 당해 죽을 것이냐의 차이밖에 없다.
하지만 노인네, 나한테 숨겨둔 카드가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생각하셨어야지.
꽝
좁은 공간에 집약된 검기와 지풍의 파도를, 나는 오른손으로 전개한 장력 한 방에 작살내며 상쇄하는데 성공했다.
"뭐...?"
노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잽싸게 노인에게 달려들어 일격을 먹일 준비를 했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죽어!'
나는 왼손에서 부드럽게 연마된 내력을 가벼운 손놀림으로 밀어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간 현음지기가 실린 장력이, 마치 산들바람처럼 노인의 몸에 스며든다.
"커억!"
제기랄.
노인의 안색이 시뻘개진 것을 보니 타격을 준 것 같기는 한데... 죽지는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이런 장공을 가지고서...!"
"궁금증 해결해주기는 싫으니까 이대로 저승 갑시다!"
노인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나름 일격필살이라고 날린, 내가중수법을 실은 공격이었는데 내부가 뒤흔들려도 충분히 싸울 정도의 여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쾌속하게 날아오는 공격이, 나를 순식간에 다시 압박했다.
'젠장, 제대로 배워둘걸...!'
대강의 요체만 익힌 반쪽짜리 내가중수법으로는 이놈을 죽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의 강력한 장법, 그건 현천지기를 쏟아내서 날린 일격이었기 때문에, 현천지기를 잃은 몸의 기량이 대번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천지기 없이 상극인 두 내기를 융합할 수 없는 내 몸은, 대번에 임독양맥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많이 지친 모양이로구나! 그러니까 입을... 조심해서 놀렸어야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노인은 도를 휘두르는 팽월은 제쳐두고 나만을 노리기 시작했다.
팽가의 몇몇 제자들도 가세하려고 했지만 노인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리는 살벌한 공격을 감당할 수 있는 제자는 없었다.
젠장, 젠장!
노인이 양쪽 손에 각각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서 나를 찔러들어온다. 진한 마기가 실린, 적을 격살하겠다는 의지가 듬뿍 실린 공격.
어딜 찌를지 짐작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움직임에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하나만 걸리라는 마음으로, 아니 그조차도 떠올릴 여유도 없이 손을 움직였다.
스팟
"...뭐라?"
다행히 노인이 헛손질을 한 것인지, 나는 어깨가 조금 얼얼한 선에서 끝날 수 있었다.
어깨에 침투한 미량의 마기는 내 내공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지워졌고, 노인은 나를 찢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야할 종자로다. 네놈만은 반드시!"
쾅
노인의 박력있는 외침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의 등 뒤의 벽이 터져나가며 돌이 쏟아져나왔다.
"...어?"
박살난 벽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딱 봐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도를 간신히 쥐고 있는 팽무도와...
'영호경?'
상대적으로 멀쩡한 모습으로 팽무도와 대치하고 있는 마교의 소교주, 영호경이었다.
나는 내심 탄식했다.
'좆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