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08 반드시 가진다 (1)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놈이 몰래 뭔가 영약이라도 먹은게 분명하다니까! 그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구룡 아닌 창 형님, 변명 참 구차합니다. 그러니까 아무튼 졌다는거 아닙니까? 영약 먹지 말라는 규칙이라도 있었습니까?"
"이놈이...!"
남궁세가의 막내 쌍둥이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커지기 직전, 여인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흐름을 끊고 끼어들었다.
"창아, 홍아. 식사자리에서는 조용히 하자꾸나."
"하지만 누님... 이 녀석이... 읍!"
"형님, 조용히 합시다. 누님, 죄송합니다."
[형님, 집에 없어서 감을 못 잡은 모양인데, 요즘 누님한테 함부로 기어오르지 마십쇼. 진짜 그러다 얻어맞는 수가 있습니다.]
남궁창은 동생이 보내오는 전음을 듣고보니, 남궁혜의 분위기가 이전과 다르게 날이 서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심하겠습니다, 누님."
"...그럼 식사나 마저 하자."
"예."
가주인 남궁학조차도 이런 여동생의 변화를 인상적으로 보고 있었지만, 원인까지는 알지 못했다.
솔직히 이런 상태의 동생에게 말하기는 조금 껄끄러웠지만 가주로서, 남궁혜에게 알려줘야할 것은 알려주는 것이 옳았다.
"혜아야."
"예, 오라버니."
남궁학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한편, 이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아내, 종리소소는 눈을 반짝이면서 남궁학의 입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황보세가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예."
"현 황보세가주의 장남의 차남, 황보준 소협이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예, 오라버니."
차기 천하제일검으로 유력한 황보강은 현 가주의 맏손자. 황보준은 그 동생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놀라는 표정 정도는 지을만한데...'
오히려 찌푸려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는 것 같은 표정의 남궁혜를 보고 남궁학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황보세가는 가주 입장에서는 우호관계를 다지기에 아주 유익한 상대다. 하지만 오라비로서는 그리 급하게 상대를 고를 필요는..."
"우선 한 번 정도는 만나보고 결정할게요."
"...그래, 그렇게 하거라."
싱거운 대답에 남궁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것을 물어보았다.
"참, 최근 어머니께 다녀왔다지? 잘 지내고 계시더냐?"
"맞아요, 아가씨. 어머님을 한 번은 찾아뵈어야하는데..."
"괜찮아요, 잘 지내고 계세요."
남궁혜는 황급히 종리소소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적어도 석 달, 가족들이 어머니의 생활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가의 그 누구에게도 언소영을 보이지 않겠다고 강윤과 약속한 것도 있지만, 사실을 알면 오라비가 상심할까 걱정도 되었다.
"혹시 제가 불편할까봐 신경쓰셔서 나가계신게 아닐까 해서요... 아가씨, 혹시 그런 거라면 전혀 마음 쓰지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걱정마세요, 그런거 아니에요, 새언니."
종리소소의 걱정어린 목소리에 대답하면서 남궁혜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마음고생을 해야하는지. 잘못은 어머니를 임신시키고 바깥을 쏘다니고 있는 그 음적이 다 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강윤이 어머니를 찾아 돌아온다면, 그 때는 절대 곱게 넘기지 않을 것이었다.
"에취!"
갑자기 전조도 없이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설마 누가 내 욕을 하고 있을리는 없고...
'아니, 욕할 사람이 없지는 않구나.'
"날씨도 많이 추워졌군. 강 소협도 젊다고 마냥 안심하지 말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또다시 양하정을 찾아왔다. 지금까지 나를 피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이 여자가, 나를 술 먹여 재우고 내 자지를 빨고 갔다는 것을.
'왜 내 자지 빨았어요?'
라고 돌직구로 물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내 자지 빨고 있는거 현장에서 들켰죠? 보지 대요!'
라고 한 다음 따먹고 싶기도 하지만.
이 곳에는 아쉽게도 물증을 남길 스마트폰이 없다. 매소향을 협박한 때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매소향의 경우에는 능풍연이 뿜어내는 마기 자체가 완벽한 물증이 되어주었고 그것을 은폐할 수단조차 없는, 아주 나이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
만약 내가 팽무도나 팽월에게 그것을 까발려버리면? 현장에 숨어있도록 한다면?
혹시나 까발린다고 해도 까발리는 순간부터 나에겐 아무 패도 안 남고 양하정을 따먹기는 요원해진다.
'애초에 얘길 꺼낸 시점에서 믿지도 않고, 양하정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나한테 도를 휘둘러서 강/윤으로 토막을 내버릴 가능성이 훨씬 높지.'
게다가 양하정의 경우에는 설령 현장에서 눈을 뜨고 덮치려고 하더라도 간단히 날 제압하고 유유히 도망쳐서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리라.
'결국은 열쇠는 절정고수를 찍느냐 아니냐인가...'
내 신체는 이미 완연한 절정고수다. 이미 절정 중급에 도달한 상태, 단지 이 신체를 절정에 맞는 수준으로 운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만이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현장에서 양하정을 적발한 다음 제압당하지 않고 섹스를 할 그림이 짜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지난밤에 주신 술... 참 맛있더군요. 이름이..."
"아, 그것 말인가? 백엽선주라고 한다더군. 나도 잘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명주라고 들었네."
양하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그게 조금, 남아있긴 한데... 혹시 관심이 있는가?"
빙고.
"정말입니까? 저야 없어서 못 먹지요."
나는 최대한 사심없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실 남아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중요한 건 내가 또다시 술에 취할 의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날 벗길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못 따먹으면, 따먹히는 것도 괜찮지.'
관심이 떨어졌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안다. 자지를 아는 여자들에게 내 자지는 쉽게 끊을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럼 혹시, 오늘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늘...?"
의아한 표정의 양하정에게 내가 이삼일 안에 떠나야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곧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부디, 촉박한 기한이 양하정이 폭주하는 계기가 되어주길 기원할 뿐이다.
"...형님?"
"왜 그러는가, 아우?"
아니, 바쁘다면서요.
마치 출석 찍듯이 하루 걸러서 오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아우 표정이 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오늘 피곤한가?"
피곤하다고 하고 싶은데, 저건 정말로 피곤하다고 생각해서 물어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술상까지 봐왔는데, 정말 자길 돌려보낼 생각이냐고 시위하는 거지.
"아닙니다, 형님. 들어오시지요."
"그래야지, 아암. 아우의 강철체력이 음주 정도를 못 버텨서 되겠는가?"
강철체력으로 따지면 팽월이 훨씬 윗줄이었지만...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태세로 들어가기 직전, 바깥에서 기별이 왔다.
"어머니...?"
"월아...?"
팽월과 양하정이 서로를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형님, 그렇게 됐습니다. 팽 부인께서 좋은 술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셔서 나눠받을..."
"아, 안 그래도 나는 마실 생각이 없었네! 여기 술과 음식은 두고 갈테니 좋은 시간 보내게."
아니, 그래도 좀 같이 마시시지. 양하정은 술을 두고 도망치듯 사라졌고, 시비는 가져온 음식 중에 안 겹치는 것들만 내려놓고 갔다.
아이씨... 팽월...
"...어머니와 제법 친분을 쌓은 모양이로군."
"예."
한편 팽월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한 소리 들을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치고는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듯 화색을 띠며 양하정이 가져온 술을 딴 팽월은 다시 부어라 마셔라 모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엽선주라, 어머니의 안목도 괜찮으시군."
"아니, 그걸 냄새로 압니까?"
"당연히 모르지. 여기 써있지 않나?"
흘려쓴 글씨체로 써진 이름따위 내가 알게 뭐람.
"마시게, 마셔! 아, 내력 쓰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새끼는 글렀다. 양하정과는 달리 내가 몰래 취기를 배출하려고 하면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 내게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양하정이 나중에 올지도 모르는데, 취하면 안 되는데...'
정신력을 최대한 발휘했지만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알코올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양하정이 가져온 술에 팽월이 챙겨온 술까지 위장에 털어넣는 것을 반복하는 단계에서 내 의식은 암전했다.
될대로 되라지.
양하정은 다시 시비의 부탁을 받아 두 사람이 취해 널브러진 현장으로 돌아왔다.
하인들은 이제 익숙한듯 강윤을 들어서 침상에 눕힌 다음, 팽월을 옮겨서 나갔다.
벌써 3번이나 반복된 일이었기에, 그들의 동작에는 절도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또다시, 양하정만이 객관에 남았다.
'구, 굳이 재울 생각은 없었는데...'
양하정은 그가 취해 잠드는데 전혀 책임이 없었다. 술은 강윤이 먼저 요구했고, 먹인 것은 팽월.
수혈조차 짚지 않았으니 그녀는 완벽하게 떳떳한 입장인 것이다.
양하정은 침상에 취한채 주향섞인 숨결을 내뱉으며 자고 있는 강윤을 바라보았다.
이미 볼 것은 다 보았다. 만져보기도 했고...
'빠, 빨아보기도, 했고...'
양하정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가 지겹게 내세우던 호기심이라는 명분이 이젠 완전히 빛을 잃었다는 사실을.
정액이 묻은 천의 냄새를 떠올릴 때마다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후우..."
침상에 누운 남자의 입에서 나온 숨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기어코 제 나이의 반도 안 되는 사내에게 음심을 품고 말았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꾸짖는 것 같았다.
"소, 소협, 여, 역시, 미안하네. 이렇게 자고 있을 때밖에 사죄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주게."
그녀가 저지른 일은 누구도 모른다.
면전에서 사죄를 한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받을리도 없고 오히려 모르던 사실을 알아서 불쾌하기만 할 것이었다.
단지 양하정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부, 분명 소협에게 도움이 될 날이 온다면 반드시 힘을 보태겠... 앗!"
또다.
누워있던 사내의 팔이 움직여 양하정의 허리를 잡아채 침상 위로 눕혔다.
양하정은 그에게 눕혀지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 될 가능성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사죄는 무슨...!'
스스로가 참 얄팍하다 싶었다. 양하정은 잠시 자조의 미소를 짓고, 자신의 몸에 올려진 사내의 팔을 치우려고 했다.
"양, 하정..."
자신의 이름.
양하정은 등골이 쭈뼛 섰다.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를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적다. 실제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앞의 사내만 해도, 항상 예의바르게 팽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양하정의 시선이 움직여 사내의 얼굴을 보자, 사내는 몽롱하게나마 눈을 뜨고 있었다.
"어맛!"
잠시 사내의 눈을 보고 당황한 순간, 사내는 일어나려던 양하정의 어깨를 잡고 다시 침상에 눕힌 다음, 그 위에 자신의 상체를 올라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반드시... 가진다..."
비현실적인 말. 하지만 잘못 들었을리도 없는, 간단한 말이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양하정은 자신의 기억 중 어디부터가 꿈이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