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04 취했으니까... 괜찮아 (3)
"마님, 그럼 저희들은 이만..."
"고생 많았네. 쉬게나."
자신의 목욕 준비를 마치고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나는 시비들을 보낸 다음, 양하정은 옷을 천천히 벗어내렸다.
평소라면 자세히 보지도 않고 지나쳤을 자신의 몸을, 양하정은 조심스럽게 살폈다.
나름대로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나이 때문인지 살이 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너무 살이 붙어 약간 처진 가슴과 엉덩이.
기름진 아랫배. 무성하게 자란 털.
아직은 괜찮지 않나 싶다가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염치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털 정도는 정리해야...'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도, 이제 아무도 볼 사람이 없을텐데 싶어 도로 생각을 바꾼다.
계속 보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양하정은 우선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어깨까지 깊이 물 속에 담그자, 몸이 따뜻해지면서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잠깐 미쳤던 거야.'
팽월이 손님 처소에까지 찾아가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하정은 걱정이 되는 마음에 찾아가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불안한 예상대로, 두 사람은 심각하게 술에 취해 탁자에 엎드려있었다.
우선 깨워보려고 팽월을 불렀지만, 요지부동. 강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부터가 문제였다.
강윤은 눈도 뜨지 않은채, 양하정의 등으로 왼팔을 감아 젖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스무살 계집아이도 아니고...'
양하정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쳤고, 강윤은 여전히 술에 취해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양하정은 그들을 일으켜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하인들을 불러 그들을 옮기게 시켰다.
'취했으니까... 괜찮아. 기억도 못하겠지. 그러니까 거기까지도 괜찮아.'
정말 넘어갈 수 없는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가, 가슴을... 미쳤어...!'
하인들이 강윤을 침상에 눕히고 팽월을 데리고 물러난 다음, 양하정은 그 곁에 혼자 남았다.
호기심이었다. 정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는 시점에서 이미 글렀다는 사실을 양하정은 잘 알고 있었다.
앞섶을 풀어헤치고, 젖가슴을 꺼내 젊은 남자에게 쥐어보게 하다니, 미쳐도 보통 미친 짓이 아니었다.
강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창 젊은 날의 아가씨도 아니고, 아줌마의 젖가슴을 만지게 한 셈이었으니까.
다행이라면 술에 취해서 절대 기억을 하지 못할 거라는 점.
<혜원...>
이미 연인이 있는듯, 여인의 이름을 중얼대며 젖가슴을 행복한 얼굴로 주물대는 모습을 보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이제 절대 가까이 가지 말자.'
자신의 특수한 사정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런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도 염치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팽무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런 더러운 짓을 저지른 주제에, 가주의 뜻이라면서 뻔뻔하게 현숙한 가모를 연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강윤이라는 남자의 본성을 모르는 양하정으로서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할 일이... 없다!
막상 팽가로 도망을 온 것은 좋은데, 할 일이 더럽게 없었다.
내 생활을 지탱하던 두 축 중에 하나, 농밀한 밀프섹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온 김에 남은 한 축인 무공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명색이 무가에서 제공한 객관이라 연무장은 기본으로 딸려있었으니까.
장법, 지법, 권법, 각법의 투로에 따라 열심히 반복해나가고는 있는데...
'솔직히 재미는 없다...'
꾸준하게 반복하면서 내 동작을 점검하다보면, 부족하다 싶은 부분이 발견은 된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사부, 황보효선, 팽연화, 어머니의 공격에 맞서기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계속 복기해보면 발전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예전에 무심결에 했던 동작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새롭게 인식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고수들의 공격을 받으며 쫓기듯이 수련하다가 문득 실력이 확 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너무 커서 그런가.
점진적으로 실력을 늘리는 것이 솔직히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일류 수준은 거의 마스터했다고 봐야돼.'
구룡쟁패에서 겪었던, 고만고만한 놈들과의 비무를 발판삼아 내 실력은 또 한 단계 올랐다.
이젠 어떤 초식을 언제, 어느 상황에 사용해야하는지가 선명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초식들이, 지금까지 당했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커버해줄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초식을 초월하면 절정고수가 되나?'
흔히 무협소설에서 말하기를, 초식을 초월하면 화경이니, 현경이니 하는 것에 도달하고는 한다.
하지만 초식을 초월한다는 개념이 뭔지 감도 잡히지 않거니와, 애초에 정답인지도 잘 모르겠다.
잡념 탓인지, 초식이 자꾸 어긋나고 같은 실수가 계속 반복된다.
"그만하자."
집중이 되지 않는데 더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나는 면으로 된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연무장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팽가의 제자들인지, 도를 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많이도 돌아다니네..."
팽가에 바쁜 일이 있다고 했었지.
바쁜 사람 틈에서 혼자 한가한 것 같아서 어쩐지 눈치가 보인 나는 사람들을 슬슬 피해서 움직였다.
아오, 혼자 한가하면 묘하게 불편한 코리안 종특.
"그럼 경비 체계가 변하는만큼, 휴게실을 많이 확보해두는 편이 좋겠네. 빈 객관 중에 일부를 전용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 티 안 나게 남을 피하며 걷던 내 귀에 익숙하게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 그쪽도 나를 발견한 듯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황급히 고개를 다시 돌리며 대화를 나누던 중년인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인원이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확정되는대로 알려주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더 남은 거 있나?"
"없습니다."
중년인의 대답에도, 양하정은 한동안 중년인과 대화를 나누었다.
딱히 내가 들어서 문제될 것이 있어보이지는 않는 잡담이었기에, 나는 곁에서 대화가 끝나기를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곧 대화가 끝나고, 중년인은 내게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를 떴고, 이 자리에는 양하정과 나만이 남았다.
"안녕하십니까, 팽 부인."
"...그래, 잘 지내고 있는가?"
양하정은 멈칫거리면서 내 인사에 대답했다.
역시 이거, 날 피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으로야 엄청나게 따먹는 상상을 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저지른 짓은 뭐 없을텐데?
"예. 배려해주신 덕에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자, 잘 됐군. 혹시 불편한 것이 있으면... 날 찾아오게."
어쩐지 날 찾아오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도 내키지 않는 듯한 말의 공백이 느껴지는데.
대체 나는 호감도를 어디서 빻아먹은거지?
"혹시 부인, 지금 바쁘십니까?"
"바쁘지는 않네만..."
"그럼 잠시 저와 차를 한 잔 마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양하정은 손님인 내게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었는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 혹시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양하정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상대 쪽에서 찾아온 것이 아닌가?
젊은 아가씨도 아닌 다음에야 굳이 나이든 어른을 찾아올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고...
양하정은 혹시나 상대의 입에서 자신을 추궁하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부인, 제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만..."
"으, 응?!"
강윤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팽가가 많이 바쁜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 싶어서..."
아하.
양하정은 납득했다.
아마도 팽월이 바빠서 대답해주지 못하니 자신에게 물어보려 온 모양이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양하정이었지만 생각해보니 자신도 흔쾌히 말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관부를 상대로 무인들을 파견해서 지원을 약속받는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기는 조금...'
흔히 관부와 무림은 불가침이라고들 한다.
무림인이라고 한들 국가 입장에서는 무법자 민간인에 지나지 않고,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다면 마땅히 처벌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무공을 익혀 일반 병사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한 무림인을 단속하기에 소모되는 인력과 비용이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묵인하는 것이다.
그런 무림인이, 관부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성장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국가 단위의 지원을 받기는 어렵겠지만...'
일 개 성의 지원만 받더라도, 다른 무림세력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소협, 미안하지만 그건 설명해주기가 어렵네."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그래도 알아보려고 애를 쓸 줄 알았는데, 강윤은 그녀의 거절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차를 홀짝였다.
애초에 강윤의 입장에서는 양하정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화제거리로 물어보았을 뿐, 딱히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 그러고보니 부인께서는 중간에 돌아오셔서 아드님의 비무도 못 보셨겠군요."
팽가의 사정이 궁금해서 그녀를 찾았을 거라는 양하정의 생각과는 달리, 강윤은 그녀를 붙잡아두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팽월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묘사하는 그의 설명은 굉장히 실감나고 유쾌해서, 양하정은 간간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패배로 끝나는 설명인데도, 마치 자신이 승리자인 것처럼 태연하게 입담을 과시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솔직히 성벽을 때리는 기분이더군요.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한 방 때려주겠다고 별렀는데 결국은... 네, 졌습니다."
"푸훗, 그래도 자네는 이제 구룡이 되지 않았나? 거기에 이름을 올린 것만 해도 무림을 짊어질 동량이라는 뜻이니, 아쉬워할 것 없네."
"애초에 못 이길 거라고 알고 올라간 거긴 합니다만... 그래도 머리냐 몸통이냐의 차이가 조금은 아쉽긴 합니다."
전혀 아쉬워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남자는 말을 이었다.
"좋으시겠습니다. 배아파 낳으신 아드님이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라고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지 않습니까? 공동 1등이긴 합니다만."
강윤의 말에 양하정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양하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몰랐는가보군. 월이가 이야기해주지 않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월이는 내 의붓아들일세. 나는 가주의 후처고."
"아아..."
이렇게 말해주면 사람들은 모두 난처한 웃음을 짓고는 했다.
양하정으로서는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말하는 거지만, 아마도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선을 긋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수십년째 자신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은 것 같은 아들이, 친아들로 오인받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배아파 낳으신, 부분은 취소하겠습니다."
양하정은 이채어린 시선으로 강윤을 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못 알아차렸는지, 강윤은 입을 열었다.
"저도 의모를 모시고 있는 몸이라서요. 핏줄이 이어져있으면 좋을지도 모르지만, 안 이어져있어도 아끼고 사랑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더군요."
"...그런가."
강윤이 의모를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는 양하정으로서는, 진솔하고 가슴이 따스해지는 말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좋은 청년을 잠든 사이에 희롱했다는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미안하네. 내 비록 자네에게 사죄조차 하지 못하는 비겁한 사람이지만... 혹시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꼭 힘이 되어주겠네.'
물론 강윤의 머릿속을 볼 수 있었다면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릴 생각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