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03 취했으니까... 괜찮아 (2)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창법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양가창법을 떠올린다.
창이라는 무기 자체가 휴대가 불편해 무림인이 애용하는 병기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법 자체가 보기 드물어진 탓이었다.
무림 역사 속에서 가끔씩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양가창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고는 했는데, 재미있게도 양가창법을 익힌 무인은 보통 관부에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무림세가라기보다는 관가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양가 출신의 여인, 양하정이 팽무도의 후처로 들어가게 된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월이와 같이 왔는가?"
"예, 부인. 제가 하북을 와본 적이 없어, 꼭 한 번 구경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하아... 하필 지금..."
양하정은 팽월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안찰사가 찾아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알았을터, 그런데도 외인을 세가에 들이다니...
무심코 입에 담아버린 말 때문에 사내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양하정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하네. 별 일 아니니 마음 쓰지 말게."
"...그렇습니까?"
팽가가 최근 들어 관부와 유착하면서 세력을 키우려고 한다는 것을 어지간한 무림세력은 다 알고 있을 터였다.
이 청년이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지만 말을 길게 늘어놓아 득이 될 일은 없었다.
"막 도착한 사람을 붙잡아두고 있었군. 그럼 편히 쉬게."
어차피 제자들을 통솔하고, 관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별하는 것은 팽월의 역할이었다.
팽월이 관부와의 연계를 마음에 들어하거나 말거나, 가주의 명령이 내려졌으니 분명히 지시를 수행할터.
어차피 양가와 팽가의 연결을 상징할 뿐인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며, 팽월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양하정은 강윤의 인사를 받으며, 그를 스쳐지나갔다.
'역시 괜찮아.'
팽월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역시 양하정의 나이는 쉰을 넘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밀프충인 나라도 쉽게 먹을 수 없는, 유통기한이 지났다고밖에 볼 수 없는 나이.
하지만 내공 버프로 40대 초반 정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충분히 꼴릿한 암컷이었다.
"소협...?"
가벼운 경장 치마로 가려진 푸짐한 엉덩이가 흔들리며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보던 나는 시비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 시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객관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한 나는, 팽월이 보낸 전갈을 받을 수 있었다.
'내일 아침이라.'
내일 아침에 팽가 가주, 도절 팽무도를 만나고 인사를 올리기로 약속이 잡혔다고 한다.
아마 팽무도는 많이 바쁜 모양인지, 당장은 인사를 못 받는 모양이다.
<하필 지금...>
양하정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어쩌면 팽가는 손님을 받기에는 좀 애매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가능하면 양하정을 따먹고 싶긴 하지만 기간으로 보나, 시기로 보나 어렵겠지.
그냥 적당히 안면이나 터두면서 있다가, 머무를만큼 머물렀다 싶으면 떠나서 당가로 돌아갈 것이다.
내 여자들이 있고, 곧 세상에 태어날 내 아기를 만나러...
"강 아우, 있는가?"
문을 벌컥 열어제끼면서 들어오는 팽월. 아니 조금 전에 전갈 보내지 않았었나?
온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내 잘 생각해보니 말일세, 자네 나와의 술약속을 말 한 마디 없이 깨지 않았나?"
"...그랬죠. 죄송..."
"탓하려는 것은 아닐세. 내 말은 이거야. 나도 말도 없이 한 번은 술자리를 가져도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지."
"...예?"
말이 되는 듯도 하면서 결국 말이 안 되는 신박한 개소리였지만, 팽월의 뒤를 따라서 들어오는 술상을 보고 나는 입을 닫았다.
끝도 없이 식탁 위를 메워가는 요리들의 행진 앞에서, 계속된 승마로 피로한 몸이 칼로리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팽월은 입을 다문 나를 보며 껄껄 웃더니 내게 잔을 권했다.
"아, 내가 깜빡 말을 안 했는데 말이야..."
진한 주향을 풍기는 술을 잔에 가득 붓고 나서 팽월은 말을 맺었다.
"나는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웃으면서 말하면서도 은근히 압박을 넣어오는 것이, 음주강요에 아주 익숙해보였다.
좆됐네. 미쳐버린 참술꾼 새끼.
"자, 일단 한 번에 들이키게, 쭈욱!"
나는 팽월의 강요에 따라 술잔을 비웠고, 팽월 역시도 신이 나서 잔을 비웠다.
술을 마시게 된 김에 나는 팽월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몇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 팽가에 말입니다, 제가 오면 안 되었던 것 아닙니까?"
"응, 무슨 소린가?"
"아까 팽 부인을 뵈었는데, 제가 온 걸 보시고 굉장히 난감해하는 모습이셔서 하는 말입니다."
"아, 어머니... 말이군."
팽월은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술 처먹는다고 구박받는 아들이 보이는 반응치고는, 묘하게 우울해보였다.
"실은, 본가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내가 그 중간 책임자거든."
"...그리고 혹시 지금이 한창 중요한 때인 겁니까?"
"그래."
팽월은 산뜻하게 대답한 다음, 내가 채워준 잔을 즉시 가져다가 입에 대고 들이켰다.
"그럼 절 데려오면 안 되었던게..."
"아, 괜찮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데리고 오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자넬 챙겨주긴 어려울 거라고 말일세."
"아..."
그러고보니 그 비슷한 소릴 했던 것도 같다.
"자네를 데리고 와서 달라지는 건, 조금 정도는 눈치보지 않고 음주가 가능하다는 점 뿐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전 욕먹기 싫습니다. 일은 확실히 해주셔야합니다, 형님."
"암, 여부가 있겠나! 염려할 것 없네, 제자 몇 골라내기만 하면 그만인 일이니까!"
정말 그렇게 쉬운 일일까? 양하정의 표정이 안 좋던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아닐 것 같지만...
"마시자, 마셔!"
알코올에 서서히 맛이 가기 시작한 내 뇌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음... 뭐지... 부드럽다...
매끈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 손에 닿는다...
이거 꼭 여자 가슴 같은...?
"...데...?"
짹짹짹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침상에 눕혀져 있는 것을 보니 어찌어찌 기어들어왔거나, 누가 눕혀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뭔가 꿈 속에서 엄청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섹스하는 꿈... 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흠칫
나는 잽싸게 힘차게 일어선 내 거시기를 만져보았다. 다행이다. 몽정은 안 했구나.
뭔가 극적으로 기분이 좋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으니, 아무래도 그냥 이불의 감촉이 좋았나보다.
[기침하셨습니까?]
"아, 네!"
나는 아랫도리를 이불로 가린채 입실을 허가했다. 발기야, 가라앉아라.
여기도 아침부터 이것저것 준비를 해주는듯, 세수할 물부터 옷가지를 준비해왔다.
"곧 가주님을 뵈러 가야하니, 준비하시지요."
"네, 고마워요."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와보니, 팽월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코를 싸쥐면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네 술냄새 나지 않나!"
"이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팽월은 킬킬대며 웃더니 딱 봐도 써보이는 단환을 건네주었다.
"이걸 꼭꼭 씹어먹게. 좀 맛이 쓰지만 냄새는 가실 거야."
나는 팽월이 시키는대로 단환을 꼭꼭 씹어먹었다. 쓴맛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술냄새는 훨씬 줄어든 것 같았다.
입을 가리고 입김을 뱉어본 다음, 나는 드디어 팽무도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 어머니도 계실 거라네. 괜찮겠나?"
"안 괜찮을 건 또 뭡니까?"
"좋아, 그럼 가지."
나는 팽월을 따라 팽가의 가주전으로 갔다.
가주가 사용하는 처소와는 별도로 지어진 가주전은, 마치 임금이 신하들의 알현을 받는 대전을 연상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대전에는 팽월과 나, 그리고 인사를 받을 팽무도와 양하정을 제외한 누구도 없었지만.
내가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팽 가주가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갑군. 설마 본가로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네."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 실례가 되진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실례라니, 월이가 데려온 손님인데 무슨."
팽무도는 구룡쟁패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호쾌한 태도였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이 곳이 팽가이기 때문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는 절대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절대자이기 때문에 가벼운 태도조차 마음대로 취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얼마든지 편히 있다가 가도 좋네. 대신 월이는 바쁘니, 자주 만나기 어려울 것은 미리 알고있도록 하고."
"예, 가주.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래. 혹시 어려운 일이 있다면 부인을 찾아가게. 어떻소, 부인?"
"예?"
양하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운 와중에 약간의 기대가 피어올랐다.
"이미 안면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소?"
"그, 그렇긴 합니다만..."
양하정은 나를 곁눈질하면서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뭐지? 그새 비호감 스탯을 쌓았나?
내가 뭘 하기는 했나?
"아,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있으니 강 소협도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허어, 그럴 수도 있겠군. 강 소협, 미안하게 되었네."
"...아닙니다."
어떻게든 친밀도를 쌓아서 언젠가 따먹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무너졌다.
하지만 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양하정이 나이를 너무 먹어서 따먹고 싶다는 마음이 스러지기 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팽월과 강윤이 가주전을 물러나자, 팽무도가 양하정에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친구가 혹시 부인에게 뭔가, 무례한 짓이라도 저지른 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흐음..."
팽무도가 기억하기에 양하정은 젊은 후배들에게 후한 편이었다.
팽월이 데려온 동년배의 손님을 상대로 같이 식사도 자주 하고, 차도 마시는 등 잘 챙겨주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혹시 부인이 불편했다면 이해해주시구려. 그럴 뜻으로 말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아닙니다, 가주. 그냥, 월이보다도 거의 열 살은 어린 소협 아닙니까. 저 같은 나이 든 여자를 상대하면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군. 내가 보기에는 다 비슷비슷해보이는데, 월이가 벌써 서른하나가 되었으니."
팽무도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했다. 그가 보기에도 아내의 대답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태도 역시도 딱히 이상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팽무도는 양하정의 가슴이 미친듯이 뛰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