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102 취했으니까... 괜찮아 (1)
그렇게 매소향을 비롯한 화산파 일행은 떠나갔다.
나는 마침 일이 그렇게 된 거 매소향을 따라 화산파 사람들을 배웅해주었다.
"...?"
매소향의 딸이자 삼봉인 능휘연이 나를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기에 애써 웃어주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별 일 없었다.
'실은 별 일이 있는데...'
자궁에서 새어나올 정액을 억지로 참으면서 마차를 타고 갈 매소향을 상상하니, 개운해진 아랫도리에 스멀스멀 성욕이 치밀어오른다.
능풍연아, 이게 다 니 덕분이다!
"윤아, 어디 갔다오니?"
어머니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솔직히 떡치느라 비무 안 봤다고 들키는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반응이 이상하다.
"자네가 손룡인가?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 만나게 되서 반갑네."
갑자기 어머니 옆에서 웬 노인네가 척 나타나서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중후한 생김새에 덩치도 제법 있어보이고,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노인인데, 이상하게 아무 기세도 느껴지지 않...
시발.
설마, 아니겠지?
"처음 뵙겠습니다, 강윤입니다. 제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만, 고인께서는 혹시... 무림맹의..."
말하면서도 쫄린다. 하지만 어쩐지 허리에 찬 저 검이, 황보효선이 차고 있던 그 검과 닮았다는 생각이 내 추측이 맞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래, 맹주일세."
무협 국룰이지. 무림인이 노인인데 기세가 안 느껴지면, 좆밥이 아니라 초고수일 가능성이 높다.
"역시 그렇군요. 검성, 황보 대협을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삼생까진 안 바라니까 이번 생은 좀 살려줍시다, 예?
"광동성에 어떤 악적이 있어 그 자를 잡으러 가다보니 그만...!"
그렇다, 광동성에서 사부가 일을 벌이기로 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일찍 돌아왔나 싶었다.
사부를 찾는데 시간을 좀 끌고, 사부를 발견한 다음, 피해자(=하오문도)를 피해자의 집까지 돌려보내는 시간을 고려하면, 절대 지금 못 돌아오는데?
"측은지심으로 남을 도운 끝에 의부모로 모시는 마음씨 좋은 청년이 누군지 궁금해서 말이오. 피해자 인도는 손녀에게 맡기고 와버렸다오."
황보효선-!
"아들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맹주."
어머니가 어색하게 웃고 있던 이유도 알았다.
아마 매소향을 따먹으러 간 것을 짐작하고 한 소리 하려다가 검성이 오니까 참은게 틀림없다.
"이리 헌앙한 청년이라니, 상상한 그대로요. 내 부맹주에게 듣기로 뛰어난 권장법으로 강호 동도들이 손룡이라 이름 붙여주었다 하던데..."
중2병 같은 그놈의 손룡 타령 좀 그만해주면 좋겠다 싶지만, 터럭만큼의 의심도 두려웠기 때문에 나는 하하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제발, 제발 얘기 끝내고 바로 가라. 도망쳐버리게!
"소협의 사부는 누구인가? 이런 훌륭한 기재를 키워내다니...!"
"사, 사부님께서는 은거고인이십니다.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나셔서..."
"허, 소협의 깊은 내공을 보아하니 사부의 실력도 짐작이 가는데, 일찍 떠나셨다니 안타까운 일이군. 함자가 어찌되시는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과거를 알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시면서...!"
"허어...!"
이건 사부랑 협의가 된 사실이다. 혹시 사부의 이름을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하면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과연 검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듯 하더니,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 국주, 앞으로 여정이 어찌 되오?"
"섬서로 돌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부인과 아들은 섬서를 지나서 사천까지 갈 것 같습니다만..."
"오오, 그렇다면 괜찮겠군. 혹시 동행할 수 있겠소?"
뭐, 시발?
"아무래도 강 소협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마침 가는 길이 같으니 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소."
머릿속이 어질어질하다.
그렇다, 무림맹이 있는 서안은 섬서의 서쪽, 사천 기준으론 북쪽에 있다.
검성 정도로 명성있는 강호 인사가 동행을 요구하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오히려 영광일지도 모른다.
'시발 그래도 동행은 아니지!'
지금 대화만 나눠도 이렇게 쫄리는데 무공 쓸 일까지 생겨봐라. 즉결처형이라도 당하면...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도망쳐야한다. 명분, 명분이 필요해!
"강 아우! 여기 있었구만! 결국 우리 한 잔... 도..."
"팽 형님!"
술고래, 팽월이 눈치없이 말을 걸어오다가 검성을 보고 쭈뼛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동앗줄을 놓칠 수는 없지!
"저도 정말 아쉽습니다, 제 사정으로 한 잔도 못해보다니요!"
첫 날에는 영호경과 일이 터졌고, 그 다음날에는 매소향 따먹기 바빠서 거절했지만, 나는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 강 아우, 어른께서 계신데 내가 실례했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검성은 무림맹의 맹주이면서, 오대세가에서도 가장 끗발이 사는 인물이었다.
팽월로서는 감히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처지. 호랑이를 만난 늑대처럼 비실대며 물러나려던 것을, 다행히 검성이 붙잡았다.
"허허, 노인 때문에 젊은이들이 눈치를 봐야한다니, 안 될 일이지. 이야기 나누고 오게. 술도 한 잔 걸치고 오면 좋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기회다. 절대 놓칠 수 없다.
날 기다리고 있을 당혜원과 팽연화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 이 루트에서 무조건 탈출해야겠다!
"하북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고?"
팽월은 반주로 내온 술을 가볍게 마시며 물었다. 어쩌다보니 유일하게 술자리를 가져보지 못한 구룡, 강윤은 하북에 관심이 많은듯 행동했다.
"살기 좋은 곳이지, 화북평야가 있고, 거기서 나오는 무수한 생산물로 축적된 부까지... 북경이 왜 하북에 있겠나?"
"그렇게 듣기만 해도 상상이 잘 안 가는군요."
"자네, 도망치고 싶은 거지?"
움찔
"티납니까?"
"엄청. 자네도 검성 대협은 역시 무서운 모양이야."
검성은 강했다. 역사적으로 구파보다는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오대세가가 구파의 위치를 위협할만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검의 신.
팽월 자신조차도 검성을 보면 바짝 긴장되는데 강윤은 어련하랴 싶었다.
"초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네. 단지 내가 신경써주기는 쉽지 않을거야."
"저야 불러주시기만 해도..."
"그럼 대신 본가에서 술이나 좀 같이 하세. 부를 때는 안 오다가 자기 필요할 때만 도움을 청하면 그게 올바른 도리인가?"
팽월은 말을 맺은 다음 가득 채운 잔을 쭉 마셨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네 정도 되는 후인이 같이 마신다면 뭐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지."
"...그 정도로 마시는 겁니까? 부모님께서 걱정하실만큼?"
"걱정?"
팽월은 훗 하고 웃었다. 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걱정 따위가 존재하기는 할까?
무림인이 되어서, 관인들의 힘을 빌려 세력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내 조건은 그거 하날세. 받을텐가, 말텐가?"
"받아야죠."
"그럴 줄 알았네. 자, 쭉 들이키게."
강윤이 잔을 들어 한 번에 넘기는 것을 바라보며 팽월은 자신도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아들, 진심이니?]
[죄송해요, 어머니.]
팽월에게 부탁해서, 팽월이 꼭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설정을 덧붙였다.
팽월도 검성의 눈치가 보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젊은 사람들의 교류라는 미명하에 밀어붙인 것이다.
하북이면 그리 멀지도 않으니, 금방 갔다가 올 생각이었다. 요점은 검성을 피하는 거니까.
"허허, 보기 좋군. 나도 예전에는..."
사심없이 웃던 검성이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표정이 팍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곧 주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도로 풀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견문을 넓힐 기회를 노인이 망가뜨려서야 되겠나. 잘 다녀오게."
[화 언니랑 혜원이는 어쩌려고?]
[조금만 갔다올게요... 네?]
검성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한편 어머니와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아들, 잊었니? 혜원이 임신했어. 그런데도 다른 곳에 가겠다고?]
안다. 이제 대략 6개월을 채웠을 것이다.
꼭 돌아가기로 약속했는데... 돌아가는 시기가 늦어지면 걱정할지도 모른다.
[1달만 늦게 갈게요. 아가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테니까...]
[검성 대협 때문에 그러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검성이 문제인 것은 맞지만, 어머니가 보기에는 몸을 피해야할 정도의 일인가 싶을 것이다.
임신한 내 여자를 내버려두기에, 검성을 대하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늦게 돌아간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 틀림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요소인, 내가 혈마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것이다.
'미리 말을 해두는게 좋았을까...?'
결국 언소영이나 당혜원에게 밝힐 때에도, 어쩔 수 없이 밝혔다는 측면이 강했다.
밝혀야하는데, 순순히 밝히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다. 그만큼 사부의 악명은 대단했다.
이번에 만나본 구파 밀프들의 면면을 돌이켜보면, 다들 결혼을 일찍 한 것이 분명했다.
오대세가도 아니고, 구파다. 근본적으로 도인들이 세운 문파이기 때문에 결혼은 필수가 아니지만, 사부를 피해서 모두 결혼한 것이다.
단, 문파의 고급 인력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문파 내에서만 결혼했다는 점이 달랐지만.
아무튼 그렇게 대밀프시대를 열어제낀 사부의 악명을 떠올려보니, 차마 밝힐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믿어도, 되는 거니?]
[꼭, 말씀드릴게요.]
꼭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사실은 알려줘야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팽연화랑 처음 섹스할 때, 사부에 대한 패배감을 바탕으로 섹스연공에라도 의존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걸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엄청나게 깨질 것 같지만... 그래도 말은 해야지.
나는 그렇게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면서, 팽월과 함께 말을 타고 하북으로 향했다.
"으으, 가랑이 찢어진다..."
"아니, 무림인이 겨우 이 정도로 말을 탔다고 죽으려고 하면 어쩌는가?"
"저 말 처음 타본지 한 달 남짓 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경공도 아니고, 승마는 진짜 경험이 얼마 없다.
어머니가 나를 배려해서 천천히 말을 몰았던 것처럼 사흘 남짓이면 도착할 일인데, 팽월은 죽어라고 말을 달려댔다.
한편 당가에서 빌려온 말은 오히려 기분좋게 땀을 흘렸다는 듯이 푸르릉대는데, 확실히 명마는 명마인 것 같다.
덕분에 말을 달리기 시작한 다음날 저녁 쯤에는 팽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 객관에 들어가서 쉬고 있게. 아버지께 먼저 말씀 올려둘테니, 시간 맞춰서 인사올리러 가자고. 기별은 미리 보내두겠네."
자연스럽게 시비를 시켜서 방을 내주라고 하는 것을 보니, 역시 도련님이었다.
해주는 건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언제쯤 되어야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까?
하인의 안내를 받아 자연스럽게 말을 넘겨준 다음, 나는 위풍당당한 건물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당가랑 비교하면... 좀 더 큰가...? 잘 모르겠다.'
팽가나 당가나 크기는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좀 더 연식이 있어보이는 팽가의 건물은 고풍스러운 위엄을 느끼게 했다.
아마 당가는 한 번 뒤집어져서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하던 와중에, 맞은편에서 군청색의 경장을 입은 여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어...'
아는 얼굴이었기에, 나는 인사를 건넸다.
"팽 부인, 또 뵙겠습니다."
"어, 자네...?"
쳐진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여인은 놀란듯 내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기억 못하는듯 했기에, 나는 다시 내 인사를 했다.
"강윤입니다, 다시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부인."
팽가의 가모, 양하정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듯 부드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