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91 어서 오게, 혈마신공의 주인 (2)
잠시 시간을 돌려서, 팽월과 강윤의 비무가 벌어진 날 오후.
영호경은 강윤의 비무를 보면서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감각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대체... 뭐지?'
그는 뭔가 특별했다. 영호경의 기억 속을 좀 더 깊이까지 뒤져보면 알 것도 같은데, 항상 그녀의 의식은 정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강윤의 공격은 집요했다. 팽월의 도에 계속 저지당하면서도 악착같이 파고드는 부분이 있었다.
마치 시정잡배처럼 멱살이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다.
도중에 팽월에게 저지당해 그 동작을 실제로 써먹는 일은 없었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자네가 보기에 저 자는 어떤가?]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서있던 무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 굉장히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역시도 강윤의 공격이 집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본듯 했다. 단, 영호경의 눈치를 살핀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평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달랐다.
그녀의 고민은 강윤의 비무가 끝나고, 이어지는 비무 한 번이 더 끝날 때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을 끝낸 것은 고민의 해답이 아닌, 외부적 요인이었다.
[소교주, 수상한 자를 잡았습니다.]
그들이 통째로 빌려 사용하고 있는 장원, 그 곳의 주인은 사실 진작에 명교에 투신한 인물이었다.
소림의 근처에 명교의 고수가 올 일이 없어 그저 평범한 장원에 불과했지만, 그 곳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든 것이다.
"용케도 꼬리를 잡았군. 하오문이라고?"
"예, 소교주."
능풍연을 비롯한 몇몇 정파 후기지수들에게 들어가도록 손을 쓴 영단은 일단 복용만 하면 결코 꼬리가 잡힐 일이 없는 물건이었다.
곤륜이나 일부 무공이 유출된 정파의 명숙들의 신분을 빌렸으니 본인들에게 확인한다면 곧 들통이 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이다.
영호경은 지풍으로 손님, 도여중의 아혈을 풀어주었지만 그 때부터 그녀는 듣기 싫은 말을 들어야만 했다.
살려달라는 말, 어쩔 수 없었다는 말, 그런 무의미한 말이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영호경은 수혈을 짚어 재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자네, 다 알아두었겠지?"
"예, 소교주."
마교의 뒤를 캘 정도면 꽤나 기개있는 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실망한 영호경은 수하의 설명으로 곧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강윤, 그 자인가."
"치울까요?"
수하의 질문에 영호경은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어차피 중요한 계획도 아니었다. 안 들키면 좋고, 들키면 어쩔 수 없는 정도의.
소림에서 조용히 염탐만 하다 돌아오라는 아버지, 교주에 대한 작은 반발에 지나지 않았다.
무림을 일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배는 곧 무너진다는 핑계로 신강 구석에 처박혀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
혈마 역시도 명교를 돕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영호경은 척박한 신강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교도들을 지켜만 봐야했다.
'그 두 사람만 힘을 보태준다면, 분명 명교천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던 도중, 혈마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영호경은 깨달았다.
강윤.
그 자의 행동이 누구를 닮았는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혈마, 혈마다. 그 자는 분명 혈마신공의 주인이다.
영호경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쓰러질 것 같다.
이런 기세가 사방에 쏘아진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텐데, 조용한 것을 보니 이 지독한 압력은 내게만 집중되는 것이 분명했다.
'혈마신공...?'
등선공을 말하는 건가? 젠장, 대체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거야?
도여중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최대한 내력을 끌어올려 대항했지만, 강물을 모래성으로 막아내려는 시도나 다름없었다.
내가 서서히 한계에 도달할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이 되어서야, 내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서서히 기세가 감소했다.
심적으로 몸을 앞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던 건지, 나는 기세가 사라지자마자 앞으로 두세걸음을 나아가다 멈췄다.
"누구야...!"
"우리 구면이지 않나?"
싱거운듯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도여중의 시체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숨어있었는지, 대여섯명 정도 되는 자들이 내 눈앞에 서있었다.
"당신...!"
그리고 그 선두에는 지난번에 만났던 귀부인, 유경이 서있었다.
"기억이 나는가보군? 다시 만나 반갑네, 혈마의 제자... 제자, 맞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한계까지 팽팽해졌던 내 신경은, 그래도 봤던 얼굴이라고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다. 물론 완전히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시치미떼지 말게. 자네 정도의 나이에 도문의 내공을 그렇게 깊이있게 쌓을 수 있는 심법은 하나 뿐이야. 혈마신공 뿐이지."
"다른 문파 제자들도 이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혈단의 마기를 감지할 능력이 없지. 틀린가?"
성혈단? 아, 젠장. 능풍연. 그 새끼가 먹은 약 이름이 그건가보다. 괜히 알아보라고 시켜서!
"성혈단의 마기를 감지하려면, 영약을 섭취해서 얻은 내공이 아닌, 순수하게 쌓은 도문이나 불문의 내공으로 절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하지."
"..."
"하지만 그런 쪽의 심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축기되는 속도가 늦어.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연단법을 개발해서 사용하게 되었지."
재능이 없는 제자라도 저급한 영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라고 덧붙이며 영호경은 웃었다.
"알겠나? 자네 뿐이야. 성혈단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도, 알아차릴 사람도."
"천하를 뒤져보면 다른 심법이 또 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심법은 아닐 거야. 게다가 난 자네가 혈마의 제자라고 확신하네. 두 사람은 너무 닮았거든."
"...?"
"그 자나 자네의 공통점. 무공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지. 무공 자체가 결코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는 여색을 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무공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 그저 여색을 탐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무공을 높인 자에 지나지 않아."
"...저는요?"
"자네는 승리에만 관심이 있지. 자네가 무공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알아. 자네에게 무공이란 상대를 이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아."
"..."
"얼핏 달라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무(武)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어. 이런 무인이 흔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말게."
어떠냐는 듯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유경에게는 미안하지만 결과는 맞을지 몰라도 과정이 전혀 틀렸다.
오히려 사부야말로 등선을 위해 무를 갈고 닦는데 관심이 많고, 나는 밀프를 꼬셔서 따먹는데만 관심이 있다.
"천하제일무공, 혈마신공을 가진 두 사람이 이렇게 닮았는데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아닐리가 없지. 하지만 난 자네가 더 마음에 드네."
이런 두루뭉술한 것을 근거로 내놓는 사람의 문제점은, 상대의 반박을 받아도 아무튼 내 말이 맞다고 덮어놓고 말하는 점이다.
나는 일찌감치 반박을 포기하고 다른 것부터 묻기로 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대충 짐작은 간다. 이 정도로 무력의 차이가 난다는 건, 초절정고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자. 하지만 정파 여고수 중에 초절정은 공식적으로 팽연화 한 명뿐이다.
사파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 그런데 여자라면 분명 채찍을 쓴다고 들었는데?
"아, 그러고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검을 허리에 찬 유경은 가슴 아래에 팔짱을 끼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나는 명교 교주의 적녀이자 소교주, 영호경이다."
그리고 허리를 반쯤 숙인 내 얼굴에 바짝 얼굴을 마주 들이밀었다.
"자네, 혹시 내 것이 될 생각은 없나?"
가슴 크네.
"안 됩니다."
면전에서 거절이 날아오자, 수하들이 검병에 손을 얹는 것을 영호경이 손을 흔들어 말렸다.
"싫다는게 아니로군?"
"제자가 되서 사부님의 허락도 없이 다른 세력에 속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정은 하지 않기로 했나보군."
"당신이 정말 명교의 소교주라면, 숨기지 않아도 될테니까요."
영호경은 갈무리된 마기를 살짝 개방했다. 남자는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이 정말 명교의 소교주라면, 이라는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푸훗."
영호경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마기를 갈무리했다. 직설적으로 말을 해오는데도 묘하게 쉽게 굽히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네 사부가 반대하면, 그 때는 어쩔텐가?"
"그 때의 제 생각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끌리면 사부님 몰래라도 따르는 거고, 마음이 안 끌리면 마는 거고요."
영호경은 그 대답에 깔깔대며 웃었다. 수하들이 당황하는 모습에 더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네를 아래에 두고 싶으면 당근을 제시하라?"
"모든 조직의 장들이 당연히 하고 있는 일이죠."
"채찍으로 말을 듣게 하는 방법도 있네만?"
"저희 사부님이 그 채찍부터 끊어버릴 겁니다."
부하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는데도, 젊은 청년 하나가 태연하게 말을 뱉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선 본교로 같이 가세."
"...예?"
"우선 본교에 가봐야, 내가 자네에게 무슨 당근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지 않겠나?"
혈마의 제자를 거둘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영호경은 이 자에게 무엇을 해주면 될까 생각했다.
'본교가 소유한 수많은 무공비급, 아니 이 자에겐 필요없겠군. 영약... 은 필요할까? 돈... 돈이라면 좋아하겠군...'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사부님께서 제게 내리신 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완수해야합니다."
"명?"
영호경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왜 넘어올 것처럼 말하더니 뒤늦게 발을 뺀다는 말인가.
"제가 왜 정파들 틈에서 행동하고 있겠습니까? 사부님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으음..."
딴에는 맞는 말 같았기 때문에 영호경은 망설였다.
아무리 그녀가 초절정고수라도 혈마의 일을 방해하는 일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금방 끝나는 일은 아닌가...?"
"오래 걸릴 겁니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게 아닌가 싶어 자세히 살폈지만, 그런 낌새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호흡의 변화, 얼굴 근육의 움직임 어디에서도 수상함을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중... 나중에라도 꼭 본교에 방문하도록 하게."
영호경에게 있어서 강윤은 개인적으로도 마음에 드는 상대였지만, 명교천하를 위해 혈마를 끌어들일 가교 역할을 해줄 상대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죠."
"꼭 와야하네. 오지 않으면 찾으러 갈 거니까."
영호경은 그렇게 엄포를 놓았다.
절대 놓칠 수 없는 상대, 척박한 신강에서 고통받는 교도들을 구해줄 열쇠가 될지 모르는 사람.
지금은 놓아주지만, 1년이 지나도 찾아오지 않으면 그녀는 반드시 강윤을 잡으러 중원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정파와 부딪혀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