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90화 (90/383)

밀푸색마 EP.90 어서 오게, 혈마신공의 주인 (1)

"비무 일정이 바뀌었다구요?"

"예, 소협."

점심 정도에 찾아온 어린 소림승의 설명은 이러했다.

준준결승의 패자조 4명 중에서 구룡을 선발하는 기준이 공정치 못하다는 의견이 나와서, 그들끼리도 비무를 벌이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생각해도 무림 명숙들끼리 수군수군해서 결정하는 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의견, 혹시 화산에서 나온 겁니까?"

"...소승은 들은 바가 없어 알지 못합니다."

맞네, 맞아! 이거 표정 보니까 딱 맞네!

비무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원래는 팽월과 견용진을 상대로 제법 잘 싸웠던 소림과 남궁세가의 두 사람이 유력할 거라고 들었다.

3,4등을 먹을 나나 점창 곽도흥이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일텐데, 딱히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건 아니거든.

결국 능풍연이나, 곽도흥한테 진 곤륜에서 불만이 나온 걸텐데 내 촉은 능풍연 쪽이 수상하다고 외쳤다.

"소, 소승은 그럼 이만..."

내 표정에서 들켰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소림승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날짜가 밀리는 것도 아니고 시간대가 조금 밀리는 것뿐이니까.

단지 약간의 아쉬움 정도가 느껴질 뿐이었다.

어차피 다른 놈들도 실력이 좋은 것 같고, 능풍연이 이기기는 쉽지 않을테니 괜찮겠지만.

시발, 이게 아닌데?

"허, 능 소협의 실력이 저번에 보여준게 다가 아니었나보군. 아니면 그 날 깨달은 바가 많았던 건가?"

1차전에서 탈락해 그 이후로 대기실에서 관전만 하던 도여중은 태평한 목소리로 감탄하는 듯했다.

하지만, 눈으로는 내게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는 신호를 보내왔다.

능풍연은 남궁창과 대결하게 되었다. 동전을 던져서 짝을 정한 것 같은데, 마침 4명밖에 없으니 괜찮은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비무를 치른 소림이 곤륜을 무난히 이겼고, 능풍연과 남궁창의 대결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이 휘몰아칠 때마다,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은 기를 펴지 못하고 밀려나는 것이다.

[뭔가 수상한데... 듣기로는 화산에서 이번 비무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뭔가 숨겨둔 한 수가 있었던 건가?]

[아니, 없었을 겁니다. 있었다면 나와 대결할 때 진작에 썼겠죠.]

차라리 깨달음을 얻고 한층 정묘한 초식을 선보였다면 납득했을 수도 있다.

무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깨달음 하나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지만, 충분히 쌓인게 있는 상황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제법 큰 발전을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건 내공빨이다. 저 정도면 나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우위일 거다.

'없던 내공이 갑자기 생긴다?'

나처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게 급격하게 내공을 늘릴 방법은 단 하나.

영약뿐이었다.

"아이고, 이런."

도여중의 탄식에 다시 비무대를 보니, 남궁창의 검이 여섯 줄기의 매화 가운데 5개는 격퇴했지만 하나는 막아내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매화검기가 맺힌 능풍연의 검이 남궁창의 심장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졌소."

"양보해주어 고맙소."

이를 악물고 패배를 인정한 남궁창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검을 거두는 능풍연.

능풍연은 주변의 환호에 화답해주면서 비무대를 내려오던 중,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뭔가 크게 달라지긴 한 것 같은데...

'어?'

내 앞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나는 예전에 느껴본 기운을 느꼈다.

당시 상황 탓인지, 더욱 불쾌하게 느껴지는 기운.

[도 형.]

도여중은 내 전음에 고개도 안 돌리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오?]

나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확인차 물었다.

[혹시, 내공에 마기가 섞이면서 내력이 급증하는 약 같은게 있습니까?]

능풍연이 풍기는 그 기운은 틀림없는 마기였다.

사천의 시전에서 공격해왔던, 그 머저리와 똑같은.

제갈미령은 아들의 비무가 시작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미 아들이 목표로 하는 지점까지는 도달한 상태.

애초에 명예 따위에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시작도 전에 기권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윤이가 팽월을 이기기는 어렵지 않겠소?"

"그렇겠죠. 다치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남편인 고천이 옆에서 살갑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 아침, 제갈미령과 밤을 보냈다고 착각한 이후로 태도가 더욱 살갑게 변한 남편.

이 나이 먹고 주책이라면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치밀어오르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제갈미령은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팽월의 모습을 보았다.

거대한 도, 인왕처럼 거대한 체구.

제법 커다란 체구의 아들이지만 팽월에 비하면 갸냘퍼보일 지경이었다.

비무의 시작이 선언되고, 두 사람은 다짜고짜 맞붙었다.

느릿한 움직임의 팽월에 비해, 쾌속한 움직임으로 접근한 아들은 팽월에게 권격을 쏟아냈다.

끝없이 요동치며 어디로 뻗어나갈지 알 수 없는 3개의 권격이, 이윽고 하나로 모여 팽월의 어깨를 노렸다.

하지만 팽월은 그것을 예측했는지 도의 길다란 손잡이를 틀어 권격을 차단했다.

이어서 수평으로 호선을 그리는 도가 아들을 덮쳐갔지만 아들은 몸을 낮춰 오히려 접근했다.

"안 되겠군..."

고천의 탄식어린 목소리에 제갈미령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선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들은 역시 팽월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충실한 중도(重刀)에 후발선제(後發先制)... 마치 요새같군."

중도의 막강한 파괴력은 적중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다. 무게를 싣기 위해 희생한 속도가 아쉬워지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이 후발선제의 묘리와 결합하는 순간, 중도의 약점은 크게 완화된다.

늦게 시작된 움직임으로 먼저 제압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 무리(武理)는 상대보다 쾌속하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 움직임을 역이용해 상대가 알아서 약점을 내놓고 공격은 빗나가도록 만드는 수법.

"윤이도 오호단문도법의 투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텐데도 저 정도로 차이가 나는군요..."

"투로를 안다고 전부 파악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절정고수겠소."

다행이라면 팽월에게는 독랄한 수법을 사용할 의지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덕분에 아들은 충분히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묵직한 도가 아들을 향해 휘둘러질 때마다 제갈미령은 무사할 것을 알면서도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남편이 두툼한 손을 뻗어 꼭 잡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부인도 보면 알지 않소? 팽월도 적당한 선에서 끝낼 것 같으니 염려마시구려."

제갈미령은 남편의 따뜻한 말에 다시금 죄책감을 느꼈다.

이 손의 떨림이, 어미로서의 마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제갈미령은 너무 잘 알았다.

"졌습니다."

"양보해줘서 고맙네."

나는 결국 마땅히 유효타 한 방 먹이지 못한채 팽월에게 항복을 선언해야했다.

정말 기운이 쪽 빠지도록 쥐어짜보았지만, 팽월의 몸에 닿았던 공격은 겨우 4번.

그나마도 도풍에 휘말려 모기 무는 것만도 못해진 공격은 팽월이 뿜어낸 호신지기를 뚫지 못했다.

"그래도 아우 정도면 잘한거야. 내 오늘 위로주 살 때 비싼 안주까지 덤으로 사지."

"사양않고 먹겠습니다."

그래도 팽월이 날린 공격은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 미친놈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 결과가 겨우 그거라는게 허무하긴 하지만.

팽월과 사이좋게 비무대를 내려와서 이어지는 무당 견용진과 점창 곽도흥의 비무를 구경하기 시작한 나는, 비무대에 올라가기 전 도여중과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마기...? 무슨 소리요?>

<도 형에겐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능풍연에게서 마기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도문이나 불문의 내공을 익히면 마기에 예민해진다는 말은 들었소만... 무당의 견용진이나 점창의 곽도흥도 도문 아니오? 소림의 진륭에게서도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이유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분명히 느껴지고 있어요.>

내 끈질긴 주장에 도여중은 결국 알아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간혹 능풍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신만만한 표정인 것을 보면, 마기가 풍긴다는걸 스스로도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안 들킬 자신이 있는 건가.

"아마 스스로도 모르겠지."

"예?"

팽월이 갑자기 내뱉은 말에,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들었다.

"저기 곽 소협 말일세, 검이 너무 급해. 저러면 안 된다는 걸 배웠을텐데 말이야."

무학에서 쾌와 중은 서로 반대되는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서로가 어떨 때가 가장 까다로운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빠르면 좋은 것 아닙니까?"

"중요한 건 실제로 빠른게 아니야. 상대에게 빠르다고 인식되는 것, 그리고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

팽월의 입에서 나오는 설명에, 나는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학이란 무엇인가? 다른 거 다 제쳐놓고 상대에게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격을 닿게 할 것인가 연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네."

동물의 형상을 본떴느니, 자연의 이치를 빌렸느니 하는 것은 다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한 팽월의 설명은 통렬했다.

"쾌는 빠르지. 하지만 저렇게 완급없이 빠르게만 들어가는 검은 그 속도에 적응된 상대에게 파악되고, 분석당하지. 그 다음은?"

그 때, 견용진의 송문고검이 엄밀한 선을 그으며 허공에 그물을 그렸다.

마치 팽월의 말에 대답해주는 것처럼, 한쪽으로 치우쳐진 곽도흥의 사일검법을 태극혜검법이 감싸안은 끝에 두 사람의 검이 춤사위를 멈추었다.

견용진의 검이 곽도흥의 목 바로 옆에 세워진 상태로.

"유도당하는 거야. 먹기 좋고 깔끔하게."

팽월의 호승심 넘치는 시선이 견용진을 향했고, 곽도흥의 항복을 받아낸 견용진 역시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뭐야, 얘들 스포츠물 주인공 같아.

아무튼 그렇게, 능풍연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예상한대로 구룡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팽월이 예고한대로, 그 날 저녁 화화루라는 이름의 주루에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는 솔직히 빠질까 굉장히 고민했지만, 결국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인맥이라는 것은 소중한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가는 것은 서운했기 때문에, 잠시 급한 일만 처리하고 가겠다고 한 다음 몰래 숨어서 어머니 안에 한 번 진하게 싸주고 나왔다.

임신하면 안정기까지 섹스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덕분에 나는 혼자서 주루를 찾아가야했지만, 유명한 주루라니 찾아가는데 걱정은 없었다.

'봐, 금방 찾았지.'

등불만으로도 화려하게 주변을 비추는 그 건물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들어가려던 찰나.

[강 소협.]

도여중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전음을 보내왔는지 몰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어두운 골목에 서서 내게 손짓하는 도여중이 보였다.

'왜 저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생각없이 걸어가다가, 골목에 발을 디디는 순간 어쩐지 소름이 돋아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 발이 딛고 있는, 빛과 어둠의 경계선.

왜 이런 곳에 나를 부르는 거지?

도여중의 표정이 다급해지면서 내게 손을 세차게 흔들었지만,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붙어있지 않았다는 것처럼, 도여중의 목이 툭 떨어진 직후 내게 어마어마한 기세가 쏟아져왔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날 처음 만난 팽연화가 마치 시험삼아 뿜어냈던 기세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세.

[어서 오게, 혈마신공의 주인.]

마치 태풍 속에 갇힌 것처럼 나를 뒤흔드는 이 기세 때문인지, 어둠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독 냉랭하게 들렸다.

도망치면 죽는다. 나는 그 사실을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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