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86 이름이 뭐더라... (4)
능풍연은 주먹만한 목함에 든 붉은 환약을 노려보았다.
<사, 사형, 실은...>
그 밉살맞은 강윤이라는 놈과의 대결을 하루 앞둔 오늘, 시전에서 행인과 부딪힌 사제의 가슴에서 떨어진 물건이었다.
무림인이라는 놈이 행인도 못 피해서 넘어지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고 노호성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이런 수상한 물건이 사제의 품에서 떨어진 것이다.
사제의 말로는 자신이 곤륜의 무허자에게서 받은 물건이라고, 제발 비밀로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능풍연은 일단 압수해두었다.
이야기만 듣기로는 사실 같았지만 역시 이런 문제는 사문의 조사들에게 보고한 다음 대처하는 것이 마땅한 법.
'하지만 제대로 된 물건 같기는 해...'
약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은한 약향을 풍기는 이 환약은 자신도 한 번 먹었던 자소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복용자에게 막대한 내공을 선물하는 이런 영단을 만약 자신이 먹는다면...
탁
능풍연은 그런 생각을 지우면서 목함의 뚜껑을 닫았다. 사제가 받았던 물건을 탐하다니,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
당장 내일의 비무만 승리하면 그에게는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는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지렁이 자식이...!'
초식도, 내력도 별 것 없는 놈 주제에 건방지게 대드는 모습이 떠오르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구파도, 오대세가도 아닌 놈.
심지어 아버지인 고천의 무공조차 이어받지 못한 주제에, 화산의 촉망받는 적전제자인 자신을 이겨보겠다고?
"어머니랑은 상관없이, 네놈은 꼭 눌러주마...!"
구파가 왜 구파인지, 그 무공의 깊이를 똑똑히 알려주고 말겠다고 다짐하는 능풍연이었다.
8명밖에 남지 않은 지금, 비무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치러지는 비무는 단 네 번. 4개나 되는 비무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대신 더 많은 관객들과, 특히 무림의 명숙들이 관람을 위해 모여들었다.
비무를 치를 8명 중에 6명은 구룡. 지금까지는 어중이떠중이가 섞인 경기였지만 이제야말로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내게 보였던 불손한 언사,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테니 각오하시오."
"후회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관객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사이, 강윤과 능풍연 두 사람은 첫번째 비무를 위해 마주 서서 말을 주고 받았다.
서로 자신의 절기를 밝히고, 두 사람은 상대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한 발짝 한 발짝 위치를 옮기면서도, 상대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으며 비무대를 빙빙 돌던 끝에.
그 대치를 먼저 깬 것은 능풍연이었다.
매화검기가 줄기줄기 뻗쳐나오는 검이, 허공을 사선으로 가르며 짓쳐들어갔다.
강윤은 회피하려다 생각을 바꾸고 장력을 뿌리며 맞섰다. 과연 매화검기가 공간을 장악하려던 시도가 천양장에 맞부딪혀 깨져나갔다.
검기에 맞부딪히면서 산들바람처럼 흩어진 천양장을 갈라내며 열두가닥의 검기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그 검기 중에 일부는 장력이 맺힌 손바닥에 잡혀 바스러졌지만, 일부는 여전히 요혈을 노리고 있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파고드는 검기를 철판교의 수법으로 피해낸 강윤은, 팔로 몸을 지탱한채 내리찍어오는 검을 각법으로 받아쳤다.
깡
육체와 검이 닿았을진대,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검이 세차게 흔들리며 물러났다.
"으윽...!"
신음성을 흘리며 능풍연이 한 발짝 물러난 순간을 노려 다시 일어난 강윤의 손에서 지풍과 장력이 한꺼번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강의 장력과 음유한 지풍이 동시에 몰아치니 능풍연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차례차례 풀어냈다.
지풍은 매화유인(梅花有刃)의 초식으로 하나하나 격퇴하고, 장력은 결을 따라 부드럽게 스며드는 매화연영(梅花連永)에 힘을 잃고 흩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공방이 잠시 멈추고, 관객들이 환호하는 사이에 능풍연이 중얼거렸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매 여협이 얘기해주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들은 능풍연이 얼굴이 벌개져서 늘어뜨렸던 검을 강윤에게 겨누었다.
분명 매소향이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수차례 하기는 했다. 그마저도 짐작했다는 것은...
"날 가지고 놀았나. 이젠 정말 봐주지 않겠소."
"좋은 시절 다 갔군요."
잠시 거리를 두었던 두 사람은 다시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 것은 능풍연 쪽이었다.
'이 자식... 내공이 대체...!'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사조로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단 하루도 운기행공을 게을리해본 적이 없는 능풍연이었다.
자소단을 복용하여 그 약효까지 사조가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상, 내공으로는 분명 동년배에서 당할 자가 없을터.
대체 어디에서 이런 놈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마공이라도, 익힌 건가? 있을 수 없어...!"
"제 내공은 정통 도문의 내공입니다만... 그거 참 대단한 마공이로군요."
비꼬는 말에 화기가 치솟았지만, 능풍연으로서는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 가면 지쳐서 패배할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 능풍연은, 빨리 승부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연이어 절초를 펼쳤다.
한편 미꾸라지처럼 공세에서 빠져나가던 강윤은 지친 것인지 공격이 계속 헛나가서 바닥을 두드리고 돌판을 깨부술 뿐이었다.
'그래, 네놈도 지치겠지! 한 번만 걸려라, 한 번만...!'
비틀
보법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이던 강윤의 다리가 바닥을 헛짚으면서 자세가 흔들리는 순간, 능풍연은 기회임을 직감했다.
능풍연의 검이 매화일첨(梅花一尖)의 초식에 따라 섬전처럼 찔러들어가는 것을 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자칫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찌르기를 잘못 받았다가는 치명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세간에 소위 고수로 불리는 명숙들은 혀를 찼다.
'성급하구나.'
보통 찌르기는 강력하고 빠른 초식이지만, 상대가 그 상황을 예측했거나 유도했을 경우 최악의 한 수로 바뀐다.
능풍연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강윤의 몸은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자세가 무너져 반쯤 쓰러진 강윤을 향해 찔러들어가던 검이, 어느샌가 뻗어온 손에 잡혀 강제로 잡아당겨졌다.
그 검 끝이 향하는 곳은 돌판이 박살나 나무 골격을 드러낸 비무대였다.
쩌어억
나무의 조직 사이로 제대로 꽂혀버린 검을 뽑는 것은 제아무리 고수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능풍연은 성급함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빠아악
머리가 터져나가지 않을 정도로 조절된 권기가 담긴 주먹이, 능풍연의 턱을 때리고 그에게서 의식을 앗아갔다.
'개자식...!'
능풍연이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간 강윤의 표정이었다.
휴, 새끼. 생각보다 존나 세네. 요정립보다도 능풍연이 훨씬 더 세겠는데?
원래는 나를 얕잡아보게 냅뒀다가 쳐발리는 꼴을 보여줘서 구룡에서 떨굴 생각이었는데, 방심한 와중에도 대응능력이 좋아서 고생 좀 했다.
아마 명숙들이 보는 눈이 있으면 얘가 완전히 병신은 아니란걸 금방 알아보겠지.
나머지 6명 중에 패배할 3명이 더 활약하길 기도해볼까. 부디 이놈이 구룡에서 떨어지기를.
"규정위반이에요!"
아니, 뭐래.
내가 돌아보니 매소향이 노발대발하며 소릴 질러대고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설명해주시지요, 매 여협."
오, 아버지.
지금까지 출석율이 들쭉날쭉하던 아버지는 역시 준준결승쯤 되니 확실하게 출석하고 있었다.
"이는 제 아들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명확한 설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나를 요 며칠 계산기처럼 부려먹던 아버지가 달라보인다.
"저는 그 발언을 좌시할 수 없는 입장임을 알려드립니다."
"분명 구룡쟁패의 규정에는 상대에게 사용할 수단을 명확히 제시하라는 규정이 있어요! 비무대를 활용한다는 건 규정위반이라구요!"
음,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확실히 나는 내 수족으로 싸운다고 했지, 비무대를 쓴다고는 안 했으니까. 근데 결국은 개소리잖아.
일부 명숙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웅성대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매 여협, 그렇다면 다음 구룡쟁패부터는 능공허도를 익힌 사람만 참가자로 받아야겠군요."
"뭐라구요?"
어머니의 음성에는 명백하게 비꼬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가 비무대에 서서 비무를 벌이고 있죠. 능공허도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비무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비무를 치르겠어요?"
"..."
"게다가 비무대에서 진각을 밟아서 권을 질러넣는 권법가는 비무대의 힘을 빌리는게 아닌가요?"
"그, 그건, 달라요! 비무대를 활용해서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건..."
매소향은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빙긋 웃으며 매소향이 흐린 말을 완성해주었다.
"그럼, 비무대에 상대의 몸을 메친 사람은 모두 규정위반이 되겠군요. 지금까지 그런 참가자가 몇 명이나 더 있나 알아볼까요?"
어머니는 득의양양하게 말했고, 매소향은 실언을 사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매소향도 자기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걸 모르는게 아니었을 거다.
아들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무너지니까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이 소란을 지켜본 관객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길어지자, 매소향은 신형을 날려 비무대에 내려와서 실려가는 아들을 따라 의국으로 가버렸다.
이만하면 그래도 제대로 망신을 주는데 성공한거 아닐까?
내가 구룡을 확정지은게 기쁜 것인지, 매소향 모자를 엿먹인게 좋은 것인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환하게 빛내주고 있었다.
3차전이 끝났다. 살아남은 것은 나, 팽가의 팽월, 무당의 견용진, 점창의 곽도흥이었다.
사실상 나와 곽도흥은 서비스 스테이지 몹 같은 거고, 실제로 우승은 팽월과 견용진의 싸움이 되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자, 마시러 가세!"
놔, 이 새끼야! 나 집에 가야된다고!
소위 음주형 인싸 타입인듯한 팽월이 나머지 세 사람을 강제로 끌고 술을 마시러 가려고 해서 지랄이 났다.
아무래도 이 4명은 패배조 4명과 다르게 구룡 확정이다보니 서로 친분을 다지자는 의미 같았다.
"이 참에 우리 호칭도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응, 어떤가 강 아우? 응?"
알코올 한 방울도 안 들어간 것치고는 팽월의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다.
"호칭은 좋습니다만, 형님, 오늘은 아우가 부모님과 약속이..."
"어허, 사내대장부가 축배를 부모님과 들다니,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명색이 호걸은 호걸답게... 윽!"
팽월이 신음성을 흘리며 내 어깨를 놓아주었다. 견용진이 팽월의 팔을 꺾어버린 것이다.
"멧돼지, 남의 가족 사정에 참견하는게 네놈의 예의인가?"
"어허, 우리 학 나으리께서는 뭐가 그리 불만인가? 사내끼리, 응? 호방하게 술 한 잔 하자는데!"
"사람간에는 지켜야할 예의가 있는 법이다. 강 소협, 그냥 가게. 이 머저리와 같이 다니다보면 술병만 얻을 거야."
구파와 오대세가의 젊은 층을 대표하는 고수들 사이답지 않게, 두 사람은 제법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 같았다.
보통 구파 출신이랑 오대세가 출신은 사이가 나쁘다고 하던데, 신기하네.
멧돼지와 학. 덩치가 좋은 팽월과, 팔다리가 길쭉하게 뻗은 견용진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며칠 안에, 시간 한 번 꼭 내보겠습니다. 그 때는 견 대협께서도 같이 드시죠."
두 사람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팽월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 그 때는 나한테 졌을텐데 마시겠다고? 그래도 되나?"
아,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질척대는 거였어? 박살내놓기 전에 사이좋아지려고?
"졌으면 실력이 안 되서 지는 거겠죠. 그런 걸로 꽁할 사람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좋아, 좋아! 꼭 한 번 보세!"
내 말에 팽월이 제 허벅지를 탁 치면서 좋아했다.
내일은 안 된다. 아무리 결과가 뻔해도 비무 전날 음주를 하겠다고 하면 다들 말릴테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대강 정리되자 나는 세 사람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 숙소를 향해 달렸다.
드디어, 결행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