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85 이름이 뭐더라... (3)
어제부터 하루가 지났는데 대기실이 꽤나 한산해졌다.
도여중은 예선에서 살아남아 내 옆에서 계속 떠들고 있었다.
태반이 쓸데없는 소리였지만, 지나가는 고수를 보면 누구인지 전음으로 꼭 알려주었다.
[저 자는 팽월이오. 절정고수지. 젊은 층에서 저 자보다 뛰어난 도법의 고수는 없다고 보면 되오.]
[저 자는 소림의 진륭이군. 결혼할 일도 없는 중이 구룡이라니 욕심도 많지. 일류지만 권절 현승대사에게 직접 사사했다고 하니 무시할 수 없소.]
[저 자는 무당의...]
평소라면 꼬추의 인적사항 같은 건 흘려들었겠지만 이겨야하기 때문에 귀담아들었다.
절대 이길 각이 안 나오는 사람은 두 사람 정도였다. 앞서서 언급된 도절 팽무도의 아들 팽월과, 무당파 장문인의 아들이라는 견용진.
둘 다 절정고수였고, 서른 전후였기 때문에 얘들은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풍기는 기도로 봐도 역시 만만치 않았고.
'나머지는 어떻게든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대진표를 보면 준결승 전에 얘들이랑 마주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준결승에 올라가기만 하면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은 없으니까...
[아, 저 자가 강 형의 첫 상대가 되겠군. 저 자는 청성의 요정립이오. 유명한 절기는 쾌검식인 칠십이파검.]
쾌검의 달인이라는 것치고는 느릿느릿하고 넉넉한 인상의 곰 같은 상대였다.
하지만 비무대로 올라가자 나는 그 생각을 180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 검으로 강윤 소협을 상대하고자 하오."
그렇게 자신이 어떤 절기를 사용할지 선언한 요정립의 검은 매서웠다.
쉬이이이익
처음에 들어오는 찌르기는 충분히 감당할만 했다.
하지만 마치 간을 봤다는 듯이 서서히 속도를 올려가는 칠십이파검은, 제법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검영을 지풍으로 격파해도 계속해서 다음, 또 다음 검영이 불어난다.
일반적으로 이런 부류의 검초는 허초와 실초를 섞어 상대에게 허실을 알 수 없게 한다는데, 이 녀석의 검영은 전부가 실초.
"으윽...!"
하지만 요정립은 신음성을 흘렸다.
충분히 뚫고 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판단한 내가 조금씩 검영의 파도를 돌파하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남궁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둔중한 장력을 일으켜 쾌속하게 밀려오는 검영을 모조리 깨버렸다.
전부가 실초라고 해도, 쾌검의 특성상 부족한 무게감은 메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축 쳐진 눈이 경악으로 치떠지면서도 칠십이파검은 더욱 빨라졌다.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깨뜨리면서 버텼다.
정말 그 이름대로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검영이 사방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나는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그 움직임의 흐름이 제각각이었다.
중앙, 좌, 우의 흐름이 완전히 합일되지 않아서 빈틈이 생겨났던 것.
초식이 펼쳐지며 그것이 다시 메워지기 전에 장력이 맺힌 내 두 손이 끼어들어 마치 미닫이문을 밀어젖히듯 장력을 떨쳐냈다.
그렇게 찢겨져나간 파도를 요정립은 다시 이어붙여보려고 노력했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졌소."
내 접근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아무 내력도 담기지 않은 내 손바닥이 요정립의 배에 닿는 순간, 요정립은 패배를 인정했다.
어느새 사납게 치떠진 눈이, 축 쳐진 눈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보는 무슨."
씨익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니 성격이 시원시원한 것이 괜찮은 놈 같았다.
나는 손을 마주 잡으면서 답례했고, 그걸 구경하던 관객들이 환호성을 울리는 것이 뭐랄까...
되게 쑥쓰럽고 기분 좋다.
"일부러 당해주었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한 사람이 팽월이었기 때문에 나는 우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팽 대협. 강윤입니다."
"...내가 인사부터 한다는 것이 순서가 잘못되었군. 팽월일세.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들을 수 있겠나?"
"요 소협의 칠십이파검을 말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난 사실 칠십이파검이 제대로 발동이 걸리기 전에 더 일찍 깨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절초로 보이는 초식이 전개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지? 자네의 시합을 유심히 관찰한 절정고수라면 다 느꼈을 거야. 왜 그랬나?"
"...이기는 것에 급급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울 수 있으면 배워가야죠."
"하..."
팽월은 기가 막히다는듯 웃었다.
"오만하군. 그 말은 결국 그대로 설치게 둬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
"그런데 그래서 마음에 들어. 강호인이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오히려 내게 호감을 갖게된 것 같은 팽월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구라였다.
사실은 3차전, 그러니까 준준결승에서 만나게 될 능풍연에게 보라고 한 것이다.
절정고수인 매소향이 알려준다면 어쩔 수 없지만, 능풍연이 본다면 날 호구로 볼 것이 틀림없었다.
알아본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호구로 안 본다면 그만큼 실력이 낮다는 뜻이니 그것도 좋다.
"아버님께 들었네. 고모님께 배운 적이 있다지?"
"몇 수 배운 정도입니다만..."
팽무도는 50대 후반, 팽월은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팽월은 팽연화에 대해서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팽월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받아주다보니.
'팽연화 보고 싶다...!'
임신한 당혜원을 챙겨달라고 부탁했는데 잘 챙겨주고 있으려나.
강윤이 당가를 떠난지 한 달이 조금 더 지났다.
"불편한 건 없나? 나는 여ㅂ... 강, 소협만큼은 자주 못 오니까, 필요한게 있으면 꼭 말해주게."
"괜찮아요, 새언니."
거의 매일 오다시피하던 강윤과 달리 3,4일에 한 번 오는 것이 고작인 팽연화로서는 당혜원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가문의 일이 좀 바쁜가요? 사람도 고용해두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당혜원이 팽연화가 임신할 것까지 고려해 사람을 고용해두었기 때문에 사람은 오히려 남을 지경이었다.
결국 임신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팽연화는 아쉬움을 누르며 화제를 바꾸었다.
"지금쯤 강 소협도 소림사에 도착해서 한창 경기를 하고 있겠지."
"곁가지로 하는 일이라고 대충 하고 오지 않으면 좋을텐데... 게다가 또 여자를 건드리면..."
당혜원은 강윤이 예쁜 여자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시합에 늦어 부전패 처리당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래도 그 곳은 소림일세, 소림. 정파무공의 태두, 게다가 사찰이기까지 한데, 거기서 여자를 더 만들리가 없지."
"전 그래도 만들 것 같아요..."
당혜원은 자신이 만들어준 몇 가지 물건들을 생각했다.
'강한 수면약, 탈취제, 피부에 자극이 적은 기름...'
그것들을 챙겨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강윤이라면 가져갔을 것 같았다.
"그럼 내기할까? 지는 쪽은 일주일간 강 소협에게 접촉금지하기로."
"...새언니, 그러다 진짜 큰일나요."
당혜원이 보기에 팽연화가 하는 짓은 제 무덤 파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위험천만한 내기를 받아들일 배짱도 없는 당혜원으로선, 그저 웃을 뿐이었다.
2차전까지 승리로 장식한 나는, 이제 확실한 구룡을 향해 단 1승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2차전 상대는 또다시 청성의 제자였는데, 청풍검법을 제법 정묘하게 사용하는 실력자였지만 요정립만은 못했다.
준결승에 올라가면 일단 무조건 구룡이 되는 거고, 준준결승에서 진 4명 중에 정파 명숙들이 뛰어나다고 인정한 2명이 추가로 구룡이 된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
어머니도 팽월처럼 내가 당해주던 것을 알았는지, 새삼 내게 주의를 주었다.
보통 이런 애들놀음에 정파 명숙들이 직접 항의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괜찮지만, 대전상대가 알았다가는 원한을 품을 것이 틀림없다고.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인듯 했지만,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눈치였다.
"그 나이때 다 그런 패기도 부려보는 거지, 부인은 걱정이 너무 많소."
"그래서 상공이 고생한 거랑 똑같이 고생하라고요?"
아무래도 아버지도 비슷한 전적이 있는지 갑자기 입을 꾹 다문다.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시작할 즈음에,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말을 멈추었다.
나와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또 만났네, 또 만났어.
"갑자기 찾아와서 실례는 아닐까요? 제갈 여협."
"무슨 말씀을. 들어오세요, 매 여협, 능 소협."
매소향과 능풍연 모자가 우리 숙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꼴보기 싫지는 않았다. 딱히 이 두 사람이 개과천선한 것처럼 말을 곱게 해서가 아니었다.
'낚였구나!'
능풍연이 나를 쳐다보는 눈에 경계심은 하나도 없고, 그저 무시하는 기색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매소향이 안 알려줬거나 알려줬어도 능풍연이 쌩까고 있는 거겠지.
매소향은 이틀 뒤에 벌어질 아들들의 대결을 언급하며, 은근히 나를 띄워주고 있었다.
"강 소협이 청성의 검법에 대처가 능숙하던데. 혹시 일전에 겨뤄본 적이 있나?"
"겨뤄보기는요. 처음입니다."
"대단한데? 청성의 검법은 그렇게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는게 아닌데 말이야."
계속 능풍연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날 경계하게 만드는게 목적인 것 같은데.
아이구, 사춘기도 아니고 나이 먹을만큼 먹은 놈이. 엄마가 충고해주면 좀 들어라.
"운이 좋았습니다. 속으로는 몇 번을 놀랐는지 모릅니다. 매 여협 같은 고수께서도 잘 봐주실 정도라니 망신당할 걱정은 없겠습니다만."
능풍연은 살짝 코웃음을 치며 그럼 그렇지, 하는 태도였다.
빡대가린가, 타고나길 오만해서 그런건가 몰라도 속아주면 나야 고맙지.
나는 마음 편하게 매소향이 칭찬을 연발하는 것을 감상했다.
'가만 보니까 얘도 장난아니네.'
지금까지는 밉상이라 짜증만 났는데, 능풍연을 속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매소향의 미모가 눈에 들어왔다.
여행하기 편한 경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머니와는 달리, 화려하게 매화가 수놓여진 궁장을 차려입은 그 모습은 아름답긴 아름다웠다.
얼굴만이 아니라 천이 많아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궁장 위로도, 야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히 짐작이 갈 정도.
이 여자를 언젠가 홀딱 벗겨서 자지를 박아줄 기회가 올까?
"어머니, 강 소협 얼굴에 금칠을 너무 하십니다. 강 소협이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능풍연이 매소향의 칭찬 세례에 끼어들었다.
이제 이 녀석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았으니까 그만 가자, 라는 분위기였다.
"...그러고보니 너무 오랜 시간 머물렀군요. 결례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매 여협."
매소향은 속이 터지겠지. 두 사람이 일어나면서 능풍연이 입을 열었다.
"모레 있을 대결, 기대하고 있겠소."
이미 자신이 이긴듯한 태도로 지껄이는 것이 고까워서, 나는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더라... 능평운 소협?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름을 일부러 틀려주자, 어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반면 아버지는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이 보였다.
이 양반도 은근히 반골 기질 있어.
"...내 손속이 과하다고 원망마시오!"
능풍연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남의 숙소 문을 부서져라 세게 열어젖히면서 나갔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런 능풍연을 따라 숙소 바깥으로 나서는 매소향의 엉덩이에 고정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