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84화 (84/383)

밀푸색마 EP.84 이름이 뭐더라... (2)

"강호의 동도 여러분, 오늘 이러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매우 뜻깊지 않다고 할 수 없..."

여기서도 이런 소리를 하네.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같은거.

맹주인 검성이 자리를 비운 탓에 부맹주라는 사람이 대신 개회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데 내력이 실린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 아직 정정한 것 같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하라는 고리타분한 내용이었지만, 주변의 반응은 좋았다.

짝짝짝짝

하지만 내 생각엔 내용보단 발언자의 인기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은 구룡쟁패의 규칙이 적힌 종이를 읽어봤는데, 이걸로 남들 뒤통수를 쳐볼까 하다가 말았다.

뒤통수를 칠 방법도 몇 개 없고, 그렇게 이겨봐야 비겁한 놈이라고 손가락질만 당할 것 같아서.

그렇게 뭉쳐있던 사람들은 소림승들의 안내를 받아 몇 개의 조로 갈라져서 대기실에 틀어박혔다.

마치 군대처럼 수십명씩 있는 남자들이 넓은 방 하나에 꽉 들어차있으니까 숨이 막힐 것 같다. 어, 군대...?

"정말 숨이 막혀 미치겠구려. 사내들만 있는 공간이라는게 이렇게 징그러운줄 몰랐소."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옆에 있던 남자가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나보다 몇 살 많아보였다.

"누구십니까?"

"난 도여중이란 사람이오. 사천에 있는 작은 무관을 물려받으려고 아둥바둥대는 사람이지."

"사천?"

굳이 따지자면 나도 중국 전체에서 사천이 가장 익숙하다. 반 년 가까이 살았으니까.

"반갑습니다. 저도 최근까지 사천에 있다가 온 사람이라서요. 강윤입니다."

"고향은 아닌가보군?"

"예."

사천에서 여긴 가봤냐, 이건 먹어봤냐 하면서 물어보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둘로 갈라져서 들리기 시작했다.

[티내지 말고 들으시오. 나는 문주께서 내린 지시로 귀하를 도우러 왔소.]

깜짝 놀랐다. 말을 하면서 전음을 한다고? 그게 돼?

[나만 하는 특별한 재주니까 놀랄 것 없소. 본문에서도 이게 가능한 사람은 얼마 없소.]

[본문이란게 대체 어딥니까? 혹시...?]

[그렇소. 하오문이오.]

본문 운운하면서 날 도울 곳이라고 해봐야 하오문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다 세가거든.

도여중은 내 신분이 하오문에 협조하는 외부 고수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내 진짜 정체는 그나마 문주 정도나 근접하게 알겠지.

하오문은 근본이 도둑, 기생, 점소이 같은 기댈 곳 없는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정보단체 성격을 가진 문파다.

사회 곳곳에 침투해 다양한 정보를 취급하는 것에 비해 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한 곳.

나 정도 되는 고수도 귀한 대접을 해줄 문파인데, 사부 같은 초강자가 뒷배로 있어준다면 못해줄 일이 있을까. 아, 스승의 은혜.

[나는 귀하를 정보적인 부분에서 최대한 보조할 것이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최소한 모르고 얻어맞을 일은 없을거요.]

[든든하군요.]

씨익

"내가 말해본 곳만 가본다면, 사천 어딜 가서도 무지렁이란 소리는 안 듣고 살 수 있을 거요!"

"꼭 가봐야겠습니다."

미친 두뇌였다. 그러니까 전음으로는 나한테 사정설명을 해주면서 입으로는 사천의 명소를 읊고 있었다는 얘기다.

애초에 저런 재주가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쓸 두뇌가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다음, 고가표국 강윤 소협, 소속 미기재 길상 소협 대기해주십시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소림승이 나와 내 상대를 불렀다. 내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생각했다.

'당신, 솔직히 소협이라고 할만한 얼굴 나이가 아니다.'

매소향은 이미 싱거운 첫 승리를 거둔 아들과 함께, 그녀가 두번째로 기다리던 자가 어서 4조 비무대에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궁장을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한 번쯤 시선이 머물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찌푸려진 미간이 옥의 티였다.

'풍연이가... 이길 수 있겠지?'

매소향은 자존심이 아주 높았다. 어릴 적부터 미모면 미모, 무공이면 무공, 심지어 학식까지도 남에게 뒤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매소향이 강호에 출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보다 우월한 제갈미령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

겨룰만한 것은 미모뿐, 그마저도 비등비등한 정도였고 나머지에서는 완패.

제갈미령이 듣도보도 못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제 인생을 망치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열등감에 고통받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마치 그녀를 놀리듯이, 몇 년 뒤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팽연화가 절대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매소향의 사부인, 검절과 대등한 위치에 오른 것이다.

'강윤...! 반드시...!'

그 두 사람이 아끼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에게 패배한다. 이보다 보기 좋은 그림은 있을 수 없었다.

"나왔군요."

곁에 있던 아들이 속삭였다.

과연 그 자였다. 상대 쪽을 보니, 흔한 낭인무사.

제갈미령이 자신있게 내보낼 정도면 최소한 일류 수준은 될텐데, 아무리 봐도 그 실력을 제대로 이끌어낼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낭인무사는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기도 전에 손목을 꺾여 검을 놓치고 비무대 바깥으로 내던져져 장외패를 당했다.

"재미없게 되었군요. 하긴, 그리 어려운 상대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방심하지 마라.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제갈미령이 자신있게 내보낼 정도라면... 만만히 여겨선 안 될 일이야."

아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지만, 매소향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염려마십시오, 어머니. 화산의 절기가 얼마나 매서운지 제대로 맛을 보여주겠습니다."

능풍연은 그 말만 남긴 채 곧 시작될 두번째 대결을 위해 다시 비무대로 내려갔다.

머리가 굵어지고부터 말을 잘 듣지 않게 된 아들이, 오늘따라 더욱 못 미더운 매소향이었다.

특별히 시작부터 대진운이 더러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무난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아니, 제비뽑기를 한 것도 아니고 주최 측에서 적당히 짜준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시작부터 고수들끼리 맞붙는 경우를 피한 걸지도.

여기는 중세 중국이다. 편의를 위해 그랬을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애초에 그게 불공정하다는 인식조차 없을 수도 있다.

"고생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나 어머니도 당연한 결과라는 표정이었다.

예선 통과 기념으로 술이나 한 잔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역시 어림도 없었다.

"여긴 소림의 경내이지 않니. 조금만 참거라."

바깥에서 고기냄새, 술냄새가 풍기는 것까진 소림도 참아주겠지만 그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경내까지 들어오는 건 못 참을 거란다.

본선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고 구룡이 된다면야, 하루쯤 객잔에서 방을 빌려 포식을 하고 오는 것도 괜찮겠지만.

나는 예선 통과 가지고 일부러 술판을 벌이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빨리 가고 싶다...!'

언제부터 그렇게 술에 환장했느냐고 묻는다면야 당연히 전혀 환장하지 않았다.

환장한 건 섹스지. 아버지를 재우고 어머니와 하는 밀프 임신 섹스!

"여유도 있어보이는데 일이나 하자꾸나. 아들이 도와주면 일이 3배는 편해지는데..."

나는 슬그머니 도망치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구룡쟁패 본선은 32명이 치른다. 즉 총 31경기가 열리는 셈.

1차전과 2차전이 내일부터 이틀간, 3차전이 다시 이틀 뒤, 준결승이 다시 이틀 뒤, 결승이 그로부터 다시 3일 뒤에 치러진다.

남은 시간은 9일 뿐이라는 것.

폐회식도 결승과 함께 치러지니 그 때부터는 아버지도 바쁘다면서 빨리 표국으로 돌아가버릴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아버지가 바쁜 상태로 내버려뒀다가는...

'둘이서 즐기고 오라면서 자기만 빠질 가능성이 있지!'

일단 떡을 치고 나서 아버지에게 약 탄 술을 먹이는 방법도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소림사 경내에서는 술을 못 먹이니, 결국 그 날 아버지는 무조건 한가해져야했다.

"가시죠, 아버지."

기세등등한 내 표정을 보고서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 반 기쁜 표정 반으로 나를 아버지의 침실 겸 사무실이 된 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닫히는 문 너머로, 내 생각을 짐작했는지 피식 웃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화산파의 이대제자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만한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피처럼 붉은 색깔의 단환이 들어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 이게 정말...!"

"그렇소. 화산의 자소단보다 조금 못할지는 몰라도 결코 크게 뒤지지는 않을 본파의 비전 환약이지."

"곤륜파의 비전...! 이걸 어째서 내게 주는 것이오?"

"무허자께서 주시는 것이오."

"무, 무허자 대협께서...?"

이대제자는 크게 놀랐다. 일전에 한 번 사부를 따라 만났던 곤륜의 절정고수, 무허자를 떠올렸다.

남자가 보여준 곤륜의 무공, 무허자라는 이름. 이대제자는 남자의 말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무허자께서는 귀하의 뛰어난 재질을 알아보셨으나 내력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셨소."

"...!"

"이번에 기회가 닿아 얻게 된 이 환약을 귀하에게 보내달라 내게 특별히 명하셨지."

"아아아아...!"

이대제자는 환희했다. 대체 어떻게 보답해야될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나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곤륜의 제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전혀 부담가질 것 없다며, 그저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떠나가는 이대제자의 뒤통수가 사라지자마자, 남자는 비아냥댔다.

"이런 곳까지 와서도 기녀나 찾는 놈이 수련을 했으면 얼마나 했으려고. 멍청한 놈."

수련도 안 하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자를 남자는 혐오했다.

그 때 남자의 뒤에서 소리없이 또 한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형, 그래서 저걸 저대로 저놈한테 먹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어차피 저놈이 먹어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능풍연이 먹어줘야지. 네가 작업 잘 쳐놔라."

무허자 운운하는 얘기는 마교의 손이 닿아있는 기루에서 이대제자가 떠든 이야기를 그대로 읊은 것뿐이었다.

허풍을 섞어서 무림의 큰 기둥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아마 무허자와 만난 것 정도는 사실일터였다.

"자, 다음 가자. 이번에는... 청성인가? 하여간 새끼들이 배만 불러선. 그 시간에 검 한 번 더 휘두를 생각은 안 하고."

남자는 욕설을 퍼부으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다리가 그리는 유려한 움직임은,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곤륜의 운룡대팔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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