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83 이름이 뭐더라... (1)
소림사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났고, 구룡쟁패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오늘을 포함해 이틀이 남았다.
그럼 하루 정도는 더 있다가 와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머니 성격에 이틀이면 많이 봐줬을 거다.
"아들아, 아버지를 도와야하지 않겠느냐?"
"상공, 쉬거나 수련을 해도 모자랄 일인데..."
아버지는 여기까지 일을 가져와서 하고 있었는데, 어제 하도 머릴 싸매고 있길래 조금 도와줬더니 부려먹으려고 각을 재고 있었다.
하루 도와줬더니 혹시 정말 양자로 들어올 생각이 없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럼 어머니를 못 따먹잖아.'
친아들 행세를 하고 있을 때도 따먹었지만, 그 때는 다른 사람한테 오픈하지 않았을 때였고.
양자는 진짜로 상속권을 갖는 아들이지만, 의자는 말만 아들이고 아들처럼 챙겨주는 관계였으니까.
숫자 때문에 고통받는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양자가 될 수 없던 나는 도망을 나왔다.
사사사사삭
천하명산 가운데 하나인 숭산은 길이 나지 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 많았고, 나는 일부러 그런 곳을 골라 달렸다.
단순히 신법이 빠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튀어나오는 공격에 반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숲 속에서 최대한 빨리, 나뭇가지에 부딪히지 않으면서 달리다보면 그런 능력이 길러지지 않을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했으니 아마 맞을 거다.
빨리, 더 빨리!
갑자기 눈앞에서 튀어나오는 나뭇가지에 들이박을 뻔한 것도 여러번.
그렇게 달리다보니 나는 숭산을 지나는 오솔길로 나올 수 있었다.
"저거 뭐야..."
작은 마차 한 대가 오솔길에 생긴 구멍에 바퀴가 빠져있었다.
"저기,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나를 보고 웅성대던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가 딱 멈췄다. 하긴, 갑자기 수풀 속에서 사람이 쏜살같이 튀어나오면 수상할만도 하다.
"그, 수련 중이라 그랬던 거고, 수상한 사람 아닙니다. 도와드릴까요?"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요. 무림의 대협께 어찌 이런 일을...!"
"무림의 대협이 하면 더 쉬운 일인데요, 뭐. 잠깐 비켜주시겠어요?"
마차 자체도 별로 무거워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력을 일으키며 마차의 기울어진 쪽을 잡았다.
"흡!"
내가 마차 한쪽을 들어올리자마자 마부가 말을 몰아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손을 툭툭 턴 다음, 옆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
"축에 문제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웬만하면 확인 한 번 정도는 하시는게 좋겠네요."
"예... 예?"
뭔가 넋이 나간 표정인데.
일단 돕긴 했다만 꼬추새끼의 감정 상태까지 살필 이유는 없었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주변에서 바위와 돌멩이들을 집어다가 급한대로 구멍을 메웠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갈 길을 가려는데, 마차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도움주신 분께 인사를 하고 싶으니 이리 모셔오게."
허스키한 중저음이 매력적인 목소리. 듣기만 해도 꼴릿하게 생겼을 아줌마의 목소리였다.
넋이 나가있던 남자가 머뭇대며 나를 데리고 마차 옆으로 갔다. 그러자 창이 열리며 예쁘게 생긴 밀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제법.'
나이가 든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런 부분까지 매력으로 소화해내는 미모.
"정말 고맙소, 소협."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부인."
"소협은 혹시, 구룡쟁패에 나가는 거요?"
"...예. 맞습니다."
왜 이런걸 묻나 싶었지만, 이 시기에 소림사에 모인 젊은 무림인치고 구룡쟁패에 안 나갈 사람이 드물겠다 싶어서 수긍했다.
"내 소협에게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이것밖에..."
뭔가 주머니 같은 것을 꺼내는 모습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보답이라뇨. 힘이 조금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소?"
아쉬워하는 얼굴도 예쁘다. 이런 밀프한테는 돈푼 받아챙기는 것보다는 호의를 받아두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저는 강윤이라고 합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유경. 감숙 출신, 유경이오."
"그렇군요. 저는 소림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정 보답이 필요하시다면 나중에 차 한 잔이라도 함께 해주신다면 좋겠군요."
"기회가 된다면, 그러지요."
유경은 의례적인 인삿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수긍했다.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잘 풀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그렇게 일단 미끼를 던졌다. 언제 걸려들지 모르지만, 운이 좋으면 엮일지도 모르는, 그런 미끼.
멀어지는 강윤의 등을 보면서, 수하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놈이로군요."
수하의 말에, 마교의 소교주, 영호경은 가볍게 웃으며 수긍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녀의 수하들은 모두 정파의 내공을 익힌 자들. 절대 마기를 풍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듯한 사내 앞에서, 선뜻 정파의 내공을 드러냈다가 일이 꼬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힘을 쓰지 못했을뿐.
영호경은 재미있다는 듯 창틀에 손가락 끝을 톡톡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익힌 건 도문의 내공인데, 체면차리는 건 없으면서, 또 물욕은 없다?"
보통 무림의 대협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이런 하찮은 일에 관여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다.
누구보다 힘이 강하면서도, 막상 잡부처럼 힘을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
조금 전의 그 자처럼 정통 도문의 내공을 익힌 자들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었다.
마침 좋은 핑계거리도 있다. '속인의 일에, 도인이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지껄이면 그만이었다.
"그 자에 대해서 알아봐."
"예?"
"아니, 알아볼 것도 없겠군. 구룡쟁패에 나간다고 했겠다?"
"소교... 마님!"
수하는 경악해서 외쳤다.
용담호혈이라는 소림에, 그것도 각 대파의 핵심인물들이 모인 곳에 들어간다니.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천만한 일인데.
"귀청 떨어져."
"안 됩니다, 분명 교주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반대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르시잖아."
영호경의 궤변에 수하는 일장로에게서 받은 경고를 떠올렸다.
<어디로 튀실지 모르는 분이네. 어쩌면 구룡쟁패까지 구경한다고 하실지도 몰라. 그럴 때는 정체가 들통나면 얌전히 내빼겠다는 약속이라도 받아내게.>
약속 안 해주면 자결이라도 하겠다고 하란 말이야, 라는 일장로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이러다 정말 자결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수하는 어쩐지 그런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런 고민마저도 사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가져온 거 있지? 혹시 가능하면 연결시킬 곳이 있는지 확인해봐."
"...예? 그걸 여기서 쓴단 말입니까?"
"그럼, 어디 적당한 중소문파에 뿌려서 쓰겠나? 명문대파 출신이라도 엄연히 힘에 목마른 놈들은 있기 마련이야."
"..."
"걱정말게. 일이 꼬이면 도망치면 되지 않겠나?"
수하는 이제껏 얌전하던 소교주가 서서히 고삐풀린 말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속이 타들어갔다.
오절은 정파 출신으로 구성된 다섯 절대고수를 가리킨다.
권절(拳絶), 검절(劍絶), 도절(刀絶), 운절(雲絶), 화절(花絶).
자, 뭔가 이상하지 않나? 앞의 셋은 딱 봐도 절기가 뭔지 알겠는데, 뒤의 둘은 뭔지 잘 모르겠다.
운절의 경우, 곤륜파의 고수이며 신법을 알아주기 때문에 납득할 수 있다. 신법이 구름같다고 하면 말이 되니까.
하지만 화절은 왜? 팽연화가 여자라서? 꽃이 팽연화와 무슨 상관이지?
도절이 팽연화보다 더 강하거나 선배 무인이라서?
여러가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도절이 팽가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반갑군. 매소향에게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괜찮아. 생각보다 아주 괜찮아."
팽가의 가주이자, 도법의 달인인 도절 팽무도. 팽연화의 오빠이기도 한 남자.
그가 나를 찾은 첫번째 손님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팽 가주."
"자넨 아직도 일거리를 싸들고 다니는군. 웬만하면 부하에게 맡기는게 어떻겠나?"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아버지에 비해, 팽무도의 덩치는 조금 작았는데도 존재감은 훨씬 컸다.
호쾌한 쾌남형의 인상 때문에 더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친구, 정말 의자가 맞나? 어째 얼굴을 보니까 자네가 생각나는데?"
"그래서 의자로 삼은 것이기도 합니다."
데면데면하던 당 가주를 상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도 팽 가주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면서 응대했다.
"아무튼 반갑네. 연화에게 한 수 배운 청년이 있다고 해서 구경을 왔는데, 훌륭해. 기대 이상이야."
이 정도 나이에 이 실력은 흔치 않다는 말에 어깨가 으쓱했다.
"이번에 내 아들, 월이도 참가한다네. 혹시 둘이 손속을 겨룰 일이 있더라도 과하지 않게, 서로 다칠 일이 없도록 하세나."
"알겠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 다음, 팽무도는 내 숙소를 떠났다.
그 이후로도 가끔씩 정파의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우리 숙소를 찾았다.
대체로 어머니를 찾아온 사람이었고, 팽무도처럼 나를 직접 찾아온 사람은 드물었지만.
그런만큼, 손님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일정한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오대세가의 경우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지만, 구파의 경우에는 가끔 왜 왔나 궁금할 정도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경우도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란다."
전통적으로 세속의 영역에는 오대세가가 세력이 강한 편이었다. 대신 구파는 무공이 세가들보다 한 수 위였고.
하지만 최근 들어 절대고수의 비율이 비슷하게 맞춰진데다가, 그 중 최고수인 검성 역시 황보세가 출신.
그러다보니 자존심이 상한 구파에서는 속가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세속에 더 손을 뻗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특정지역에 '보호세'를 받으면서 그 지역 시전에 일어나는 불상사를 막아준다거나.
'뭐야, 이거. 조폭 아냐?'
그러다보니 서로 감정이 나빠졌고, 반쯤 연락을 끊었다고 해도 제갈세가 출신인 어머니의 의자인 나는 오대세가쪽 인물로 분류된 모양이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제네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예전부터 명문정파의 명분놀음, 자존심놀음에는 끼면 피곤하더구나."
아버지가 맞장구를 쳤다. 무명의 신진고수에서 제갈세가의 사위가 된 아버지는 더 절실하게 느꼈을지도.
특히 매소향이 이미 인사를 했으면서도 아들을 데리고 새삼 인사하러 온 것이 압권이었다.
남이 쉬는 곳에 쳐들어와서 아들의 무공실력을 자랑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적개심이 쌓인 것 같았다.
"이름이 뭐더라... 능평운?"
"...능풍연이란다, 아들."
자기 어머니를 많이 닮았는지 기생오라비상인 놈이었다. 마음에 안 드니까 붙을 기회가 오면 수단방법 안 가리고 박살내야지.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신법을 수련하고, 더 여유가 있을 때는 아버지를 깨작깨작 돕다보니.
드디어 개최일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