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79화 (79/383)

밀푸색마 EP.79 강 소협...! (1)

비누다.

이제 곧 이 집을 떠나서 소림사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뭐 해줄게 없나 머리를 엄청 굴려봤는데 떠오른게 비누였다.

대체역사물에서는 흔히 쓰이는게 비누 아닌가. 위생 증강, 사망률 감소, 인구 급증 콤보로 말미암은 국력 향상!

특히 산파의 위생을 보장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조금이라도 씻겨서 애를 받게 해야 안전할 것 같다.

정확한 제법까지는 모르지만 대충 폐식용유에 잿물을 섞으면 되는게 아닌가?

어떻게 섞냐고? 그건 시비 여러분들께서 고민해주셔야지.

"아들, 딴 생각하니?"

"아닙니다, 어머니!"

하지만 내가 그걸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가끔 부엌에 들러서 확인하고 지금은 어머니와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깨를 향해 질러오는 장을 위로 밀쳐내면서 지른 권이 중간에 잡혀 오히려 잡아당겨진다.

나는 당겨진 손을 그대로 밀어서 땅을 짚고, 몸을 틀어 옆구리를 노린 공격을 회피.

견제로 걷어차올린 다리를 어머니가 회피하면 팔의 힘으로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다.

장력이니, 지풍이니, 권풍이니 하는 원거리 공격기들을 모두 거르고, 오로지 육신으로만 벌이는 근접전.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알겠니?"

"예. 전보다는요."

알겠다. 보름도 되지 않는 기간동안의 보법 수련이었지만 어머니가 무엇을 원한 건지 알겠다.

보법을 수련한다는 것은, 위치를 선점하고 무기나 손으로 싸우는데 필요한 여유를 늘린다는 것.

사부나 팽연화의 가르침이 무기나 손을 움직일 때 본능적인 판단력을 높여 공격 자체를 빠르게 하려고 한다면.

어머니의 가르침은 보법, 신법으로 공격을 결정할 시간을 벌어 적과의 수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

어느 쪽의 가르침이 더 우위인가는 따지기 어렵지만, 결국은 무공 고수라면 둘 다 잘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 우리 아들 정말 많이 늘었어."

사실 어머니와 수련하면서 내 실력이 늘었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항상 혼자서 따로 수련해봐야 나아졌다고 느꼈는데.

"완전히 일류라고 할 수 있으려면, 최종적으로 모든 수법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한단다."

"유기적으로..."

일류고수의 끝은 초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수발하는 것.

그래야 그 다음 경지인, 절정고수의 길을 밟아볼 수 있다. 어머니가 말한 것은 정말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절정고수는요?"

"응?"

다들 말하기는 했다. 초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수발하면 일류고수의 끝을 밟을 수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다.

"차차 알게 될 거란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알려주지 않는 것을 보니 모르는게 득이 되는 건가보다. 궁금하긴 한데... 일단 믿어봐야되나.

"잠시 쉬자꾸나. 이번에도 부엌에 가려고 하니?"

"예, 어머니."

수련을 잠시 쉬는 사이에, 나는 부엌에 갔다. 부엌에 가보니, 나이 든 시비 하나가 나를 안내해주었다.

"말씀하신대로 만들어보았습니다만... 이건 혹시 석감(천연비누의 일종)인지요?"

"...네?"

시비의 설명에 나는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비누란게 이미 있는 거였어? 난 지금까지 콩가루로 씻었는데?

제법 아는 것이 많은 이 시비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선 제법 다양한 재료로 비누나 그 대용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값나가는 사치품이지만, 언소영이 그걸 못쓸만큼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대체역사물 장르소설에서는 분명히 조선시대에도 비누가 없다고...! 임금도 오오 굉장하군, 하고 쓰는 물건이라고...!

조선에만 없던 건가?

"괜한 수고를 끼쳐드렸네요. 혹시 쓸 곳이 있으면 써주시고, 없으면 그냥 폐기해주셔도 돼요."

"아닙니다, 부군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이 좋아 부군님이지, 결국 이 호칭의 뜻은 그거다. 언소영의 남편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 기둥서방이라는 뜻.

그런 주제에 연장자한테 하대를 한다는 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 어떤 사람이 빨래할 때 잿물을 쓰는걸 보고 생각했던 거라... 죄송합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 정도 수고는 수고도 아닌걸요."

더이상 사과를 해봐야 이 사람이 곤란해질 뿐인 것 같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냥 언소영한테 산달이 되면 산파 미리 대기시키고 비누든 뭐든 싼 걸로다가 깨끗하게 씻기라고 해야겠다.

더러운 손으로 우리 아기 받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 산모한테 악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고!

부엌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보니, 웬 시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이 얼굴...?

"강 소협...!"

시비의 얼굴이 본듯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등 뒤에서, 경악한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데, 아 정말 돌아보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돌아본 그 자리에는, 남궁혜가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고 날 보고 있었다.

사부님, 기억 지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남궁혜는 아현을 따라 몰래 어머니의 장원에 숨어들었다.

어머니의 임신이 사실이라면 시비들은 절대 자신을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지 않을테니까.

"우선 부엌으로 가요...!"

아현은 부엌을 총괄하다시피하는 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남궁혜를 안내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빨래할 때 잿물을 쓰는걸 보고 생각했던 거라... 죄송합니다.]

부엌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여인밖에 없을 곳에서 들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남궁혜와 아현은 동시에 움찔거리며 멈춰섰다.

여기에 있다, 그 남자가.

잿물, 잿물.

별말도 아닌데도, 어째선지 자꾸 그 단어가 머릿속을 간지럽힌다.

아현이 숨으라고 팔을 잡아당기는데도 생각에 잠겨있느라 반응이 늦은 남궁혜는, 문이 열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에게 매번 안부를 전해주던 남자.

어머니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을 위로해주던 남자.

어머니의 땀에 젖은 이불을 직접 빨아주던 다정한 남자.

그리고 어머니를 범함으로써, 자신을 배신한 남자.

"강 소협...!"

남궁혜는 떨리는 손으로 검병을 쥐었다.

우선 검을 잡고보니, 그녀의 손에서 오랜 세월을 익혀온 창궁검법이 자연스럽게 풀려나왔다.

갑자기 가슴을 노리고 찔러들어오는 검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강윤은 권기가 실린 주먹으로 검면을 후려쳤다.

권격에 실린 거력이 검을 뒤흔들고, 남궁혜는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어떻게...?'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내공을 쌓지 않았던 몸이었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내공이 금제되어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수련을 쌓은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일류고수인 자신을 힘 대결로 압도할 정도라니?

"남궁 소저, 잠시만, 대화를...!"

"그 더러운 입 닫아요!"

어떻게 대화를 논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를 범한 음적 주제에!

창궁검법은 남궁세가에서 익히는 기본검법이었지만, 남궁혜의 손에서 펼쳐지는 창궁검법은 변화와 위력이 적절하게 가미되어 날카로운 맛을 풍겼다.

네 갈래로 일어난 검기가 강윤의 요혈을 위협했고, 보법으로 그것을 회피한 강윤은 연이어 짓쳐들어오는 검을 장력으로 밀어내며 계속 말했다.

"제발, 들어줘요. 난 절대..."

"듣기 싫어!"

교본처럼 정확하게 흘러나오는 검식과는 달리, 남궁혜의 마음은 풍랑 한가운데 던져진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어머니가, 이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마치 창기처럼 이 남자에게 아양을 떨며 안긴 것이다.

검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그 절망감에 무너질 것 같아서, 남궁혜는 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소란을 들은 시비들은 검격이 닿는 범위 내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평소의 남궁혜라면 미안하게 생각할 일이었음에도, 남궁혜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표홀하게 움직여 남자의 허점을 노렸고, 쾌속하게 움직인 검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윤은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음유한 지풍이 그녀의 표홀한 검을 견제했고, 쾌속하게 움직인 검은 둔중한 장력에 밀려 상대를 봉쇄하기는커녕 형편없이 밀려났다.

분명 초식의 정묘함은 대등하거나 그녀가 한 수 위일텐데도, 강윤은 그저 적절한 초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남궁혜의 검을 어렵지 않게 걷어냈다.

내력의 깊이 차이가 그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여유가 남아있다는 듯, 공격조차 해오지 않고 오로지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는데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것이 분했다.

"나쁜 놈... 어떻게 어머니를...!"

남궁혜는 분했다. 누군가가 이렇게 밉게 느껴진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남궁세가의 금지옥엽, 외동딸로 태어난 그녀에게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괴노인에게 잡혀간 것은 처음 겪은 절망이었다.

하지만 괴노인의 제자라며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는, 남궁혜에게 있어서 희망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절망도 아니었다.

마치 연명치료를 하듯 그녀의 마음이 간신히 지탱되고 있던 그 때, 장난처럼 그녀의 마음 속 기둥을 무너뜨려버린 남자가.

"절대 용서 못해!"

"혜아야!"

남궁혜의 검이 우뚝 멈추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가 사라지면, 나쁜 꿈도 끝나고 어머니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검을 뽑아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궁혜의 시야에 들어온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불러온 배를 받친 손이, 그 안에 깃든 생명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여인이었다.

남궁혜는 모르는, 여인인 어머니.

"흐윽..."

이 남자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 너무 비참해지는데.

남궁혜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언소영은 울음을 터뜨리는 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죽은 남편, 남궁탄에 대한 마음이 스러졌다고 해도,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에 대한 애정은 별개였다.

여전히 남궁혜는 언소영을 많이 닮은 딸이었고, 그녀의 몸 안에 흐르는 피의 반은 언소영의 것이었으니까.

"혜아야..."

조심스럽게 자신을 안아드는 팔에 흠칫한 남궁혜는, 곧 순순히 어머니의 품에 몸을 맡겼다.

뭐라고 해야될지 언소영도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앞으로 잘 지내라고? 어미가 잘못했다고?

어떤 말도 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을 것이었다.

그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남궁혜의 눈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시간.

일 각 정도가 지나자 남궁혜의 눈물은 가라앉은 듯했다.

"혜아야...?"

팔을 떼면서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남궁혜 쪽에서 언소영을 잡았다.

"어머니..."

언소영은 남궁혜의 목소리에 희미한 원망이 담겨있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아팠다.

하긴 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죽음이 가깝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남편이 있음에도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허락한 자신이나, 그런 자신을 탐한 어린 남편이 잘못이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면서 서있는 강윤에게 시선을 줄 때, 이마를 묻고 있던 남궁혜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설명해주세요."

"..."

"어떻게 된 일인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강윤의 안색이 핼쑥해진다.

"납득할 수 있게 해줘요..."

과연 납득시킬 수 있을까? 언소영은 아마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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