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74화 (74/383)

밀푸색마 EP.74 식사 한 끼 하시죠 (1)

"스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주."

저 목소리가 어째 '나 죽으려고 했는데 왜 구했어요?'로 들리는 건 기분탓인가?

"그럼 이만..."

나는 갸냘픈 목소리로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는 스님의 팔을 붙잡았다.

"...시주?"

"스님. 제가 아는 곳 중에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하는 곳이 있는데 말입니다."

"...?"

"제가 살테니까 같이 가시죠."

스님은 주춤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시주, 호의는 대단히 감사하나..."

"스님, 아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

"보답으로 저랑 식사 한 끼 같이 하시죠."

일단 밥이라도 먹여놔야겠다.

호연은 결국 자신을 구한 청년의 뒤를 따라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자신이 식사를 얻어먹는 것이 어째서 보답이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리한 요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그를 따랐다.

"여기 두부 요리 잘합니다. 전에 저도 먹어봤는데 맛있더군요."

"...그렇습니까?"

멈칫

순간 의심을 품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소림 제자라는 것을 알고 음식에 독이라도 탄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자신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상관없나.'

호연은 삶의 의지를 극단적으로 잃어버린 상태. 독이 들었든 산공분이 들었든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욕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한 줄기 진기라도 남아있으면 심맥을 끊을 수 있다.

삿갓을 벗어 옆에 내려놓은 호연은 담백하게 끓인 두부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한 번 수저를 놀리기 시작하니 계속해서 음식이 들어갔다.

청년은 계속해서 음식을 시켰고, 호연은 사양했지만 청년이 배가 부른 것이 아니면 계속 먹어달라고 한 탓에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가져갔다.

이윽고 호연은 수저를 내려놓았고, 청년은 웃으며 물었다.

"배가 부르십니까?"

"...예, 시주."

"맛은 괜찮았습니까?"

"...예."

청년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께선 여행중이십니까?"

"비슷합니다."

"오늘 묵으실 곳은 정해두셨습니까?"

호연은 눈에 의구심을 품었다. 왜 자신의 거취에 이렇게 관심을 갖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쁜 뜻은 없으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따로 묵으실 곳이 없으시면, 여기서 묵으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기가, 시주와 연이 있는 객잔입니까?"

"아뇨, 전혀. 며칠 전에 음식을 사간 적은 있습니다."

무슨 꿍꿍이 속일까.

강호에서는 가끔 찾아볼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자연스럽게 만난 체를 하며 이것저것 베풀어준 다음 뒤통수를 치는 방식.

여기에 발을 묶어두려는 생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를 왜?'

최근 20년간 강호에서 활동한 적도 없는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남이 노릴만한 보물을 가진 것도 없고, 은혜도 원한도 산 적이 없다.

소림 이외에서,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강호에 존재하긴 할까?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시죠."

"...소협."

청년은 바뀐 호칭에 잠깐 움찔했지만 곧 다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익힌 몸이니까, 충분히 짐작할 거라고 생각해요. 강호에서 과한 호의는 의심받기 십상이라는걸."

"..."

"무슨 생각이죠? 만약 괜한 동정이면 앞으로..."

"사람은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하면 같은 문제라도 좀 더 가볍게 느끼게 되더군요."

호연은 가슴이 덜컥했다. 마치 마음을 읽히는 것 같은 느낌에 호흡이 멈추었다.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참견하게 되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원인을 모르는 호의에는 경계하는 것이 무림인입니다. 소협께서는 그걸 주의하는게..."

호연은 그렇게 주의를 주려다 문득 입이 멈추었다.

이 청년의 말이 맞았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지니까, 남의 일에까지 참견을 할 기력이 난 것 같았다.

"불쾌하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 하루, 이 객잔에서 묵어가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말이 멈춘 틈에 청년은 몸을 일으켜 점소이에게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돈을 주는 것을 보니, 마음대로 방까지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알쏭달쏭한 청년이었다.

"아이고, 나리 반 시진만 일찍 오시지 그랬습니까! 오늘 서과는 다 나갔는데!"

일단 육병부터 사고 뒤늦게 과일을 사러 갔지만 수박이 다 팔렸단다.

수박은 귀한 과일이라서 이 근방에는 자기네 가게밖에 없다고 하는 탓에, 대신 참외를 샀다.

이것도 물이 많으니까 그나마 만족해주길 바라면서 나는 언소영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걸었다.

'주제에도 안 맞는 참견을 했어.'

닿는 순간부터 알았다. 그 스님의 몸은 굉장히 잘 익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멀쩡한 상태였다면 어떻게든 따먹어보려고 했겠지만... 그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 때문에 건드리질 못했다.

게다가 몸이 닿은 순간 은은하게 느껴지는 내력의 존재감. 잘은 모르지만 아마 불문의 내력일 것이다.

여러가지로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어째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보지 못했다면 몰라도 내가 구한 사람이다. 결국 주제에 안 맞게 참견까지 하고 말았다.

'이름은 뭘까? 왜 승복을 입고 다니는 거지? 정말 스님은 맞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괜히 관심을 많이 보였다가는 부담스러워하고 떠날 것 같아서 그저 여유있는 척하는 것이 한계였다.

점소이한테 돈을 더 얹어주고 갈아입을 옷을 사다주고 입고 있는 옷도 빨아주라고 시켰다.

어쩌면 옷이 마를 때까지 하루 더 있다가 갈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가보니 언소영이 책을 읽고 있었다.

"상공."

"미안해요, 다른 건 다 사왔는데 서과가 다 팔렸다고 해서... 대신 향과(참외)를 사왔는데, 괜찮아요?"

"그럼요."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참외를 시비에게 넘겨준 다음, 언소영은 그 자리에서 얌얌 육병을 꺼내먹었다.

책에 기름을 묻힐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덮어놓은 책에는 '소학'이라고 적혀있었다.

"벌써부터 아가 공부시키는 거에요?"

"상공이 뱃속의 아가한테는 좋은 것만 보여주라면서요?"

아, 그러고보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야매로 배운 태교 지식을 몇 가지 불어넣어줬지.

<마님, 향과 들여도 되겠습니까?>

"오, 들이거라."

고개를 푹 숙인 시비가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참외를 내놓았다.

언소영은 그것을 집어 내게 하나 물려주고는, 자기도 하나 먹었다.

"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자연스러운 현장을 앞에서 뻔히 구경한 시비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뛰쳐나갔다.

"소영, 이렇게 티내니까 좋아요?"

"당연하죠. 이러려고 시비들에게도 알려줬는걸."

언소영은 한없이 당당했다. 한편으론 속이 시원해보이기도 했다.

아이를 가져도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고, 숨어서 살아야만 했다.

심지어 그 숨겨야만 하는 대상에는 자신의 자녀까지 포함되었다.

시비들 상대로라도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끼는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읏..."

과일을 먹던 내 입이, 서서히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할짝

"으응, 난 분명 과일을 먹으라고 했는데? 손가락을 먹으면 안 돼요."

"그럼 다른거 먹게 해줘요... 소영 보지..."

내 맥락없는 발언에 언소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 주변을 걸어다니는 시비들이 혹시나 들었나 기척을 살피는 모습이었다.

"에이, 못 들어요. 귀라도 바짝 붙이고 있으면 모를까."

"상공, 아직 날도 다 안 저물었는데 그런 소리는 조금..."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 떡치고 있다고 이미 다 알려버린 상황에 무슨.

"어차피 시비들도 다 알잖아요. 소리 조금 들린다고 해서 뭐 어때요?"

어차피 몽아처럼 허락도 안 받고 문을 열어제끼는 인간이 또 있을리 없고.

언소영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옷을 벗기는 내 손을 강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혹시 시비들한테 들키고 싶지 않은 거면, 소영이 열심히 소리 참아줄 수 있죠?"

언소영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아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정말, 정말이었어...!'

존경하는 대부인 마님이, 웬 젊은 남자에게 푹 빠졌다는 소리는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었다.

[마님께서 기뻐하신다면, 받아들여야지.]

자신의 어머니까지도 그렇게 말을 했기에 아현은 향과를 먹기 좋게 썰어올리라는 어머니의 말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말이 사실인지, 사실이었다면 어떤 상대인가 확인해볼 기회.

'어떻게 대부인 마님께서, 그런...!'

일반적인 가문보다 개방적인 무가의 관점에서, 언소영이 만약 다른 남자를 찾아서 개가했다면 축하해주었을 것이다.

나이가 비슷한, 누가 보아도 오해의 여지가 없을만한 사이였을 때로 한정되겠지만.

하지만 언소영보다는 오히려 그 딸인 남궁혜와 어울릴 법한 젊은 남자?

그것이 순수한 애정일리가 없...

'아가씨...?'

남궁혜를 떠올리자 아현의 머릿속에서 뭔가를 알려왔다.

좀 더, 기억 속을 뒤져보라는 경고.

아현은 홀린듯이 기억을 되짚어올라갔고, 점점 자신이 그 남자를 오늘 처음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지? 어디에서 봤지?'

언소영과 남궁혜가 뒤늦게 돌아온 이후, 별다른 일 없이 평화로웠던 나날에서 만났을리는 없었고, 아현은 금방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남자! 아미산에서 만났던!'

산에서 내려오고보니 종적을 알 수 없게 된 그 남자가, 하필 지금 마님의 곁에 있다?

날짜를 되짚어보면 하필 그 시기에 아이를 가졌던 마님과?

"...딸. 딸? 넋이 나갔네? 딸, 왜 그래?"

"어, 어머니...?"

상념에서 깨어나보니 어머니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자신과 마주 서있었다.

"올리고 왔으면 어서 돌아올 것이지, 왜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게야?"

그 얼굴을 보며 아현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안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안 된다.

언소영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언소영이 행복하다면 젊은 남자를 만나든 나무토막을 만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뿐.

도리어 그 남자를 '부군님'이라는 호칭으로까지 부르고 잘 대접해주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

'아가씨께 알려야해. 일단 마님께서 어떤 상황인지를 아시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주실 거야.'

아현이 믿을 것은 남궁혜밖에 없었다.

그 자를 함께 만났던 남궁혜라면, 그리고 혹시나 나중에도 그 자를 다시 만났을지 모르는 남궁혜라면 이 사실을 알고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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