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69 상공, 드디어 오셨군요 (2)
언소영이 살고 있다는 장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따로 나와서 살고 있다고 해도 남궁세가 사모님, 결코 작고 초라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허리에 칼을 찬 여자 무사가 수상쩍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제갈미령이라 하는 사람인데, 남궁 대부인과 안면이 있어 찾아뵈었네."
어머니가 앞으로 나서서 설명해주자, 무사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몰라뵈었습니다. 하온데 죄송합니다만 대부인 마님께서는 병을 앓고 계셔서 손님을 거절하고 계신데 어쩌지요?"
"아아, 그런가? 실은 내 아들이 남궁 대부인에게 큰 도움을 받은 일이 있어 그러니 말씀이라도 올려주시게."
"...예?"
"아들의 성명은 강윤이니, 이 이름을 들으면 대부인께서도 불러올리실 것이야."
여자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사람을 올려보냈다.
임신했으니까 무조건 막으려고 하는 빡대가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곧,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언소영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말로 왔다. 자신을 만나러.
달이 차고 배가 불러올수록,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다보니 태중의 아이는 6개월차가 되어있었다.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는 그의 사랑은 진심이라고 확신했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식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무거운 배를 조심스럽게 받친채, 응접실로 가는 시간 내내 그와 보낸 짧은 시간을 회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정사 뿐이었다. 마치 짐승처럼, 서로의 몸에 녹아들어가는 듯한 교미.
'기뻐하겠지...?'
걸음걸음마다, 남궁 대부인으로서의 껍질이 벗겨지고 여인 언소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응접실 앞에 섰을 때, 언소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해다오."
곧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어왔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몇 달 동안 만나지 못했던, 님이 거기에 있었다.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궁 대부인."
[저 왔어요, 소영. 제가 우리 아가 태어나기 전에 찾아간다고 했죠?]
정중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반가움과 흥분이 뒤섞인 전음에 언소영은 살풋 웃었다.
"오랜만일세, 소협."
[상공... 드디어... 오셨군요...]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 너머로도, 남자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소영은 시비들을 전부 물렸다. 자신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납득한 그들은 금방 응접실을 비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갈 여협."
"남궁 대부인께서도 무탈히 지내셨습니까?"
두 사람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젊은 시절, 비슷한 나이대에 위치도 비슷했기에 어울린 사이였을 뿐.
그랬기에 본래 이런 몸을 드러내가면서 맞이할 사이가 아니었지만, 언소영은 강윤이 설명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시선을 돌렸다.
"저기, 그게..."
강윤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갈 여협과 그 부군 되시는 고천 대협께서, 제 의부모가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어떤 경위로 그렇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파제일인의 제자가 정파 대협의 의붓아들이 된다?
[소영, 미안하지만 어머니께는 사부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요. 그냥 돌아가신 은거기인이라고 둘러댔거든요.]
전음을 들으니 납득이 갔다. 그렇다면 혈마 쪽은 어떻게 처리를 한 건지 궁금했지만, 언소영은 참을성있게 들었다.
"그, 그리고..."
"대부인, 아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전해들었습니다."
언소영은 당황했다. 아무리 의붓어미라고는 해도 이런 관계까지 모조리 밝힐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관계를.
하지만 제갈미령의 입에서 이어지는 말에 언소영은 납득, 당황, 안도를 연달아 느껴야했다.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같은 입장이니까요."
같은 입장?
'의붓어미와?'
제갈미령에게 돌아갔던 시선을 다시 강윤에게 돌려보니, 시선이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상공."
흠칫하는 강윤의 옆에서 제갈미령의 눈이 이채로운 빛을 띠는 것이 더 신경쓰였지만...
"우리 해야할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네요?"
언소영은 우선 자신의 어린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실은 제가 여차저차해서 어머니의 아들인 척을..."
"당가에서 당혜원 여협과 만나게 되었고..."
"팽연화 여협에게는 무공을 배우는 과정에서... 아니... 예, 그렇죠, 실은 운기행공을 미끼로..."
언젠가는 겪어야하는 과정이긴 했다. 진실을 털어놓는 과정.
어느 정도의 바늘방석을 각오하기도 했지만, 역시 힘들다.
한없이 따사롭던 언소영의 눈은 마치 부동명왕처럼 엄중한 시선으로 내 발언에 점수를 매기는 듯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다가 사실이 왜곡된 것 같다 싶으면 여지없이 팩트체크에 들어갔다.
아니, 팽연화 얘는 그걸 어머니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어?
"...이상입니다."
"흐음..."
언소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심리적 압박 멈춰!
"상공."
"넵."
나는 바짝 긴장했다.
"저는 상공의 약속이 지켜질까 걱정됐어요. 아가가 태어날 때까지 꼭 찾아오겠다는 약속."
약속은 지켜졌지만 나는 여전히 닥치고 듣고만 있었다.
"그동안 아가가 무럭무럭 자라주면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키워줄 수 있을까 매일매일 생각했답니다."
"그런 상상 속에는 상공이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어요."
"하지만 결국 이렇게 찾아와줘서 너무 반갑고 기뻤는데..."
언소영의 시선이 제갈미령을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다른 여자와 함께 찾아온걸, 무슨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무릎이 덜덜 떨린다. 언소영의 눈은 열화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내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당혜원처럼 한없이 절망하는 것보다는, 분노가 차라리 낫다. 태교적으로다가, 아마 그럴 거다.
역시 거대세가 안주인, 부드러움 속에 강단이...
뚝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멎자, 내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뻐해요."
"...네?"
내 얼빠진 목소리에는 아랑곳않고, 언소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직감적으로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다른 예쁜 여자가 있으면 손을 댈 것 같다고."
"..."
"이미 예상한 문제에 대비도 해놓지 않고 있다가, 그 문제가 일어났다고 해서 부당하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긴장되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기대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축하해요, 적어도 이 문제로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다고 할 일은 없을 거랍니다."
"소영..."
"하지만."
가슴이 북받쳐올라 언소영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봄바람처럼 내 마음 속을 따스하게 하려던 그 때.
다시 꽃샘추위가 몰려온다.
"그냥 용서해줄 수도 없어요."
"네...?"
얼음장처럼 굳은 표정을 지은 언소영의 입에서 냉엄한 판결이 떨어졌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방사 금지. 절대 금지에요. 저랑도, 제갈 여협이랑도 금지에요."
옆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확 굳었다.
"혹시 너무 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으면 즉시 여길 떠나면 돼요. 어렵지 않은 일이죠?"
아이구 감사합니다 하고 나갔다가는 다음에 만났을 때는 '어머, 누구시죠?' 라고 할 것 같다.
"요, 용서를 어떻게 구하면...!"
"글쎄요? 저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잘 모르겠네요?"
알아서 생각해보라는 말 같았다.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것 같은 태도에, 어떻게 말을 붙여봐야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저, 저기 그럼..."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언소영.
"우리 아가한테 인사라도 한 번 해봐도 돼요...?"
언소영은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춤주춤 다가가서 언소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배를 만졌다.
"안녕...? 아가야, 아빠야. 우리 처음 만나는 거지...?"
둥그렇게 부풀어오른 배가 만져졌다. 직접 만져보고 싶었지만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는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지금 엄마가 많이 화가 나서... 놀랐을 수도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마."
"..."
"아빠가 너무 잘못해서 혼이 나는 거니까, 아가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밥 많이 먹고 튼튼하게 커야된다?"
그리고 배에 대고 뽀뽀를 한 번 해주자, 언소영이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무슨...! ...아니에요. 저 이제 가볼게요. 시비에게 방을 내주라고 할테니까, 따라가면 돼요."
언소영은 불편한 배를 감싸쥐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달랑 두 사람만 남은 응접실에서, 나는 어머니와 허탈한 시선을 교환했다.
"...아들, 여기 있는 동안 무공 수련이나 열심히 할까?"
그거 말고 달리 할게 있겠습니까? 이참에 구룡쟁패 대비 훈련이나 빡세게 해놓자.
언소영한테는 계속 잘못했다고 하면 어떻게든 마음이 풀리겠지.
언소영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굉장한 배신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참을만은 했다. 색마의 제자이기 때문에, 결국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견했던 탓일까?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까지도 계속 곁에 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했다.
한 번 건드린 여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색마라는 자들의 행태였으니까. 하긴, 강윤이 보통 색마와 같은 행동을 취한 적이 있던가.
한편으론 질투심도 났다. 아이를 가져 군살이 붙고 몸매가 망가진 자신과는 달리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있는 제갈미령은 너무 아름다웠다.
'매번 용서해주면 안 돼...!'
그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부터, 결국 용서해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하지만 당혜원, 팽연화, 제갈미령 가운데 제대로 화를 냈던 것은 오로지 팽연화, 그나마도 하루만에 풀어줬다고 하지 않는가.
이대로 계속 고삐풀린 말처럼 여자를 늘려가다가는...
[아빠가 너무 잘못해서 혼이 나는 거니까, 아가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밥 많이 먹고 튼튼하게 커야된다?]
언소영은 고개를 붕붕 저으며 도리질을 쳤다. 용서하면 안 된다. 절대로.
'적어도 한동안은 따끔하게 벌을 줘야지. 그냥 데려오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뱃속의 아기에게 따뜻하게 속삭이는 그 모습을 애써 지워버리며, 언소영은 판관처럼 엄중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