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47화 (47/383)

밀푸색마 EP.47 상공, 제발 날 안아줘요 (1)

"...뉘신가?"

소름이 쫙 돋았다.

어머니로서의 제갈미령, 여인으로서의 제갈미령은 제법 보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적의가 넘실대는 눈으로 형완을 응시하는 제갈미령은 그야말로 암사자 그 자체였다.

"나는 명교 일장로의 제자..."

"더 들을 것 없겠어."

차갑게 말을 끊어버린 제갈미령은 바로 지풍을 날렸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지풍이 날아갔지만, 형완은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지풍의 끝이 낭창낭창 휘어들어가며, 어디로 공격이 들어갈지 예측이 쉽지 않았다.

'미친...'

나는 네댓가닥씩 날려도 지풍을 손쉽게 피하던 형완이 결국 손해를 감수하고 앞으로 나섰다.

파싯

진한 검기가 실린 단검으로 한 가닥 지풍을 겨우 격퇴한 형완은 갑자기 발로 옆에 있던 평상을 걷어차올렸다.

그 직후 어느새 옆으로 돌아날아온 판관필에 평상이 두 쪽이 났고, 그 틈에 형완은 몸을 빼냈다.

무시무시했다.

여리여리하고 이지적인 인상을 보고 제갈미령은 무당파처럼 유(柔)의 이치를 따르는 무공을 쓸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한 뼘이 조금 넘는 길이의 판관필은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가서 형완을 폭력적으로 몰아넣었다.

날카로운 지풍으로 견제하는 사이에 다시 진기의 실을 뻗어 판관필을 회수하면, 다시 형완에게 지옥이 시작되었다.

가끔 중거리전에서 쳐발리던 형완 쪽에서 간신히 근접박투로 상황을 끌고 가기도 했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 같다...'

제갈미령의 손에 쥐어진채 유려하게 움직이는 판관필이 몇 번 허공을 가르면, 형완은 형편없이 밀려나 거리를 허락해야만 했다.

근거리에서도 중거리에서도 손해를 보던 형완은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건 비무가 아닌가! 어찌하여 그대는..."

"저는 수락한다고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만? 귀교에서는 혹시 습격이라는 말의 뜻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제갈미령의 앞이라 쌍욕은 못하겠고 한 번 비꼬아주자 형완은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제갈미령을 상대하기도 바쁜 것 같았다.

형완이 서서히 수세에 몰리고, 도망갔던 사람들도 골목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구경하기 시작할 무렵.

"이, 이 일은 잊지 않겠다!"

형완은 결국 빤스런을 치고 말았다.

제갈미령은 굳이 쫓아갈 생각은 없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숨조차 격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력 차이가 실감이 났다.

"현아, 다친 곳은 없니?"

다가오면서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본 제갈미령은 나를 꼭 안아주었다....가.

어쩐지 석연찮은 타이밍에 도로 놓아주었다.

뭐지? 기분 탓인가?

"비겁한 자 같으니...!"

마교에서도 손꼽히는 후기지수인 형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성한 비무 중에 남의 도움을 받고서도 그렇게 뻔뻔한 자는 난생 처음 보았다.

날것 그대로 욕설을 퍼붓던 때가 차라리 나았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존댓말을 하자 훨씬 더 얄밉게 느껴졌다.

'그 판관필을 쓰던 여고수...'

쇠로 된 붓을 몇 번 찔러오자 순식간에 자신이 수세에 몰렸다.

고현이라는 자가 얼씨구나 하면서 그 틈을 타 달려들 것처럼 굴기에, 결국 형완은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자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모였다... 이걸 스승님께 가져가면 스승님께서도 흡족해하실터...'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인 정보 수집 과정에 일장로가 머리에 핏대를 세울 것도 모르고, 형완은 뿌듯함에 입꼬리를 올렸다.

당가에 돌아오자마자 제갈미령이 나를 과보호하기 시작했다... 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형완인지 뭔지 하는 머저리를 격퇴한 다음, 제갈미령은 나를 한 번 안아보고는 별 상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안심한 듯했다.

뭔가 눈치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제갈미령이 접근하기 한참 전부터 손을 쉬고 있었기 때문에 권장법을 쓴다고 이상하게 여겼을 가능성은 없다.

...없겠지?

이상한 놈에게 엮였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하라는 정도의 주의만을 받았을 뿐이긴 한데, 묘하게 불안했다.

"...그래서 저한테 왔다구요?"

당혜원의 집무실에서, 방 주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당혜원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살살 쓰다듬었다.

"혜원이랑 우리 아가 보러 온 김에 얘기하는 거죠. 만나는게 주목적, 방금 얘기는 부목적."

"아닌 것 같은데..."

의심스럽게 날 보면서도 배를 만져주면 좋아한다.

당혜원은 아이를 가지고나니까, 좀 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 것 같았다.

오랜 세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나로 인해 충족되면서 집착으로 변질되는 감이 있었는데, 아이를 가지면서 그 집착이 조금 옮겨간 느낌이랄까.

내 심리학(배운 적 없음)에 따르면 아무튼 그랬다.

"그 형완이라는 고수와 싸우다가 제갈 여협이 도와준게 전부란 말이죠?"

"네, 딱히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제갈미령도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뒤통수가 간지럽다.

"그럼 저도 뭐라고 해줄 말은 없겠네요. 하지만 마교라..."

당혜원은 제갈미령의 반응보다는 마교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마교도가 무슨 생각으로 사천에서 백주대낮에, 게다가 비무첩도 보내지 않고 시전에서 비무를 벌이자고 한 걸까요?"

"글쎄요...? 저도 워낙 갑작스러워서 입이 좀 험해지다보니까 정확한 사정을 캐볼 생각은 못했네요."

다행이다... 내가 이상한게 아니었어.

차라리 습격이라도 당하면 이해라도 되지, 시장바닥에서 무슨 비무 운운이야?

"그러고보니 그 노... 그 사람이 저더러 사천제일기재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언제부터 내가 사천제일기재가 됐지? 아마 제일도 아닐 거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름이 알려질 이벤트 자체가 없는데?

"저도 처음 듣는데요?"

"...그 사람이 혼자 이상한 망상을 했나보네요."

꼬추 새끼에 대해서 더 얘길 나눠봤자 시간낭비다. 나중에 또 기어나오면 그 땐 실력을 키워서 내 힘으로 찍어눌러야지.

애초에 제갈미령의 행동이 어째서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나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기에 당혜원도 딱히 답을 주지는 못했다.

"윤은 제갈 여협도 자기 여자로 만들고 싶은거죠? 그래서 이렇게 고민을 하는 거고?"

오히려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로 튀었다. 당혜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당황했다.

"...우리 아가가 들어요..."

"그럼 필담으로 할까요? 어차피 기억에도 안 남을테니까 아가는 신경쓰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태아가 듣는데 아빠가 다른 여자 따먹는다는 얘기를 해도 되나 몰라...

이제 2개월차인데 아직 귀가 없겠지?

당혜원이 종이와 붓을 내밀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나는 생각하던 것을 전부 말했다.

고천이 의외로 괜찮은 인간이라 가차없이 쳐내기가 뭣하다는 것.

제갈미령에게 고현으로 인식되고 있는 현 상황을 탈피하고 싶다는 것.

최종적으로 제갈미령에게 내 아이를 품게 하고 싶다는 것.

당혜원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지만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윤이 눈독들인 여자가 넷이네요? 남궁세가에 그... 언니도 있고."

눈독들인 걸 기준으로 하면 황보효선까지 다섯이지만 일단 입 닫고 있어야겠다. 아직 아무짓도 안 했는데 뭐.

"미안해요..."

"미안할게 뭐 있어요. 따지고 보면 나도 그 언니 다음으로 들어온 건데. 미안하려면 그 언니한테 미안해야지."

이야기하다보니 이것도 고민해봐야할 문제 같다.

여자를 여럿 안는 건 좋은데, 그 여자들끼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임신시키고 책임 안 지고 버리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겠지만 난 그게 싫다.

언소영은 자기 말고 여자가 이렇게 늘어난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좋아하진 않겠다.'

짝짝

손뼉을 치는 소리에 어느새 숙인 고개를 들었다.

"우선 지금 중요한 얘기는 그게 아닌 거죠? 제갈 여협을 어떻게 대하는게 가장 좋을지를 얘기해야되잖아요?"

"...그랬죠."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그냥 태연하게 대해요."

아니, 그래도 되나?

"제갈 여협의 머릿속은 굉장히 불안정할 거에요. 지금 우리가 고민해도 명확히 어떨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게 없죠."

하긴 그랬다.

자길 범하고 있는 아들, 그 아들이 낯선 무공을 쓰는 모습을 보았다고 치자.

무공이란 일조일석에 이뤄질 수 없기 때문에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인가 고민하는게 합리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갈미령은 내가 아들일 거라고 믿고 싶어하겠지.'

그래야 죽은 고현이 산 사람이 되니까.

이런 불명확한 조건 속에서 사람 심리를 짐작할 수 있을리가.

"게다가 제갈 여협은 굉장히 영리한 사람이에요. 정말로 모르든, 알면서 모른 척을 하든 뭔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죠."

어설프게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보다는 지켜보는게 이득일 수 있어요, 라는 당혜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알려줘요. 요즘 업무는 대부분 부대주한테 맡긴 상태라서, 시간도 많으니까요."

"알겠어요."

"그리고..."

당혜원이 말을 질질 끌자, 나는 말해보란 뜻으로 눈을 맞췄다.

"요, 요즘은 방사도 안 하니까, 우리 아가 만나러 자주 와주고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드리프트 오지네.

아기가 생겼으니 당연히 섹스는 참아야된다. 그래서 당혜원은 최근 섹스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었다.

그래도 자주 보고 싶다고 하는 얼굴이 너무 귀여웠다.

가볍게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나니, 당혜원이 만족스럽게 웃는게 보였다.

강윤이 당혜원을 찾아갔을 무렵, 팽연화는 제갈미령의 방문을 받았다.

오늘은 강윤이 제갈미령과 함께 시전에 나가느라 수련을 쉬겠다고 전갈을 받은 차였는데, 같이 나갔을 제갈미령이 꽤나 일찍 돌아온 것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우선 손님을 들이는게 먼저였다.

굳이 연무장에서 만나야할 이유도 없기에, 팽연화는 응접실을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시비가 구석구석 잘 청소해두기는 했지만, 사람이 들지 않아 온기가 돌지 않는 응접실에 따뜻한 김이 올랐다.

"령 동생, 어쩐 일인가? 조카와 시전에 나간다고 들었는데?"

움찔

제갈미령의 어깨가 떨렸다. 제갈미령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팽연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겐가? 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라도 들어보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았는가."

"언니..."

제갈미령은 눈을 잠시 휘둥그레 뜨더니, 곧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팽연화에게 안겨들었다.

"흐아아아앙..."

마치 아이처럼 소리내어 눈물을 흘리는 제갈미령의 모습에 팽연화는 당황했지만 우선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서 달랬다.

당무혼이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본 것도 벌써 몇 년 전인지.

손에 따스한 진기를 모아서 부드럽게 쓸어주자 제갈미령의 울음은 곧 진정되는 듯했다.

"령 동생,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네. 편한 쪽으로 해도 돼."

"..."

"단지 내가 걱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외면하고 뒤로 미뤘다가 령 동생이 더 힘들어하는 거야. 그것만 알고 있어주면 되네."

"...오랜만에 언니 노릇 해주시네요."

"먼저 태어난 보람이 있지?"

울음 때문에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지만 제갈미령은 한바탕 눈물을 흘린 것으로 어느 정도 기운을 되찾은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팽연화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정리가 되었나?"

"...아뇨. 하지만 저 스스로 답을 구해야되겠다는 것만은 알았어요."

"그럼 됐네."

제갈미령은 그대로 인사를 한 다음 응접실을 떠나갔고, 팽연화는 그 뒷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갈미령 같은 여자가 다른 문제가 있어서 눈물까지 흘릴 것 같지는 않았다.

'강윤.'

아마도 아들 문제.

특수한 운기행공을 칭하면서 자신을 범할 기회만을 노리는 그 남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잘못이 있다는게 밝혀지면...'

기어코 버릇을 고쳐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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