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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푸색마-46화 (46/383)

밀푸색마 EP.46 거절이라 했는가? (2)

팽연화의 안에 듬뿍 싸질러주고 나서 처소로 돌아와보니, 고천이 돌아와있었다.

원래부터 싱글싱글 웃고다니던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수심깊어보이는 얼굴.

나는 제갈미령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어머니는 잘 모시고 있었느냐?"

"예."

제갈미령의 눈가가 꿈틀하는 것이 보인다. 모시고 있었죠. 자알.

'자지로 밤마다.'

요 며칠 불꽃자지로 밤마다 효도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고천은 대수롭지 않은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공,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안색이 어두우십니다."

"...아무 일도 아니오."

아무 일도 아니긴 개뿔이.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구만.

"아버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별 도움은 되지 않을지언정, 들어드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고천은 잠시 미간을 모으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냥 조금 골치가 아플 뿐이니, 아비에게 맡겨두도록 해라."

고천은 정말 내 아버지가 된듯 듬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윽, 갑자기 죄책감이...

"그보다 무련각주께 전해들었다만, 구룡쟁패에 나가는걸 거절했다면서?"

그 아재는 그새 입을 놀렸나보네.

"지금은 굳이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아직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래, 잘 생각했다. 그렇게 급하게 생각할 것도 없지. 그렇지 않소, 부인?"

고천은 그렇게 제갈미령에게 시선을 똑바로 맞추자, 곧 이상함을 느낀듯 입을 열었다.

"부인, 무슨 일이 있소? 어쩐지 안색이..."

등선공도 없이 밤마다 효도를 받은 결과, 제갈미령의 안색은 피로에 쩔어있었다.

그래도 등선공이 없는걸 고려해서 하루 3시진 가량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여전히 피로가 얼굴에 남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잘 모셨다면서 어머니 안색이 이렇게 되도록 무얼 했느냐?"

고천이 날 꾸짖는 모습은 정말로 아버지 같았다. 정말 날 양자로 들이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그럼 진짜 미안해지는데...

"현이를 나무라지 말아요. 그냥 요즘... 잠이 잘 안 와서..."

그러자 고천이 아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제갈미령이 잠을 잘 못 자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으흠, 그래도 아들이 됐으면 신경을 좀 썼어야지..."

"그래도 요즘은 현이가 밤에 손도 잡아주고 같이 자니까 훨씬 나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공."

아, 아줌마. 그건 말하면 안 되는데.

고천은 별생각없이 날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갈미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순간 동작이 굳었다.

제갈미령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순간 그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 이 자식... 수상한 짓 하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

[잠깐, 대협. 오해십니다. 정말 손만 잡았을 뿐입니다.]

[오해? 손만 잡고 잤다고? 내가 그런 소릴 믿을 것 같은가?]

[그럼 뭘 했겠습니까? 제갈 여협에게 전 아들입니다, 아들! 무공도 딸리고 아들인데 어머니를 상대로 뭘 한다는 말입니까?!]

위치로도 무공으로도 밀린다는 내 항변에 고천은 잠시 제 턱을 쓰다듬더니, 곧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

[납득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잠시나마 어머니로 모시기로 한 분이니만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지켜보기 괴로워서...]

[자네...]

내가 좀 더 자세한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주자, 고천은 오히려 면목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가위에 눌려 고통받던 아내, 보다못해 시비가 데려온 가짜 아들, 그 가짜 아들이 매일밤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다 못해 어머니가 같이 재우기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사람이라면 이걸로 날 비난할 수 없지. 암.

내 좆방망이가 제갈미령의 보지에 불꽃효도했다는 사실을 제하고 보면, 나는 완벽한 효자였으니까.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전음이 너무 길어서 눈치챘는지 제갈미령이 눈을 흘기고 있었다.

"또 남자들의 대화에요? 혹시... 나무라지 말라고 했더니 전음으로 나무라던 건..."

"허, 부인은 날 뭘로 보고 그리 말하는 것이오? 별다른 얘기는 아니었으니 염려마시구려."

안 그래도 가라앉던 고천의 기세가 단숨에 꺾이고 말았다.

고천의 부정에도 여전히 제갈미령이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내자, 고천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현아, 어머니를 모시고 시전에 나갔다오너라. 우공상단에서 교역에서 돌아와 시전에 물건을 풀었다고 난리더구나."

허접한 눈돌리기였지만 나는 일단 호응해주었다.

"그렇습니까? 우공상단이면 사천에서 제일 유명한 상단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만..."

"사천 뿐이냐?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상단이지. 특히 새외와의 교역 방면에 있어서는..."

고천의 우공상단 바이럴이 한 차례 지나가고, '아무튼 쇼핑하기에는 딱이야, 딱!'이라는 인식을 공유했을 무렵, 나는 제갈미령에게 말했다.

"어머니, 다녀오시겠습니까? 아들이 모시겠습니다."

나는 정말 사심없이 웃으면서 물었는데, 제갈미령은 흠칫한 표정을 짓더니 고천의 눈치를 몰래 살폈다.

아니, 저 아직 당혜원이랑도 야외섹스 해금 안 했는데 왜 이러십니까...

"그럼 내일 다녀오시구려. 사천 비단을 잔뜩 사놓고 정작 그에 어울리는 보석은 얼마 사질 않았잖소."

고천이 그렇게 등을 떠밀자, 제갈미령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아들이랑 나들이나 나갈까?"

이번에는 정말 아무일도 없이 조용히 다녀만 올 거니까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십쇼...

분명 조용히 물건만 사다 올 계획이었는데...

제갈미령이 잠깐 마차를 부르러 간 사이에 일은 벌어졌다.

뭔가 내 기와 미묘하게 반발하는 끈적끈적한 기를 느끼고 그 쪽을 돌아보니, 똑같이 나를 응시하는 놈이 있었다.

뭐지, 이 미친 놈은?

"네놈이 사천제일기재, 고현이 틀림없으렷다!"

뭐야, 이 새끼 뭐야... 토나와... 강호에 나오면 진짜 다들 이래?

"나는 명교 일장로의 제자, 마환룡 형완이다! 내 스승께서는..."

뭔가 중얼중얼 떠들고 있는데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무슨 길거리 캐스팅도 아니고 뭐야? 갑툭튀도 정도껏 해야되는거 아냐?

이게 무림 감성인데 나만 몰랐던 거야? 멀어지는 소리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니 시전 사람들이 허둥지둥 장사판을 접고 도망을 치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비무를 신청한다!"

형완인지 나발인지가 자기 혼자 중얼중얼 떠들다가 비무 운운을 하는 순간, 나는 정신이 확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손발 오그라드는 감성이야 그렇다치고, 맞으면 죽는다.

내가 정신을 차린 순간, 개새끼가 치사하게 바로 장력을 밀어냈다.

나도 바로 천양장을 날려 맞받아쳤다.

두 장력이 맞부딪혀 상쇄되자, 그 여파로 일진광풍이 몰아닥치며 주변의 물건과 상인들을 쓸어버렸다.

"미친 새끼야! 길바닥에서 다짜고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쯧, 강호인으로서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자로구나. 어디에서나 생사결이 벌어질 수 있음을 각오해두는 것이 강호인으로서의 자세임을 모르느냐?"

"지랄하네! 나야 니 말마따나 강호인이니 그렇다치자.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로 너 같은 놈 때문에 횡액을 맞아야되냐고!"

"허어, 사천제일기재라는 자가 말하는 모양은 시정잡배요, 민초를 핑계로 승부를 피하려 하니 가소로울 따름이구나."

내 다섯 손가락에서 한꺼번에 뿜어져나간 천양지를 역수로 쥔 단검을 움직여 모조리 격퇴한 형완은, 손가락을 허공에 튕겼다.

지풍이 날아오나 해서 잠시 긴장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씨발!"

쉬이익

세 갈래의 음유한 지력이 내 앞뒤를 노리고 오는 것을 뒤늦게 감지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팽이처럼 돌렸다.

목, 옆구리, 등을 노리고 들어온 장력을 권과 각으로 모조리 털어버리고 나니, 이미 형완은 한참 접근한 다음이었다.

"한심하긴. 강호에선 목이 날아간 놈이 나쁜 거란 간단한 진리도 모르나?"

"그래서 나쁜 놈으로 만들어주려고!"

나 역시 현음지기를 끌어올려 음유한 기운을 실어 지력을 털어냈다. 비슷한 수법으로 받아쳐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놈은 여유롭게 보법으로 모두 피해버렸다.

'이거, 좀 밀리나...?'

팽연화가 시종일관 강조하던 '상황을 장악할 것'이라는 명제가 잘 지켜지지 않는 걸로 봐서, 솔직히 승산은 그리 높지 않다.

놈의 동작은 유기적이었고, 내가 작정하고 날리는 공격에도 기세가 조금 흐트러질 뿐이었다.

내가 날리는 공격이 모두 놈의 계산 안에 들어있다는 것.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 명은 더 꼽아볼 수 있네."

"실력있는 친구 많아서 좋겠다, 이 미친 놈아!"

형완의 단검을 천양장으로 밀쳐내고, 시간차를 두고 등룡각으로 턱을 올려찼지만 간발의 차이로 놈의 손에 잡힌다.

연이어 반대쪽 발로 놈을 밀어내서 두 다리가 자유로워지자마자, 고개를 바로 꺾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지풍을 피했다.

아마도 이놈은 완전한 절정고수가 분명했다.

나처럼 내력만 남아나는 반쪽짜리가 아니라, 기술과 내공 모두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

실력이 많이 늘어서 그나마 합이라도 맞춰볼 수 있는 정도의 고수인 것이다.

게다가 황보효선과 싸울 때와는 주변 상황이 반대였다.

그 때는 아무도 없는 숲 속인데다가, 검을 쓰기에 불편할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있었고, 나는 그나마 험한 산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 시전에는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짐을 챙기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고, 장력이 자칫 빗나갔다간 그들의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도 있었다.

눈 딱 감고 무시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들 틈에는 제법 꼴리는 밀프가 몇 명 보였다.

'내가 죽을 상황이 아니고서야 꼴리는 밀프를 내 손으로 해칠 수는 없다!'

형완은 그런 내 사정을 짐작하는지 어떤지, 계속 참견을 해댔다.

"사람의 삶이란 모두 제가 알아서 챙기는 것일세. 칼날이 내 목을 위협할 때 나를 마지막으로 지켜주는 건 나 자신의 실력..."

"그 칼 쥐고 있는 새끼가 어디서 훈장질이야!"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게 없는 새끼였다. 게다가 아까부터 내 내공과 반발하는 불쾌한 기운.

이건 틀림없는 마기였다. 제 입으로 명교 운운하기도 했으니 틀림없었다.

사부가 알려준 무공 상식 중에도 있기는 했는데, 설마 사천 한복판에서 마기를 풀풀 풍기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사실 이렇게 공력을 써가면서 싸워도 신경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미한 불쾌감이었지만 밉살맞은 놈이 뿌려대니까 짜증이 났다.

이 새끼는 마교에나 처박혀있을 것이지 왜 여기서 지랄이야? 기분 더럽게.

마교 존나 먼 동네에 있는거 아니었어?

"자네는 어떻게 그 실력으로 사천제일기재를 자처하는가? 혈마 어르신께서는 자네의 무엇을 보신 거지?"

갓난아기처럼 혈도에 노폐물 하나 안 쌓인 존나 깨끗한 몸이요.

"자처한 적 없어, 이 새끼야! 그리고 혈마 그 늙은이가 내 뭘 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사부에게 욕을 박는 것은 기사멸조의 대죄이긴 하지만 사부라면 분명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줄 거라고 믿는다.

한편 형완은 내 말을 듣고 제대로 빡쳐버린 것 같았다.

"늙은이...?"

아차, 이 새끼 마교도지. 사부를 존경하나?

하지만 이젠 이놈이 나보다 세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휘리릭

강렬한 기파의 충돌을 느끼고 제갈미령이 돌아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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